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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탕자, 돌아오다
앙드레 지드 지음 / 포이에마 / 2016년 12월
평점 :
[탕자, 돌아오다](앙드레 지드/배영란 옮김, 포이에마)
-다북다복 12th.
이 책을 쓰신 분은 잘 모르는 분인데 노벨상 수상자라고 한다. 노벨상 수상하신 분들의 책들이 읽기 힘들어서인지, 노벨상 수상자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매우 짧은 책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9장 탕자의 비유가 배경이 되는 이야기다. ‘돌아온 탕자, 아버지의 훈계, 형의 훈계, 어머니, 동생과의 대화‘ 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누가복음의 분위기를 생각하고 읽으면 당황할 수 있다. 어떤 분은 이 소설을 또다른 성경 해석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는 소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첫 챕터 ‘돌아온 탕자‘에서 돌아온 탕자가 돌아오는 내용은 상상한 내용과 같을 수 있다. 다른 점은 이 챕터 끝에 나온다. 탕자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것.
‘아버지의 훈계‘ 챕터에서는 의외의 내용이 나온다. 아버지와 탕자가 대화를 나눈다. 탕자는 아버지의 존재는 도처에 있으니, 떠났지만 떠난 게 아니란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집을 지었다고 했으나, 탕자는 아버지가 직접 지은 건 아니지 않냐며 숨 막히는 곳이었단다. 하, 탕자, 왜 다시 갇혀 지내는 곳으로 돌아왔니?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쾌락으로 바꾼 것을 후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무엇이 남았냐는 질문에, ‘쾌락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남았다고 했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 아버지가 함께 하심을 느꼈단다. 죄 가운데서 은혜를 더 경험할 수 있다는 사도 바울의 말이 생각난다.
🏷˝황야의 메마름 속에 있고 난 후에야 저는 제 갈증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상태가 된 제 마음이 서서히 사랑으로 차올랐다고요. 제 전 재산을 바쳐서 저는 열정을 사들였습니다.”
일부러 죄를 경험할 필요는 없긴 한데, 탕자가 경험한 것을 죄라고 볼 수 있나? 성도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지만, 분리되어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세상과 구별되려는 마음은 여러가지 실패(?)를 경험한다. 탕자가 경험한 것은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형의 훈계‘에서 형은 율법, 형식, 제도, 질서의 대명사로 등장한다. 🏷˝질서에서 어긋나는 건 전부 다 오만함의 소치이자 그 씨앗이란다.”
형은 융통성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일 수 없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방식이 여러 가지일 수 없지.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일 수 없고. 그래야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지 않겠니?”
성경 해석에 차이를 허용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다른 교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형의 훈계까지 살펴보면, 아버지는 집에 관한 걸 형에게 일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형에게 다 맡겼을까?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일까? 이 시점에서 생각나는 성경구절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어머니‘ 챕터다. 앞서 아버지와 형은 ‘훈계‘를 했고, 어머니는 그냥 어머니다. 뒤에 ‘동생과의 대화‘가 있는 걸 보면, 어머니는 대화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보다도 힘들었던 건… 남의 집 종살이를 했던 거죠. 이건 형에게는 말하지 않았네요.”
“왜 숨긴 거냐?”
“저를 학대하고 제 자존심을 건드렸던 못된 주인들이 있었어요. 먹을 것도 거의 주지 않았죠. 그때 전 생각했어요. ‘아, 종살이를 위한 종살이를 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에요. 꿈에 집이 아른거렸고, 결국 이렇게 돌아오게 되었지요.”
‘동생과의 대화‘에서 탕자가 유일하게 움직인다. 이제까지 등장한 인물들은 다 탕자에게 찾아왔는데, 이제 탕자가 동생에게 간다.
🏷˝형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만든 게 대체 뭐였어요?”
“내가 찾아 헤매던 그 자유를, 나는 잃어버렸지. 남에게 얽매인 상태로 종살이를 해야 했거든.”
“나는 이 집에 얽매여 있는 상태인걸요.”
“그래. 하지만 나는 악독한 주인 밑에서 종살이를 했지만, 이 집에서 네가 모시고 있는 사람은 바로 네 부모님이 아니냐.”
(중략)
˝그럼 대체 왜 그렇게 무릎을 꿇은 거예요? 그렇게 힘들었어요?
˝아니, 아직 그렇게 힘든 건 아니었어. 하지만 의심이 들더구나.˝
˝그게 무슨 말이죠?˝
˝모든 게 다 의심스러워졌어. 나 자신도 그렇고. 이제 그만 걸음을 멈추고 싶어졌지. 결국 어딘가에 속해 있고 싶은 상태가 된 거야. 그 못된 주인이 내게 약속했던 안락함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지. 그래, 이제야 분명하게 느껴지는구나. 내가 진 거야.˝
아버지, 형, 어머니는 하나같이 왜 집을 나갔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에 대한 탕자의 답이 다르다.
<아버지와의 문답>
“얘야, 내 곁을 떠났던 이유가 뭐냐?”
“아버지, 제가 정말로 아버지 곁을 떠난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버지의 존재는 도처에 있지 않습니까? 저는 한 번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상속자인 너는 도대체 왜 이 집에서 도망쳤던 게냐?”
“그 집안에 갇혀 지내는 것 같았으니까요. 집이 곧 아버지인 건 아니에요.”
<형과의 문답>
˝대관절 무엇 때문에 집을 떠난 게냐?”
“집이 곧 이 세상의 전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형님이 있으라는 이 집에서는 나 자신이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었어요. 저도 모르게 저는 다른 땅, 다른 문화를 꿈꿨고, 한껏 뛰어다닐 수 있는 길, 아직 뚫리지 않은 그런 길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쭉 뻗어가는 듯한 새로운 나 자신을 상상했지요. 그래서 집을 나갔던 것이고요.”
<어머니와의 문답>
“대체 뭐에 홀려서 그렇게 집 밖으로 나간 거냐?”
“그 생각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아요. 무언가에 홀려서 그런 건 전혀 아니었어요. 그냥 제 자신에게 이끌려서 그렇게 나갔던 거죠.”
“우리 곁에서 멀어지니 행복하던?”
“저는 행복을 찾아 떠난 건 아니었어요.”
“그럼 뭘 찾아서 떠났던 건데?”
“저는… 제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떠났죠.”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여정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 속에서 자신을 알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지만,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갈망이 집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 같다. [죄와 은혜의 지배]와 연결지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