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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ㅣ 세 여자 1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역사란, 내게 예체능만큼이나 어려운 과목중 하나였다. 연도를 외우고, 사건의 순서를 외우고, 사람 이름을 외우고... 도무지 관심이 안가는 세상사를 외우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고, 미친듯이 외워도 시험만 끝나면 백지가 되었다(지금은 사정이 더 나아진 것 같다. 설민석도 있고, 무도도 있고, 그리고 다양한 영화와 소설로 역사속 일들을 배울 수 있으니까).
조선희 작가님의 '세 여자'를 읽으면서, 국사와 세계사 시간에 그 재미없는 교과서와 씨름하지 않고,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나는 역사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좀 진부하지만.. 진짜 그랬다.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라는 세 공산주의자 신여성의 이야기는 너무나 재미있었다. 사이사이 나오는 익숙한 이름들 - 박헌영, 여운형, 김구 등등.. -이 하찮게(?) 느껴질만큼 세 여성의 인생사와 활약상이 크게 다가왔다. 역사속에 이런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왜 나는 모르고 있었나.(부끄럽게도 이 시대에는 나혜석만이 유일한 여성운동가였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ㅠㅠ)
세 여성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허정숙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변호사인 허헌의 딸로 태어난 것이 아마도 그녀의 첫번째이자 가장 큰 행운이었을테고. 작가도 말한다.
"1920년대는 해방된 여자들을 받쳐줄 경제적, 문화적 토대가 없던 시대였다. 신여성은 너무 일찍 핀 꽃이었다. 성적, 사상적 모험을 즐긴 신여성이라면 혹독한 응징을 당하면서 인생의 쓴맛을 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허정숙이라는 신여성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너그러운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보내준 미국 유학을 마다하고 다시 돌아온 것은 대단한 의지였다. "조선 형편이 이런데 태평양 건너에서 셰익스피어 문체가 어떻고 하는 강의가 귀에 들어오겠어요?"라니. 그때야말로 (지금보다 더!) 탈조선만이 답이었을텐데. 그런 의지를 가진 그녀였기에 만주에서 독립군활동을 하고 김일성 휘하에서도 80대까지 살아남았던 것이다(사실 이점은 좀 아쉽지만).
반면 함께 공산주의와 여성운동을 했던 고명자와 주세죽의 1930년대의 삶과 죽음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광복후의 남북한 정치지도자들의 오판으로 나라꼴이 엉망이 된 것만큼이나.. 그래도 엄혹한 시대에 이름이나마 남기고 죽을 수 있었음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허정숙은 고명자와 주세죽이 죽은 뒤 거의 40년을 더 살았다. 세 여자의 운명이 간택하는 여자와 간택당하는 여자의 그것이었을까. 어쨌든 세 여자 중에서 유일하게 허정숙은 자신의 남자를 스스로 캐스팅했고 떄로 비운이 감돌긴 했지만 끝까지 활기찬 인생을 살았다.(저자의 말)
그런데 (저자의 의도인 것도 같지만) 여성의 지위만을 두고 보면 이 엄혹했던 시대와 지금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슬프다. 공산주의를 한다는 남성들에게 같은 공산주의자인 여성들이 밥을 해다 바치는 걸 보면 요새 좌파 마초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고..
차별 없이 평등하자면서 이게 뭐야? 조선공산당이나 공산청년회나 간부 중에 여자가 한 명도 없잖아. 멀쩡히 같이 토론하다가도 밥 먹을 때 되면 여자들한테 밥해오라 그러고 말이야. 상투 틀고 곰방대 빠는 양반들이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지. 공산주의 하자는 젊은 남자들이 그러는 데는 정말 배신감이 느껴진다니까.
신여성에 허정숙이 쓴 권두언은 현재의 여성에게도 유효해 보인다.
1. 우리는 지나간 날의 미지근한 감정을 내여버리고 저열 있고 예민한 감정의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 개성을 살릴 줄 알고 위할 줄 아는 여성이 된다.
1. 완전한 개성을 살리기 위하야 이중 노예를 만드는 우리의 환경에 반역하는 절실한 자각이 있자.
1. 이 절실한 자각 밑에서 우리 여성은 서로서로 처지가 같은 여성들끼리 함께 결합하야 여성의 위력, 인간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이자.
아.. 절실한 자각.. 그리고 예민해져야 하고.. 연대해야 하고..
이거 진짜 지금도 딱 맞는 말인거 같다. 외워야겠다 ㅎㅎ
세 여자에게 중심이 맞춰진 1권에 비해 2권은 격동의 역사에 관한 서술이 많아 1권이 더 재미있긴 했지만 저자가 오랜 세월 공들여 쓴 소설답게 재미와 유익이 모두 있었던 멋진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