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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지음, 이은진 옮김 / 시공사 / 2019년 8월
평점 :
[공감의 배신](폴 블룸/이은진 옮김, 시공사)
-부제: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나는 공감이 힘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서적 공감이 힘들다. 이 책은 정서적 공감을 비판한다. MBTI로 따지자면, 세 번째 알파벳인 T와 F에서 이 책을 쓴 지은이는 T일 것 같다. F 성향 사람들이 가진 정서적 공감을 비판하는 책이라니, 흥미롭지 않은가!
이 책은 공감과 선(도덕)의 연관성을 다룬다. 이 부분에서 글쓴이와 내 의견이 살짝 갈린다. 개인적으로 공감이 선(도덕)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더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논지가 전개되는 방향에 동의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정확하게는, 결론적으로는 글쓴이의 의견과 내 의견이 같지만, 그 의견을 개진하는 과정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우리의 도덕적 결정과 행동은 공감의 힘에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다. 둘째, 이것은 종종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든다. 셋째, 우리에게는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21쪽)
글쓴이는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행동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짚어나간다.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다. 공감은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21쪽) 이 내용은 뒤에 또 반복된다. 🏷‘우리는 곤경에 처한 어린아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 아이들이 우리와 비슷하고 우리와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경우에는 특히 더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태도, 언어, 생김새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가장 신경을 쓴다. 앞으로도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을 가장 신경 쓸 것이다.‘(129쪽) 한 마디로, 우리 편만 공감한다는 뜻이다. 우리 편이 아닌 사람은 고통을 겪더라도, 우리 편의 고통에만 예민하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나? 여기서 문제는, 모두의 고통을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데 우리와는 거리가 먼 수많은 사건들 중 어느 시건에 초점을 맞출지는 저널리스트들과 영화제작자들, 소설가들의 직관에 의해 결정된다. 그들은 어떤 사건이 가장 의미가 있고 어떤 사건이 가장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지 직감으로 선택한다. 그 결과, 어떤 것들은 많은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임에도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다.‘(131쪽) 이것은 소수만 선택하는 문제를 낳는다. 🏷‘소수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우리의 감정이 다수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앞날을 계획할 때는 공감이라는 직감에 의존하는 것보다 도덕상의 의무와 예상 결과에 대한 이성적이고 반공감적인 분석을 따르는 것이 낫다.‘(172쪽) 그래서 글쓴이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감에 의존하는 건 잘못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29쪽)고 말한다.
내게,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간주된다. 글쓴이도 다르지 않게 느꼈나 보다. 🏷‘공감에 반대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그렇게 충격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공감을 ‘절대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30쪽) 사랑이든, 선이든, 귀중한 가치로 여긴다. 어떤 공동체든, 분위기가 대체로 그렇다. 그러나 글쓴이는 공감을 도덕의 원천(절대선)으로 받아들이는 시선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처럼 공감만이 도덕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행동을 유도하는 원천은 공감 외에도 많다. 한 사람의 도덕성은 주관적 세계관이나 철학적 세계관에 뿌리 내릴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보편적인 염려 때문에 어떤 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 이는 종종 염려 또는 연민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나는 공감보다는 이런 염려를 도덕 지침으로 삼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39쪽) 글쓴이는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더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보는 관점을(?) 비판하는 것 같다. 이 부분에는 나도동의한다. 글쓴이가 말하는 것처럼, 공감은 옳은 행동을 유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감과 도덕을 같은 것으로 놓고 글쓴이의 생각을 전개해 나간다면, 그건 잘못된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 있어 공감은 도덕(옳고 그름)이 아닌, ‘동조‘ 정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가 본다. 🏷‘우리는 공감의 긍정적 효과를 꼽느라 바빠서 공감의 대가를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부분적인 이유는 자신이 선호하는 대의와 신념이 공감을 통해 강화되었다고 믿는 자연스러운 경향성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대개 친절하고 정당한 행동(성공한 원조, 정당한 전쟁, 적절한 처벌)은 공감에 뿌리를 둔 것으로 생각하고, 쓸모없거나 잔인한 행동(실패한 원조, 부당한 전쟁, 무자비한 처벌)은 다른 데 뿌리를 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69~70쪽) 친절하고 정당한 행동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공감이라고 보지는 않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나는 그 동인을 ‘자신의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간디나 테레사 수녀처럼 훌륭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마저 ‘자기의‘가 있다고 보는 판국에 공감이라니. 글쓴이는 공감에 너무 꽂힌 것 같다.
