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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지음, 서제인 옮김, 정희진 해설 / 엘리 / 2023년 4월
평점 :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Horn, Dara/서제인 옮김, 엘리)
이 책은 굉장히 읽기 힘들고,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었다.-서평도 진도가 안 나간다. 말이 어려웠나 하면 그건 아니고, 번역상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평소에 에세이를 읽기 힘들어하고, 이 책이 에세이 형식으로 쓰여져서 힘들게 느껴진 건지도 모르겠다.
죽은 유태인은 관심이 많지만, 살아 있는 유태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죽어야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하나도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그토록 신경 쓰는 게 무슨 소용인가요? (21쪽)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죽은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집착이 겉으로는 가장 상냥하고 시민 정신이 투철해 보이는 형태를 띠고 있을 때조차 인간 존엄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수많은 방식을 풀어내고, 기록하고, 묘사하고, 똑똑히 말할 것이다.(24쪽)
이건 비단 유태인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인에 대해서도 누군가 글을 쓴다면, 비슷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흑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유태인의 죽음만큼이나 관심이 없는 걸까. 하긴, 유태인 학살 현장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중국에도 있었다.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다.
저자는 유태인이다. 유태교의 전통에 매우 익숙하다. 그런 그녀가 유태인의 학살 현장을 보존한 곳마다 찾아다니며 관람하고, 탐탁치 않게 여긴다. 유태인들도, 스스로를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타협과 순응이라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게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면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라는 가장 큰 상을 타내기 위해 아주 조금씩 자신을 포기했다.
스포일러 주의: 그들은 그 게임에서 졌다.(107쪽)
유태인들은 더 나은 곳을 향해 도망치지만, 그곳에서도 유태인들은 오래지 않아 고통받는 신세로 전락한다.
🏷당신이나 당신의 부모님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비용을 들여가며, 자신과 자녀들을 바로 그런 모욕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른 장소들에서 도망쳐 왔다. 그런데 이제 이 새로운 장소 또한 중요한 방식들에 있어, 그리고 삶을 제한하는 방식들에 있어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천천히, 몸에 스며들어 영혼이 뒤흔들리는 방식으로 고통스럽게 발견해가는 것이다. 당신은 이런 새롭고 충격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게 될 뿐 아니라, 그 현실에 굴복하고자 하는 동기에 대해 법정에서 거짓말까지 하게 된다. 혹은 더 나쁘게도, 당신은 당신 자신의 거짓말을 믿기까지 하는데, 현실을 인정하는 일이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16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는 그 장소에서 희망을 찾으려 한다.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과거의 의미를 바꿀 수 있다고. 어떻게 보면 정신승리인 것 같기도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과거의 의미를 바꿀 수는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창조적인 행동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용기와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기도 하다. 엘리스섬에서 변경된 이름들에 관한 그 불멸의 전설을 우리에게 선사한 사람들에게 내가 할 말은 딱 하나뿐이다. 감사합니다.(170쪽)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하기 직전에 저명한 유태인 예술가들을 빼돌렸던 미국인에 대한 기록도 있다. 그런데, 유태인들은 구조된 후 그 미국인을 만나기 꺼려한다. 작가는 구조된 자의 수치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빚지는 마음이 싫었던 걸까.
시오니즘으로 이스라엘에 돌아가게 된 이야기도 있다. 여기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그 시절, 이스라엘에서 다시 나온 사람도 많다고 했다.
작가는 유태인 학살 보존 현장이 ‘인체의 신비‘ 전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후술되어 있지만, 산 자도 모욕을 당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마치 일본에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현장이 재현된 곳이 있다면 작가와 비슷한 생각을 했으려나.
🏷˝이 여성은 가정주부였을 수도, 공장 노동자였을 수도, 음악가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들이 주는 인상은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이 여성은 당신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여성을 당신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 여성이 실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해야 한다. 이런 사색의 말들은 사람을 은유로 바꿔버리는데, 이것이 목표라는 사실이 내게는 서서히 분명해진다. 모든 것을 완전히 제대로 해냄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회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사업에 밀어 넣어진 익명의 죽은 사람들로 가득했던 <인체의 신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291쪽)
🏷같은 시민으로서 살아 있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나 차별, 고정관념을 사회정의의 의제로 삼는 대신, 죽은 유대인을 찬양함으로써 ‘우리는 안전해진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의 죽음을 숭배함으로써, 죽은 자와 산 자를 모두 매장하는 방식이다.(355쪽-해설)
그럼에도 유태인들은 틈을 찾아 나간다. 회복을 위한 길을 제시한다. 삶의 사소한 부분을 쌓아 올림으로써, 상처를 싸맨다.
🏷언제, 어떻게 어떤 기도를 암송할 것인지를 두고 몹시 흥분해 논쟁을 하는 현자들은 생존자들과 생존자의 후예들이며, 파괴된 세계의 자취다. 그들은 마치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조그만 기억에까지 집착하는 애도자들처럼 하느님과의 그 잃어버린 관계의 모든 마지막 세부사항까지 기억하기 위해 속을 태운다. 누군가는 이런 기억은 결국에는 사라질 거라고, 사람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거라고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되는 일이 일어난다. 기억의 과정이 일단 중요해지면, 그것의 세부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적된다. 왜냐하면 기억 자체가 살아 있는 것이 되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는 다음 세대 사람들 모두에 의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340쪽)
기억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사회의 고통과 아픔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