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정치 (양장) - 기독교와 정치에 관한 새로운 비전
짐 월리스 지음, 정성묵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님의 정치](짐 월리스/정성묵 옮김, 청림출판)
-다북다복 11th.
-절판

정치, 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정치적 중립이다. 교사는 특정 정치인을 지지해도 안 되고, 모든 정치적 발언에 제한을 받는다.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는 집단이다. 작년 서이초 사건을 계기로, 교사의 말은 정치적으로 얼마나 무의미한지, 무능력한지 깨닫게 되었다. 서이초 사건 이후에도 교권침해 사건이 연이어 이어지고 있는데, 노동3권 중에 단체행동권, 이제는 가질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려면 또 한 번 피바람이 불어야 할지도 모른다. 교권침해로 사기가 저하된 현 상태에서, 그 피바람을 견딜 교사는 얼마나 될까 싶다. 그럼에도, 일상의 모든 부분이 정치와 연결되어 있는데 교사만 정치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말이다.

이런 특수성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굳이 정치 성향을 이야기한다면 중립에 가깝다. 정책은 왼쪽을 많이 지지하지만, 왼쪽 정치인들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기득권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약자 편에 있는 것 같지만, 이용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들을 속인다는 점에서(약자를 위하는 척 하므로) 오히려 더 역겹게 여겨지기도 한다. 선거에서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치에 환멸이 난다.-아, 여기에서 정치를 가지고 논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른쪽 정치인들이나 왼쪽 정치인들이나 보기 싫기는 매한가지다. 정치적 중립은 무책임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는데, 중립도 하나의 정치적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15년 전 미국의 상황을 다룬다. 하나님은 공화당의 편도, 민주당의 편도 아니라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종교의 본분은 이데올로기나 당파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의 도덕적 잣대로 좌파와 우파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다.(21쪽)

🏷진짜 이슈는 ‘신앙을 정치에 적용하는 일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다.(23쪽)

개신교 내에서의 서로 다른 교리 내용을 통합하려는(?) 시도도 있다. 개인 영성을 중요시하는 분파와 사회 운동을 중요시하는 분파의 (정치적 영성) 통합이랄까.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적 경건과 사회 복음 사이의 어려운 균형점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무조건 예언자적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 (중략)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공적 영역으로 이어가는 것이 예언자적 메시지의 핵심이며, 종교와 정치를 모두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76쪽)
이 ‘예언자적 종교‘에 대해서 계속 언급한다. 정치-사회 변화-에 대해 희망을 가져야 하며, 새로운 ‘바람‘, 즉 가치를 언급해야 한다.-정치인이 바뀔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어디서? 종교 공동체에서. 🏷종교 공동체는 단순히 그 사회의 문화를 반영하는 조직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사회를 모두 새롭게 하려는 역동적인 반문화 공동체다.(35쪽) 🏷오직 사회적 양심을 일깨우는 새로운 영적 부흥만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36쪽)
‘바람‘은 방향, 즉 비전이 중요하다. 🏷비전이 없으면 사회적 관계에서 의미와 목적이 떨어져 나가고, 공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나 인간애가 사라지며, 사회 결속이 느슨해져 개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 챙기게 된다.
(중략)
비전에서 가치가 나온다.(57쪽)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 오로지 자기 자신만 챙기는 것. 지금, 여기를 강조해서인지 비전은 구닥다리가 된 것 같다. 지금, 여기를 생각해야 할 부분에서는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비전)를 생각해야 할 부분에서는 현재를 떠올린다. 나도 비전을 언제 떠올렸는지 가물가물하다.

영적 가치는 도덕성 그 이상이지만(그렇게 생각하지만), 도덕성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도덕성조차 없는 신앙인이(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많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우리를 정치적으로 극심하게 분열시킨 주범은 당파 싸움에서 비롯된 선택적인 도덕성이다.‘(390쪽)라고 말하는데, 동의한다. 무조건 자신이 옳고, 자기 당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 상대 당을 까내리는 행태는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다름없다. 미국이 더 심각한 것은, 미국의 정치가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이기에 신앙과 정치를 혼동할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자신의 정치 성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가족 가치.성적 순결.개인적 책임에 대해서는 전통적 혹은 보수적인 반면에 빈곤과 인종차별 같은 이슈에 대해서는 과격하기까지 한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다.(115쪽)

이 책은 미국 대선에서부터 테러, 전쟁, 비폭력 운동, 중동, 빈곤과 부(공정무역, 개발도상국), 인종, 가족 가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어젠다를 다룬다(책에서 ‘어젠다‘라는 표현을 쓰니 나도 한 번 써본다.). 결국 공익을 이뤄내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 그리고 이 둘을 분리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34~35쪽)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실천하는 🏷‘사회 정의를 위한 봉사는 영적 빈곤을 극복하는 열쇠다.‘(309쪽)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데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똑같은 사회 봉사를 하지는 않지만, 같은 가치 아래에서 활동하는 봉사는 서로 존중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 가치를 우위에 두는 글쓴이는, 동성애자 축복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정확한 쪽수는 기억나지 않는데, 동성애자를 환대하는 교회를 비난하지 말아야 하고, 동성애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회라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가(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부분에 있어 계속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무조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니 논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글쓴이의 의견대로라면, 감리교 목사님 출교 사건은, 동성애자를 축복해도 괜찮은 교단에서 이루어졌다면 상관 없었을 일인데, 그렇다고 동성애 옹호론자들이 감리교에 손가락질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언제나 보수적인(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에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이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이것도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명이나 인권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신앙 가치에는 맞지 않는 걸 어떡하나. 신앙 가치에 맞지 않는 죄를 버젓이 범하면서 징계는 없는 현 교회에, 동성애만 가지고 들불같이 달려드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그럼에도 교회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지금, 동성애 허용이 마지노선일 것 같고.

자, 그럼 투표를 어떻게 해야 하나? 🏷완벽과는 거리가 먼 후보자들 중에서 (그나마 덜 나쁜 후보자를) 선택하는 것은 도덕적 타협인가 아니면 점진적 변화를 기대한 윤리적 결정인가?(122쪽)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차악이니까 뽑는다는 말이 이 질문 내용과 같은데.. 글쓴이는 우리에게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내가 이해한 글쓴이의 결론이다.
🏷공익을 보호하려면 개인들과 가족들 사이의 결속, 즉 공동체 의식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런 결속을 유지하는 일에서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새로운 정치적 합의가 싹틀 수 있다.(434쪽)

의문. 글쓴이는 민주주의를 영적 가치(?)로 보고 있다. 영적 가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선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시민이 주인‘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신정합일이 아닌 이상 최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민주주의인 걸까. 그렇다면, 이미 잘못된 가치가 최선인 상태에서, 영적 가치를 정치 가치에 녹여 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인간이 사는 사회가 완벽하지 않으니 이상적인 사회는 천국에서나 만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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