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바닥 민심의 바로미터, 인력거꾼
 

자가용을 타고 ‘고고싱’
 


인력거는 1900년대 ‘모던 시대’를 대표하는 ‘최신’ 교통수단이었다. 물론 기차나 전차와 같은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있었지만, ‘혼자’ 뽐내며 탈 수 있는 최신 교통수단은 인력거밖에 없었다. 인력거가 들어온 지 15년이 지난 1911년 조선에서 운행된 인력거는 1,217대였으며, 자동차는 딱 2대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귀한 손님을 초대할 때면 으레 인력거를 보내는 게 예의였고, 초대 받은 손님 역시 이를 반겼다. 인력거는 지금으로 말하면 콜택시에 가까웠는데, ‘개인택시’가 아닌 ‘회사 영업 택시’였다. 그렇지만 이 ‘택시’를 사적으로 소유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돈과 힘으로 무장한 계층이었다. 이들은 인력거 조합의 인력거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거금을 주고 인력거를 구매했고, 출퇴근용이나 자녀의 통학용으로 이용하는 등 ‘자가용’으로 사용했다. 자신의 집에 ‘인력거’가 있고, 그 인력거를 끄는 운전기사인 인력거꾼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관립한성고등여학교에서는 귀중한 여자라도 인력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것을 금하는 규칙이 있는데, 그 학교 문 앞에 흑의(黑衣) 입은 구종이 끄는 인력거 두 채씩 날마다 대령하였다. 그 인력거는 하나는 모 대신의 딸이 타고 하나는 모 대신의 며느리로 정한 여자가 타고 다닌다더라.
― “기솔한 여학교” 〈대한매일신보〉, 1908년 9월 25일.

 
   

 


   
고종이 선포한 일명 ‘교육입국조서’에도 나오지만 근대 교육의 핵심 중 하나는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점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신분에 상하귀천이 없을 수는 없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자가용 통학을 하는 고관대작의 자녀들에게 학교의 규칙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자가용 통학을 했던 이들에게는 ‘합비’라는 검은 옷을 입고 자신을 기다리는 운전기사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부의 상징이었다. 겉으로는 상하귀천이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식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너희들은 절대로 내가 속한 사회로 들어올 수 없다’는 ‘구별 짓기’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민 씨 척족이자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와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을 지냈던 민영기는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일본에서 직접 수입한 고급 인력거를 타고 다녔다.

인력거를 사용하는 계층은 분명 한정되어 있었다. 고관대작들이나 일부 부유층, 일본인들이나 기생 등이었다. 지금의 택시처럼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력거는 전차나 버스, 택시가 대중교통 수단으로 자리 잡기 전 서울의 골목골목을 활보하던 ‘새로운’ 교통수단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조선인들은 일본의 박래품인 인력거를 최신의 교통수단으로 반겼지만, 한편에서는 ‘양복 입고, 구두 신고, 지팡이 짚고, 인력거나 타고 다니면 개화한 사람이냐’며 비아냥거렸고, 그렇게 패션으로서의 문명개화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얼개화꾼’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인력거가 교통수단으로 등장하자 인력거에 대한 법적 제도도 확립되었다. 인력거는 기계가 아닌 인간의 두 다리에 의지해 동력을 얻었지만 엄연한 교통수단이었고, 가끔씩 ‘교통사고’도 발생했다. 인력거 삯 때문에 인력거꾼과 승객 사이에 시비가 붙는 일도 끊이지 않았다. 참고로 1908년도 인력거 삯은 4킬로미터에 40전이었다. 1908년 8월 총 28조로 규정된 ‘인력거 영업 단속 규칙’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에는 인력거 회사 영업 규칙 및 인력거 운행 규칙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교통 법규’인 셈이다. 이제 몇 가지 규정을 보기로 하자. 
   

