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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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다니엘 페나크/이정임 옮김, 문학과지성사)
-믿고 보는 권일한선생님 픽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자녀에게 책을 읽힐 수 있을까, 끙끙 고민하는 부모에게, 책 읽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은연중에 ‘TV 때문에 책을 못 읽히겠어.‘라고 생각했는데, ‘텔레비전 탓인가?‘(40쪽)라는 질문에 다시 생각하게 됐다. 언제부터인가 ‘요즘 자라는 아이들은 영상에 익숙해서...‘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내가 책 읽는 건 재미있지만, 재미있게 가르치는 건 못하겠다 싶은 마음에 손놓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텔레비전이 보상이라는 지위로 격상함에 따라, 당연히 독서가 억지로 해야 할 고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에게서 나온...... 우리 자신의 발상이었다는 사실을......(63쪽)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TV가 보상의 지위인 건 똑같은가 보다. 우리 아기는 유튜브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자꾸 TV(유튜브)만 보려고 해서, 궁여지책으로 책 한 권은 꼭 읽어야 TV(유튜브)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꼬박꼬박 읽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피곤하면 못 놀아주니까, TV는 필요악이다. 책 한 권 읽어주고 TV 보여준 다음 피곤해서 골아떨어진 적도 있었고, 한참 아기와 놀아주고나서 아기가 지겨울 만하면 책 읽어주고 TV를 보여준 적도 있었다. 신랑이 퇴근한 후에 아이랑 놀아주는데, 내가 독서모임을 하기라도 하면 피곤한 신랑은 TV를 틀어주고 옆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TV를 없앨까?‘ 싶은 생각이 많이 들면서도 없애지 못하고 있다. 되새긴다. ‘텔레비전 탓인가?‘(40쪽)
‘어떻게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들기보다는, 기꺼이 아이에게 저녁 시간을 내어줘야 한다.‘(67쪽) 대부분의 모임이 온라인으로 대체되었다. 자기 시간이 소중한 나는, 저녁 시간에 이런 저런 모임을 신청한다. 독서모임도 하고, 글쓰기 연수도 하고, 코칭도 조금 배우고. 아기에게 시간을 내주지 않는 엄마인 거 같아, 괜히 미안해진다.
내가 어릴 때 아빠는, 성경동화 테이프를 틀어주시곤 했다.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다윗이나 다니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이야기를 지어내는 건 힘들어 하지만, 이야기를 듣거나 보는 건 언제나 재미있다. 사실 아기가 TV를 통해 보는 것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할 틈 없이 휙휙 지나가는 이야기이다 보니, 재미는 느껴도 감동을 느끼기는 어렵다. 내가 문학을 재미의 여부로만 판단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반 이상을 TV로 접했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집에 쌓아놓은 책들이 많아서, 전공 서적 위주로만 책을 구입하려고 노력했던 때도 있었다. 소설과 동화는 재미를 위한 책이라서 소장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2003년쯤 동생이 빌려온 해리포터 시리즈 1권부터 3권은 동생보다 내가 먼저 다 읽고, 2016년에 해리포터 시리즈 4권부터 7권을 몽땅 다 읽었다. 이야기에 푹 빠져 살았다. 다음날 출근을 앞두고 읽는 이야기책들은 얼마나 꿀맛인지! ‘아, 밤이면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비춰가며 몰래 책을 읽곤 했던 기억들이여!‘(15쪽) 다음날 출근을 감수하고 읽은 이야기라면 ‘조금만 더 읽어야지.‘ 해놓고 밤새 읽었던 [백파선]도 있고, 2주 동안 평균 새벽 3시까지 읽었던 [나니아 연대기]도 있다.-[나니아 연대기]는 다시 읽고 싶어도 분량이 많아서 마음 잡고 읽어야 한다. 이틀만에 다 읽은 [수요일의 전쟁]과 [밉스 가족의 특별한 비밀]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까지 우리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103쪽)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에 빠지는 것은 그래서 꿀맛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151쪽) 소설을 읽는 것은,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다. 소설이 재밌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것을 단순히 ‘재미‘로만 여긴다면, 소설 읽는 데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낭비‘라고 여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때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소설은, 점점 메말라가는 정서에 뿌려지는 한 줄기 물줄기이다.
그렇기에, 소설이든, 뭐든, 책이라면 읽는 게 좋다. 책 읽는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글쓴이는 이렇게 말한다.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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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기차를 기다리는 소년 양철북 청소년문학 2
다니엘 에르난데스 참베르 지음, 오승민 그림, 김정하 옮김 / 양철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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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기다리는 소년](다니엘 에르난데스 참베르/김정하 옮김, 양철북)
-믿고 보는 권일한선생님 픽
-스포일러 주의

짧은 동화이다. 표지의 소년이 플랫폼에서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기다린다. 소년 옆에 앉은 소녀는 우체부인 아빠를 따라 기차역에 왔다가 그 소년을 만난다. 소녀는 그 소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어서였는지, 편견 없이 그 소년을 대한다. 그 소년이 어떤 아이인지 알았을 때는 이미 소년과 소녀가 친밀해진 후였다.
