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또는직접적 인식의 체험은 에드워즈가 수용했던 경험 철학의 언어로서 마음의 감각(the sense of the heart)‘ 이라는 에드워즈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이 새로운 감각의 의미를 해석하는 확신 교리(the doctrine of conviction)가『감정론』의 주요 사상이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적 무능력
아더 핑크 지음, 임원주 옮김 / 가나다출판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적 무능력](아더 핑크/임원주 옮김, 가나다) 304쪽(누적 4869쪽)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은 책이다. 올해 아더핑크의 책을 세 권 읽어야 했는데, 처음 읽었던 [전적 부패]는 다 못 읽고 책꽂이에 고이 꽂혀 있고, [전적 무능력]을 먼저 다 읽었다. 그리고 후에 읽은 책이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 책들을 읽기 전에는 아더 핑크가 누군지도 몰랐다. 개혁주의에 심취(?)하거나 책에 심취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더 핑크가 누군지 모를 것 같다. 이 책을 다 읽은지 다섯 달이 지나서 그때의 생각은 떠올리기 어렵겠지만, 띠지와 조금씩 적어둔 기록을 살펴보면서 서평을 적겠다.
최근 교리에 대해 드는 생각은, 앎에서 그치는 것의 위험성이다. [이것이 개혁신앙이다]에서 보았듯, 앎에서 그치는 교리는 교리를 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알지만 행하지 않는 내 삶을 보며 회의감이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바른‘ 삶,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탓한다. ‘어떻게 믿어도 삶만 바르게 살면 되지 않을까?‘라는 유혹도 생긴다. 예수님이 필요함에도, 예수님을 찾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교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믿음의 선조들이 성경을 이해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교리도 완전하지 않겠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교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 교리를 대체할 만한 교리가 나오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개인적으로 읽어야 하지만, 공동체적으로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교리가 바로 ‘공동체적 성경 읽기‘라는 생각이 든다. 교리를 놓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아더 핑크의 책을 읽다 보면, 다른 교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교파들이 주장하는 바가 어째서 잘못되었는지 바로잡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앞서 읽은 책에서 여러 번 적었지만, ‘어째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의 총회에서는 개교회에 퍼져 있는 아르미니우스주의(반펠라기우스주의)를 그대로 두는가?‘가 제일 궁금하다. 아더 핑크의 책을 비롯한 개혁주의 책을 읽다보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개혁주의와 결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데도 그대로 둔다. 교회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개혁주의가 혼재해 있고, 그대로 가르친다. 내가 예민한 건가?(펠라기우스주의자와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대한 설명은 36-40쪽에 잘 나와 있다.)
아더 핑크의 책을 비롯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책에서 계속 보이는 낱말은 ‘사법적‘이라는 말이다. 아담의 죄에 대한 죄책은 사법적으로 부과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법이다. 그 법을 어긴 대가로 사법적인 판단이 내려졌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설교와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은 롯의 사위들처럼 ‘농담‘으로 여기지 꼭 지켜야 할 ‘법‘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늘날에는 법의 권위마저 무너져서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성경을 법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해도, 그 의미가 퇴색된 느낌이다. 꼭 지켜야 할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내 삶을 옥죄었던 ‘-해야 한다‘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해도 된다‘가 너무 많아졌다. 아니, 다른 사람은 말씀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 그냥 내 삶이 흔들리고 변한 걸까? 이렇게 사람이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마지막날 사법적으로 판결하실 것이다.
흔히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죄인이 되었다고 하면, 단순히 도덕성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고. 하지만 이 책에서는 더 풀어서 설명한다. ‘타락했을 때 인간에게 가해진 형벌 부과에 관련해서 인간은 어떤 도덕적 혹은 영적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그 능력들을 바르게 사용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주의해서 명심할 필요가 있다.‘(41쪽) ‘비록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모든 능력을 타락사건에 의해 상실했지만 사람을 창조한 조물주는 인간을 관할할 권한을 상실하지 않았으며 합당한 것을 요구할 권리를 몰수당하지 않았다는 것도 명확하게 이해하자. 피조물로서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든지 행할 의무가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힘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로 인해 내팽개쳤다는 사실이 우리의 책무를 면제하거나 면제해줄 수도 없다.‘(43쪽) 즉, 우리는 도덕성을 지니고 있지만, 도덕성을 사용하는 능력(?)을 지혜롭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실제로 책에서 ‘우리 본성의 피폐는 지성의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을 지혜롭고 적절하게 사용할 능력에 있다. 사람이 타락하여 상실한 것은 기능이 아니라 원리이다.‘(56쪽)고 말한다.).
