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기적 홍성사 믿음의 글들 253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강영안 감수 / 홍성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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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feat. 독서모임 후기)

1. 생색
이번주 진짜 힘들었다. 다음주 월요일까지 들어야 할 연수도 있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어려운 책인 데다, 지난주 화요일까지 다른 책에 매달려 있어서([공정하다는 착각]) [기적] 책 읽기를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3~5장 읽는데 진을 뺐다. 독서모임 시작 10분 전에 다 읽었다.

2. 독서모임 중 생각
(1) 기적을 믿는가?
이 책은 기적을 믿지 않는 고학력자, MBTI 세 번째 알파벳 T, 기독교가 논리적이지 않아 믿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무신론자의 입장에서는 루이스가 답을 정해놓고 논증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성육신, 부활, 승천을 믿는다면,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기적 정도는 쉽게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기적을 믿는가? 믿는다. 내게 기적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2) 기적은 기독교인에게만 일어나는가?
앞서 적었지만, (초자연주의로 일컬을 수 있는) 기적은 (하나님의 섭리임에 틀림없지만) 기독교인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나는 기적이,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병고침과 같은 이슈는 간증거리로 소모되기 쉬운데, 같은 병이 두 기독교인에게 똑같이 발병했다고 했을 때, 한 명은 살고 한 명은 죽는다면, 한 명에게는 기적이 임했고 한 명에게는 기적이 임하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 걸까? 물론, 각 사람에게 정하신 바가 있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기에 두 명 모두에게 정하신 뜻이 있을 거라고 믿지만, 이 기적을 간증거리로 삼을 때 상처 받을 수 있는 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3) 루이스의 기적: 루이스는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의 관점에서 기적을 이끌어 온다. 자연주의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도덕적 판단을 이끌어올 수 없다는 점에서 초자연주의가 옳다는 논리이다. 사실상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14~16장이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앞에서 그렇게 어려운 논리를 펼쳤던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성경의 기적만 다루는 것 같지만, 루이스는 부록에서 ‘특별 섭리‘를 다루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에 대한 생각도 밝힌다.-‘‘섭리‘와 자연 원인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사건은 다 그 둘 모두에 의해 결정됩니다. 왜냐하면 그 둘은 실상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4) 나에게 기적은?
‘나는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네.‘라고 답할 수 있다. 기도의 응답이 있었고, 방언을 체험한 적도 있다. 이런 영적 체험 외에도, 지금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이런 것들도 기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내게 가장 큰 기적은, 아이가 태어난 것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작은 생명체가 나를 통해 나온 거지? 아이와 처음 마주한 순간은 경이로웠다(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먼저, 기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다른 행위들과 동떨어진 행위가 아닙니다. 실상 기적은 하나님이 평상시에 너무 크게 하고 계신 일, 그래서 사람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는 일을, 바로 가까이에서 아주 작게 그래서 또렷하게 보이도록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들으면 의심부터 하고 보지만, 이 구절을 읽으니 그렇게까지 의심할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다.
(5) 학문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노력
개인적으로, 학문(과학, 인문학, 심리학 등)이 교회에 들어와서 활개치는 것을 잘 용납하지 못한다. 교회를 옮긴 이유 중 하나인데, 그때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왜 (교회에서 성경이 아닌) 학문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왜 교회는, 믿는 자(믿는 자를 모두 믿는 자로 보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가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걸까?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상담 공부도 영향을 주었다. 상담을 하면서 던지는 질문과, 말씀을 읽으면서 던지는 질문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하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과학으로, 인문학으로, (루이스처럼) 논리로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한가? 독서모임 때 잠깐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독서모임이 끝난 지금도) 여전히 회의적이다. 다른 학문을 배척하겠다는 말은 아니다.-공부는 내 기쁨이다. 다만, 그 노력은 미완성이라, 언제나 잘못된 주장을 할 수 있어서, 학문으로 설명하기 싫은 것뿐이다. 그렇게 따지면 성경 해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성경에서도, 바울이 열심히 논리로 설명한 도시에서는 믿는 자가 적었다고 적고 있다. 없지는 않았으니 노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또다른 이유는, 학문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일반계시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확신은 깊어질지 모르나 믿음이 자라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서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이 학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베드로전서 2장 2절 하반절은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이다.
아이가 자라서 머리가 트이게 되면, 이 생각에 변화가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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