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구혜영 옮김 / 창해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숙명』은 최근에야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지만, 사실은 1990년 작품이다. 좀 오래된 신간이랄까. 작가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 세계에 전환점을 맞게 한 소설이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칭한 바 있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그의 데뷔작인 <방과 후>를 읽고 싶었으나, 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약간은 서툰 지식으로 리뷰를 쓴다.

 『숙명』의 설정은 약간 통속적이다. 출간 당시야 전혀 통속적이지 않았을지 모르나,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약간은 '통속적인 설정'에 진부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숙적'이자 라이벌인 두 남자가 성인이 된 뒤에 만나는데, 한 쪽의 첫사랑이 다른 쪽의 아내가 되어 있다던가 말이다. 그리고 제목인 '숙명'이란 단어가 주는 '예고됨' 또한 통속적인 요소를 더한다.

 그러나 그 통속성을 뛰어넘는 '의외성'을 갖추고 있어,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는 통속성을 줄여주는 효과를 보여준다. 그것이 '범인의 의외성'이나 '예기치 못한 반전'임은 당연하다. 오죽했으면 작가가 직접 '마지막 장은 절대로 먼저 읽지 마십시오'란 말을 했겠는가. 독자의 즐거움과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으려 노력한 작가의 수고이니,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하고 펼치시길 바란다.

 『숙명』의 전개구조는 내가 좋아하는 병렬식이다. 그래서 두 가지 사건이 병행되어 나타나지만,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과거와 현재이고, 하나는 '유사쿠'만의 독자적인 조사이기 때문에 헷갈리진 않는다. 단 한 가지 헷갈리는 것은 등장인물이 많다는 것인데, 뭣 하면 메모라도 하면서 보면 되기 때문에 크게 게의치 않는다. 그럼 두 가지 사건을 살펴보자.

 처음 나오는 사건은 과거의 시점으로, 30년 전에 벽돌 병원에서 일어난 사나에 씨 사망 사고를 보여 준다. 그러나 사건은 깊숙히 들어가지 않고 결국 조사는 중단되고 말아, 의문만 남기고 노트 한 권으로 '유사쿠'의 손에 넘어오게 된다. 그는 이 사건이 UR전산의 '우류 가문'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독자적으로 조사를 진행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사쿠'는 현재 시점의 사건과 약간 떨어져 있다.

 또 다른 사건은 현재 시점으로, UR전산의 '스가이' 사장이 우류 가에 있던 독화살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조사에 의해 독화살의 존재 여부를 알고 있는, '우류' 전 사장의 사십구재에 참석한 '우류 가'와 '스가이 가'의 친척들을 용의선상에 올린다. 그리고 알리바이가 명확하지 않고, 사건 현장에 지나갔던 우류 가의 차남, '히로마사'가 첫 번째 용의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만년 2등'이던 '유사쿠'는 자신의 숙적인 '아키히코'의 아내가 자신의 첫사랑인 '마사코'임을 알고 열등감을 느끼고, 그녀의 증언을 토대로 '아키히코'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한편 '유사쿠'는 '마사코'에게서 '보이지 않는 끈'에 대해 듣고 의문을 더해가는데…. 과연 '끈'의 정체는?

 줄거리는 여기에서 마치고, 후자가 '누가 과연 스가이 사장을 죽였을까?'라는 의문을 품게하는 전형적인 추리 소설의 스타일에, '범인의 의외성'과 '탄탄한 트릭'을 갖춘 '본격 추리 소설의 성향'이라면, 전자는 '사나에 씨와 우류 가문의 관계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풀이해 나가는 과정에 '사회파 추리 소설의 성향'인 인간의 어둡고 추악한 탐욕과 그로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벌써 10여 년전의 작품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작품이지만, 그의 최근작인 <용의자 X의 헌신(2005년작)>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아쉬운 작품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래도 '숙명'은 대단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