사람이 연약해서 죄에 넘어진다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인간의 연약함‘에 앞서 ‘인간의 악함‘은 왜 다루지 않는지 생각한다.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인간이 연약하니까 죄에 넘어지는 것으로, 면죄부로 사용하며 하나님께 화살을 돌리는 것 같아 마음이 늘 좋지 않았다. 그러면, ‘인간은 타락 때문에 도덕적으로 무기력해지고 힘이 없는 지경에 처해졌다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요구는 어떻게 적절할 수 있단 말인가?‘(122쪽) 여기에 대한 답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도덕적으로 무능력하다. 하지만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죄 아래에 팔린 자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정당한 요구를 받는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자신들의 주권자의 의로운 요구사항들에 부응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영원한 죽음의 고통을 짊어진 채 주권자의 의로운 요구에 부응하라는 권면을 받는다.‘(132쪽) 즉,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 뿌리까지 부패한 상태일지라도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책무가 면제되지 않는다.‘(158쪽) 계속해서 말한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의 정당한 주님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합법적인 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명령할 권리를 여전히 소유하고 있고 우리는 순종할 책무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이 관계에 따라 취급하고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능력이 없더라도 순종할 것을 실제로 요구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렇다. 타락은 책임성을 무효화하지도 않았고 손상시키지도 않았다는 것은 매우 확실하다.‘(220쪽) 사람이 연약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님을 이 책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을,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부패한 본성에 의해 가로막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존재로 그리는 것은 사실을 완벽하게 잘못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하지만 내주하는 죄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고 추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247쪽)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씀은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위로가 되는 구절이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 자신이 믿는 것과 실천하는것 사이에, 자신의 목표와 실편 사이에 폭넓은 불일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갈등 속에서 자주 패배한다. 그래서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리고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빈번하게 약해지고 지친다. 자신의 신앙고백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이 싸움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기도 한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청중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그리고 근면하게 검토하여, 내적 반대가 어디에서 일어나며 내적 반대에 대해 자신들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찾아내도록 하라고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269쪽)
사실상 소화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여러 번 읽어봐야 이해가 될까 말까한 책일 것이다. 교리에 관한 책이 이토록 어렵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교리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렵다고 밀어두면 결국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이루기 원한다면, 어려워도 읽는 게 맞는 것 같다. 물론,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는 이런 부분에 한정적인 것은 아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그 행함이 ‘거룩‘(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기반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무엇을 믿든지 ‘선한‘ 삶을 살면 그만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전적 은혜는 전적 무능력을 요구하고, 전적 무능력은 전적 은혜에 매달립니다.(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침내 동물들은 양쪽으로 갈라졌고, 한쪽은 "스노볼에 투표하면 주 삼일 노동을!" 이라는 슬로건을, 다른 한쪽은 ‘나폴레옹에 투표하면 가득 찬 여물통을!"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오직 벤저민만이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식량이 풍족해질 것이라는 주장도, 풍차가 노동을 덜어 줄 것이라는 주장도 믿지 않았다. 단지 풍차가 있든 없든 삶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흘러갈 것이며, 언제나처럼 고생스러울 것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 P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른 동물들보다 더 영리한 돼지들이 농장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비록 그들의 결정 사항도회의에서 다수결에 의해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언어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의 언어](프랜시스 S. 콜린스, 김영사)

