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전5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먼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다. 이 소설을 제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 친했던 친구가 이 책을 읽고는 베르베르의 사상이 이상하다고 흘러가는 말을 내뱉은 기억이 난다. 아무튼 나는 소설책을 좋아하는 편임에도 [개미]책에 대해서만큼은 무관심했고, 그렇게 [개미]는 잊혀져갔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방학, 모 방송사에서 ‘퀴즈 동서남북’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은 책을 읽고 나온 출연자가 그 책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맞히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한 번은 베르베르가 지은 [나무]라는 소설을 소개했다. ‘[나무]라는 소설을 베르베르가 썼던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개미]라는 말이 들렸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 기억을 되살리며 개강하는 즉시 [개미]를 보리라 다짐하고 이 책을 읽기에 이르렀다(참고로, 우리 집은 농협지소와 구멍가게가 두어 개 정도뿐인 촌이라 책을 빌려보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다.).
이 책의 저자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과연 프랑스의 천재작가라 불릴 만 했다. 이 사람은 법학과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과학 잡지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다 [개미]의 파장으로 전업작가가 되었다. 베르베르가 이 책을 쓰면서 함께한 시간은 약 12년, 그러는 동안 120여회의 개작을 거쳤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나무]와, 또 한 번 파장을 일으켰던 [뇌] 역시 베르베르가 쓴 책이다.
[개미]는 3부작으로 이루어졌는데, 1부 개미, 2부 개미의 날, 3부 개미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을 보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 갔는데, ‘개미’라고 묶인 책은 1부와 2부뿐이었고, 3부가 단독적으로 ‘개미혁명’이라고 해서 나와 있었기 때문에 ‘개미혁명’은 ‘개미’의 일부분이 아닌 줄 알았다. 그래서 지난 학기 심화과정 시간에 1부와 2부만 가지고 발표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소설의 구조는 1부에서 3부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을 띠고 있다. 그것은 바로 피라미드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소설에서 백과사전, 개미, 사람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면서 내용이 전개되는데, 결국 끝에는 하나의 일치점-내 생각에는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인 것 같다-을 찾게 되는 것에서 피라미드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1부에서 언급되고 있는 수수께끼의 답이 피라미드인데, 이것이 바로 소설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열쇠다. 즉, 성냥개비 6개로 정삼각형 4개 만들기라는 수수께끼는, 3차원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피라미드를 답으로 가지고 있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한다. [개미]의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라고 봤을 때, 이 소설의 구조와 주제는 피라미드형으로 일치하는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이렇게 짜임새 있게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 후기를 보면 베르베르가 독자에게 의도하고자 한, 두 가지 내용이 나온다. 하나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가 책을 보면서 스스로를 개미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위에서도 밝혔지만, 성냥개비 6개로 정삼각형 4개 만들기의 수수께끼는 다른 사람처럼 생각하면 풀 수 없는 것이었다. 내 동생은 피라미드처럼 입체적인 것이 아닌 평면적인 데서 답을 찾아내긴 했지만(그러면서 문제가 이상하다고 했다.), 나는 책에 수수께끼의 답이 나올 때까지 오랜 시간을 끙끙댔다. 그 뒤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더 나오는데, 성냥개비 6개로 정삼각형 6개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의 힌트는 다른 사람처럼 생각하기였고, 그래서 쉽게 풀 수 있었다. 두 경우를 비교해 보면서, 내가 정말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의 가치관과 틀을 깨고 세상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개미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고는 놀란 적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베르베르가 의도한 내용은 나에게 다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이룬 이 소설이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생각, 가치관이 소설 속에 그대로 묻어나올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잠깐이긴 하지만, 나도 베르베르처럼 글을 잘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상적인 부분에서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베르베르와 나를 비교해 보았다. 첫째는 과학이고, 둘째는 동양사상이다. 먼저 과학에 대해 살펴보면, 과학에 대한 태도와 진화론에 대한 생각을 비교했다.