아마도, 초등 선생님들 중에서 재소자 가정을 접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담임을 하면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딱 한 번, 재소자 가정을 본 적이 있는데(많은 사람들이 보는 글이므로 상황 설명은 생략한다.), 편견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십여 년 전에 봤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그만큼 상황이 특수했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사법부를 신뢰했다. 잘못한 사람이 가는 곳이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6년 전 사건을 만난 후에는, 판사가 판단을 잘못할 수 있음을 알았다. 경찰이 수사를 치우쳐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전까지 관심 없었던 수사의 흐름과 법원의 판결에, 관심이 생겼다. 이후에 주목했던 사건이 곰탕 성추행, 수학여행 휴게소 사건이었다. 곰탕 성추행 사건은 여자의 일관적인 진술과 남자의 일관적이지 않은 진술로 여자의 손을 들어주었고(CCTV는 정확한 상황을 보여주지 않았다.), 수학여행 휴게소 사건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운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 나만 해도 지금도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있는데, 그 선생님은 괜찮으신지 모르겠다. 그 사건을 아동학대로 볼 수 있나?
증거주의 원칙을 따르는 우리나라에서, 진술이 일관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는 정말 이상하다. 피해자의 눈물이 그 증거라고 했던 한 방송사도 있었지. 거짓말이라도 진술이 일관되면 그 편을 든다. 울면 증거가 되나?-그러니 ‘선즙필승‘이라는 말까지 생겼지. 한창 읽었던 웹소설에는 여론을 만들어서 사법부를 압박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소설 속 내용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니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다. 여론에 따라 판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뉴스에서 여러 번 보았다. 사람이라 잘못 판결할 수 있고, 그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받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다.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뉴스에서 심심찮게 잘못된 판결을 받고 억울하게 갇혔던 사람들이 나오는 걸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은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동화에 나오는 아이의 아버지는 어떤 까닭으로 갇혔는지 알 수 없다. 죄를 지어서 갇혔든, 억울하게 갇혔든, 죄 짓지 않은 자녀에게는 손가락질을 거두어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범죄했으니 자식도 범죄할 거라는 편견, 있을 수 있다. 부모의 양육방식, 성향이 자녀에게 대물림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부는 부모와 다르게 살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겠지만. 또, 부모와 다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회복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기차를 기다리는 소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계속 재소자에 대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재소자에 대한 생각과 감정의 정리 없이, 소년을 편견 없이 바라볼 용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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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공식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안에 사람을 담아내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평소에 자주 하는 말, 주변에 잔소리하듯 되풀이하는 말은 무엇인가? 사람들과 대화할 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말, 참지 못하고 자꾸 끼어들게 되는 말, 예민하게 반응하고 발끈하게 되는 말, 잦은 의견 차이를 만드는 말은 무엇인가? 그 사이 어딘가에 당신의 공식이 숨어 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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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보여 주는 어떤 참된 영광도 볼 수가 없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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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바보 온달 힘찬문고 34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김호민 그림 / 우리교육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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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온달](이현주, 우리교육)

이번달 성서교육회 독서모임 책이다. 어릴 적 읽었던 [바보 온달]을 떠올리며 읽었다. 양념(?)처럼 들어가 있는 앞 얘기, 뒷 얘기(어린 영혼과 꼬마 별 이야기)와 고승 장군이 [바보 온달]을 생각하게 하는 동화가 되게 했다.-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고승 장군이 어린 시절 온달을 만나 제일 처음 했던 말은˝창피한 일이다. 창피한 일이야......˝(41쪽)였다. 토끼 사냥을 했는데 화살이 빗맞아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 했던 일을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고승 장군이 다시 온달을 만났을 때, 온달이 자신 앞에서 조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질을 했고, 온달은 매질을 견뎌내고 일어섰다. ‘이 천하의 고승 장군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창피한 일이다, 창피한 일이야. 이놈 온달, 두고 보자!˝‘(58쪽) 평강공주는 온달의 집으로 찾아갔고, 고승 장군도 복수를 위해 온달을 찾았다. 곰과 싸우다 상처를 입은 고승 장군이 공주의 마음을 돌리지도 못하고, 온달에게 복수도 하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산을 내려‘(108쪽)오며 ‘수없이 중얼거‘(108쪽)린 말도 ˝창피한 일이다. 으음, 창피한 일이야......˝(108쪽)였다. ‘창피함‘이라는 감정은 혼자 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고승 장군은 평생을(?) 창피하지 않기 위해 살았다.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아야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 양 생각했던 거 같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했다. 고승 장군을 움직이는 힘은 수치심과 인정이었던 거 같다. 행동의 동기가 외부에 있었으므로, 책임도 외부로 돌렸다. 수치심에 못 이겨 애꿎은 말 궁둥이를 채찍으로 때리고, 온달을 원망했다. 감정이 그를 집어삼켰다.
고승 장군에게서 나를 보았다. ‘목사님 딸‘, ‘선생님‘, ‘엄마‘라는 이름 속에 살았다. ‘나‘로 사는 순간을 흘려보냈다. 고승도, ‘사냥꾼‘, ‘장군‘의 이름으로서만 자신이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사냥꾼‘, ‘장군‘으로서는 창피한 일이었겠지만, ‘고승‘으로서는 창피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혹은, 창피한 일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거다.
평강공주는 온달을 고승 장군처럼 만들려고 했다. 온달이 장군이 되었을 때는, 별에게 돌멩이를 던진 자신을 ‘창피하게‘ 여겼다. 고승 장군이 창피하게 여겼던 것을 온달도 창피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제 온달이 두려워하는 것은 공주를 비롯한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뿐이었다.‘(149쪽) 그리고 그 ‘창피함‘ 때문에, 온달은 죽음에 이른다.
무엇을 창피하게 생각해야 할까? 하나님을 믿는 자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루에도 수천 번씩,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자신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게 마땅하다. 허울뿐인 이름이 창피한 일을 겪는 것에 집착하면, 진짜 창피해야 하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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