내가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고등학생 때였다. 그전까지 성경을 신화로 이해했다.-파울러의 [신앙의 발달단계]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이들이 처음 신앙을 받아들일 때는 신화, 이야기로 이해한다. 그냥 이야기에서 신앙으로 넘어가는 그 시기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성경을 이야기로만 가르치는 교회가 대부분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든, 중3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새벽나라] QT집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청소년 QT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릴 때 아빠가 [예수님이 좋아요]라는 초등학생용 QT책을 종종 사주셨는데, QT를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QT책을 그저 읽기만 했던 터였다. 그렇게 친구를 통해 [새벽나라]를 알았고, 직접 구매해서 읽었다. [새벽나라]에는 창조과학회에서 다룰 만한 내용을 다룬 꼭지가 있었다. 욥기에 나오는 큰 하마가 공룡이라는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성경을 신화로 이해하는 단계를 벗어난 것 같다. 그 꼭지를 읽으려고 [새벽나라]를 구매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야후에 있었던 ‘창조론과 진화론‘ 게시판에서 활동했다. 고등학생 때까지의 성경지식과 과학지식으로 진화론 옹호론자들에게 반박(?)했다. 내가 알던 지식의 깊이가 얕아서 제대로 반박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학생 때도 다음 카페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토론(?)을 잠깐 했다. 이번에는 곧 시들해졌다. 깨달은 것은, 창조론과 진화론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대학생 때 ESF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실존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give&take‘의 하나님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서평에서 내 신앙의 여정(?)을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책의 독서모임 때문이다. 독서모임에서 진화론과 성경이 충돌하는 지점이 있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진화론과 성경이 충돌하는 지점 때문에 교회를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를 떠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이유만 그렇게 댄 것뿐일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간에. 다른 예로, 신유의 은사로 병고침을 받아 믿은 사람은 그 문제로 다시 신앙을 버릴 수도 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질병‘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마치 로렌스 크랩을 보는 듯하다. 크랩이 신앙과 상담을 조화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처렁, 콜린스도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바이오로고스라는 말을 써가며. 그리고 글쓴이는 유전학으로 신의 존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후가 궁금하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지금껏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인간은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나는 ESF에서 [길]을 공부하며 그 방법들을 배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지적설계론, 글쓴이가 서술하고 있는 인간에게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방법 등 다양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 신이 있다고 증명하는 내용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었고,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어려운 내용을 사용해가면서까지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었는지 글쓴이의 의도가 궁금할 뿐이다. 170-171쪽에서 굴드의 서평을 인용하며, 유명한 과학자 중에서 반은 신을 믿고, 반은 안 믿는다고 적었는데, 유명한 과학자를 언급한 것은 인간 이성에 호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보다 인간 이성을 우위에 두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은 철저하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만 서술한다. 내가 보기에는 편협한 하나님이다. 신앙과 과학을 섞으려는 시도를 하며 성경을 과학과 같은 급으로 생각했다. 성경이 세상의 학문과 섞일 수 있는 학문의 일종인지 묻고 싶다. 인간 이성 수준이 그렇게 높은 걸까. 성경과 과학을 같은 선상에 두고 보는 것은, 성경을 과학책으로 읽으려는 시도 아닐까?
또, 이 책은 일반은총의 영역만을 다룬다. 즉,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여부에만 관심이 있다.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은 개신교가 아니라도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 면에서 범신론적인 분위기도 자아낸다. 현 시대는 신의 존재를 믿기만 해도 믿음이 있다고 여긴다. 신의 존재를 믿는 것에서 믿음이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 넘어가지 못한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일까? 그렇게 따지면, 다른 신을 믿어도 똑같지 않나?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류의 책은 독이 든 성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과 신앙이 대치되는 부분이 있다. 또, 심리학과 신앙이 대치되는 부분도 있다. 우리가 접하는 학문 중에 신앙과 대치되지 않는 학문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그런 점에서, 과학이 유난히 신앙과 부딪히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이성과 신앙은 부딪히게 되어 있다. 믿음은, 그 이성을 뛰어넘는 일이다. 물론, 맹목적인 믿음은 배격한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유난히 동성애에 과격하게 반응한다.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려면 모든 죄에 민감해져야 하지 않을까? 성 문제가 있는 목회자의 뉴스를 쉬쉬하고, 우리가 평소에 저지르는 수많은 죄들은 회개하지 않고 넘어가기 일쑤면서, 동성애가 제일 큰 죄인 양 반응하는 게 참 이상하다. 마찬가지로, 진화론만 신앙과 대치되는 것인 양, 과학만 신앙과 대치되는 것인 양, 부분만 보는 시각이 아쉽다. 모든 학문(세계)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관점이 정리되어 있다면, 굳이 진화론에만, 동성애에만 국한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