여기에 대해 적기 전에 한 가지 밝혀두자면,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진화론과 창조론 게시판에서 활동했다. 요즘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열심히 활동을 했다. 그리고 현대과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그 사람들의 태도에 실망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대장금]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고 아는 것을 안다 하는 것이 모르는 것을 안다 하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고 지상렬이 말하는 장면에 얼마나 공감했던지. 과학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싫었다. 패러다임은 계속 변하기 마련인데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아무튼, 이 책 2부 개미의 날에 보면 아버지 조나탕과 아들 니콜라가 과학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나탕은 현대의 과학적 방법이 첫 번째 수수께끼의 힌트처럼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방법으로 전개돼야 한다고 말했고, 니콜라는 현대과학의 눈부신 발전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과학만능주의에 사로잡혀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베르베르는 이 대화를 통해 과학의 방법, 즉 가설을 세우고 측정하고 실험하는 획일적 방법만을 사용하는 데 대해 비판했다. 과학의 획일적 방법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에는 내가 베르베르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진화론과 창조론 카페에서 논쟁을 벌였던 내용이 생각났다. 나는 진화론자들에게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방법이 다 옳은 것인 마냥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진화론자들은 내 의견을 반박하면서 하는 말이, 네가 뭘 안다고 큰 소리냐, 그래도 지금까지 과학이 발전해 오면서 이 방법이 제일 객관적인 것으로 판정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야말로 니콜라와 같은 사람을 만난 셈이었다.
또, 책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 책이 철저한 진화론의 바탕 위에 다른 사상을 우려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만난 진화론자들은 100이면 100, 모두 아니면 아니라고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철저히 진화론 중심인 베르베르에게도 편견이 생겼다. 물론 내 의견이 다 옳을 리는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인 걸까? 과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 추정뿐인 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내가 믿어야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인가? 단지 진화론에 대한 내 편견일까?
둘째, 동양사상은 2부에서 전반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편견이지만 베르베르는 서양 사람이면서도 동양 사상을 좋아하니 내심 기분 나빴다. 정작 동양 사람인 나도 주역 한 번 읽어본 적이 없고 풍월로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것뿐인데, 베르베르는 자신이 주역에 대해 얼마나 알기에 그것을 책 속에 우려내었느냐는 말이다. 서양 사상에다 동양 사상을 얹어놓았으니 이거야 완전히 짬뽕이다. 헤겔의 변증법이 생각난다. 서양 사상과 동양 사상은 약간 대치되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정인지, 반인지는 따질 수 없으나 아무튼 합은 이 두 사상이 더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혼합주의(?)적인 생각은 좀 위험하지 않을까? 언뜻 보기에는 그럴싸하게 보이긴 하지만, 난 성경을 보면서 혼합주의에 대해 아주 심각성을 느꼈다. 혼합주의로 인해 찾아온 것은 바로 성적 타락이고 패망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호기심이 일었던 내용을 적고 이 글을 접을까 한다. 2부 개미의 날 첫 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적어보자면, ‘모든 것은 하나 안에 있다(아브라함)’, ‘모든 것은 사랑이다(예수 그리스도)’, ‘모든 것은 경제적이다(칼 마르크스)’, ‘모든 것은 성적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앨버트 아인슈타인)’이라고 되어있다. 베르베르가 이 사람들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 사람들을 시대 사상 흐름의 주축으로 삼았을까?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이 2부 맨 앞장에 나왔는지는 베르베르만이 알 것 같다. 하여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모든 것은 하나 안에 있다(아브라함)’에서는 선뜻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하나’가 신이라면 말이 된다. ‘모든 것은 성적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이 말은 상당히 공감했다. 프로이트의 책 중에 꿈의 해석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성적인 부분이 많이 나온다. 그 책을 읽을 당시에는, 프로이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성적인 내용을 자주 언급했나 싶었다. 그런데 베르베르가 적은 이 글을 보니까 좀 확실해졌다. 이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맥은 잡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칼 마르크스와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사상은, 그 사람들의 책을 안 읽어봤고,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이 내용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한 사람의 사상을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을까 하는 것과 이 사람들을 통해 베르베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베르베르의 사상은 기발했다. 내가 평소에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베르베르는 다른 시각으로 보고 해석했다. 나의 가치관과는 또다른 눈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창의적이라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로부터 시작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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