그러면 글쓴이가 공감 대신 도덕적 행동의 바람직한 요인으로 꼽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이성‘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성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글쓴이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글쓴이는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성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읽어봤을까. 글쓴이는 🏷‘공감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작용하는 문제에 관해서, 공감이 우리가 신경 쓰는 것들만 환히 비추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판단에 관여하는 다른 정신 과정들 또한 편향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72쪽)라고 말한다. 이 ‘다른 정신 과정들‘에 이성은 들어 있지 않는 걸까?
글쓴이의 생각은 이렇다.
🏷인간은 이성에 의지할 때 도덕적으로 가장 올바른 행동과 판단을 할 수 있다.(73쪽)
🏷문제는 추론을 수행하는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툰 추론 실력에 있다.(74쪽)
🏷도덕 지침은 실제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관한 판단을 수반한다. 그런 점에서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라는 사실이 심리학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77쪽)
🏷인센티브 제도는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방법이고, 관습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호소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친절을 유도하는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세 번째 방법은 바로 사람들에게 공감을 독려하는 것이다.(84쪽)
공감의 동기가 도덕적 행동이 아닌 관계 때문임을 생각할 때,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비도덕적 행동을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글쓴이는 공감이 우리를 친절하게 만든다는데, 역시 잘 모르겠다.
🏷공감이 자동적으로 친절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공감을 이미 존재하는 친절과 연결해주어야 한다. 공감은 선량한 사람들을 더 선량하게 만든다. 친절한 사람들은 고통을 좋아하지 않고, 공감은 고통을 눈에 띄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107쪽)
한편, 그럼에도 낮은 공감능력과 폭력성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116쪽). 그럼 높은 공감능력과 친절함에도 상관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불행하게도 사이코패스도 인지적 공감능력은 뛰어나다고 하니, 그럼 이건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닌가? 사이코패스의 폭력성은 낮은 공감능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말이 되니 말이다.
글쓴이에게 궁금한 게 많다.
🏷공감 때문에 발생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우리에게 공감이 주는 유익을 안겨줄 수 있는 다른 힘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141쪽)
공감이 주는 유익을 안겨줄 수 있는 다른 힘은 이성 외에 무엇이 있나?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쓴 걸까?
🏷연민과 친절은 공감과 상관없이 따로 존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공감과 대립한다. 때로 우리는 공감에서 비롯된 감정을 억누를 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190쪽)
연민과 친절이 공감과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예시를 제시했던가? 공감에서 비롯된 감정이 연민이나 친절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공감의 유익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꺼이 타인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공감이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탐욕은 누군가를 때려눕히고 돈을 빼앗고 싶게 만든다. 이때 공감이 우리를 저지한다. 분노는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주먹을 날려서 우리가 받은 모욕을 갚아주고 싶게 만든다. 이때도 공감이 우리를 저지한다.(246쪽)
🏷비인간화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흑인이나 유대인이나 여성에게 주체성, 자결권, 풍부한 감정생활과 같이 결정적인 인간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인식은 무관심과 잔학 행위를 자극하거나 그 핑계가 됨으로써 끔찍한 결과를 불러을 수 있다. 일부에서 공감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공감은 비인간화를 차단하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준다. 그렇다면 이는 공감을 옹호하는 강력한 논거가 될 것이다.(26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는 공감보다 이성의 편을 든다.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사람들이 더 높은 지능과 자제력을 갖추도록 빌어야 한다. 지능과 자제력이야말로 행복하고 성공한 삶, 선하고 도덕적인 삶으로 이끄는 핵심 요소다.(302쪽)
글쓴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빈약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런 주장을 할 거라면 [팩트풀니스]가 더 논리적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