 

   
 

제3조. 18세 이상과 60세 이하 신체 건강한 남자로 한함.
제10조 1항. 인력거꾼은 정결치 못하거나 아름답지 못한 의복은 입지 못함.
제10조 4항. 탈 사람이 청구할 때에 정당한 까닭 없이 거절함이 불가함.
제10조 12항. 한 사람 타는 인력거에 두 사람을 태우던지 두 사람 타는 인력거에 세 사람을 태움이 불가함. 다만 열두 살 못된 아이는 불관함.
제12조. 거리 모퉁이에서 오른편으로 꺾어 돌아가고자 하는 때는 길게 돌아감이 가함.
제15조. 경찰관서는 매년에 두 번씩(4월과 10월) 거체(인력거)와 부속품과 복장을 검사함. 그 검사를 받지 아니한 자는 영업에 사용치 못함.
제17조. 회사는 인력거 타는 삭전 정한 표를 지어서 철도 정거장과 인력거 주거장과 그 외에 필요한 처소에 개방하여 광고함이 가함.
― “인력거 영업 단속 규칙”, 〈대한매일신보〉, 1908년 8월 20일∼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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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 2010-10-06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 관련된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생각했던거 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사실들에 놀라곤 합니다.

비로그인 2011-04-0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당시에 먹을 것도 넉넉치 못했을텐데 60세 가까운 사람이 끌면 미안해서 어찌 탔을지. 요즘은 인력거 끌 수 있는 4-50대도 많지 않을 것 같네요.
 

 

3. 바닥 민심의 바로미터, 인력거꾼
 

당신에게 ‘백만 원’이 생긴다면?


당신에게 만약 백만 원이 생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누구에게는 한 달 월급이며, 누구에게는 가까운 외국을 여행할 수 있는 여행 자금이자, 누구에게는 하룻밤에 탕진할 만한 유흥비이고, 누구에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금액일 수 있는 ‘백만 원’. 아무리 ‘백만 원’의 가치가 떨어진 오늘날이래도 백만 원이 생긴다면 어떻게 써야 할지 머뭇거리게 된다. 최신식 노트북? 아니면 동남아 여행? 우리는 어떻게 돈을 쓸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돈을 벌고, 절약하고, 모을까에 집착하기 일쑤다.

1933년 6월 〈별건곤〉에서 설문 조사를 시행했다. 제목은 “백만 원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쓸까?―백만 원 모르는 그들”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았을까. 나처럼 쉽게 답을 하지 못했을까. 그렇다. 그들도 백만 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인들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은 백만 원이란 돈이 어정쩡한 액수여서가 아니었다. 1930년대 백만 원은 지금 우리가 아는 백만 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백만 원이면 지금 돈으로 약 ‘백억’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요즘이야 하도 ‘억, 억’ 하니 그래도 들어는 보았을 돈이지만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백만 원(백억)’이란 돈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액수였다. 그러니 기사 제목도 ‘백만 원 모르는 그들’이라고 했지 않았겠는가.

  

 

기자의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었을까.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돈, 상상만이라도 해보라는 뜻에서였을까. 하필이면 당시 최하층민이었던 ‘인력거꾼’ ‘이 서방’에게도 같은 질문이 던져진다. 기자의 질문에 이 서방은 어이가 없었다. 이 서방은 기자가 분명 미친놈이거나 정신병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자가, 진짜 돈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만약 있다면 어디에 쓸 거냐고 자꾸 채근하자 그때서야 이 서방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과연 인력거꾼 이 서방은 백만 원을 어디에 쓸 것인가.

기상천외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 서방은 백만 원이 생기면 경성에 있는 자동차를 모두 사들인 다음 그 자동차를 부숴버리겠다고 말했다. 자동차를 죄다 사겠다는 것이야 이해를 할 만하지만, 그것을 산 뒤 모두 부숴버리겠다는 인력거꾼 이 서방의 대답에 기자는 당혹스러웠다. 인력거꾼 이 서방은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당시 백만 원이면 팔자를 수십 번 고치고도 남을 만한 돈인데, 하필이면 이 서방은 왜 그렇게 대답을 해야만 했을까?

 


‘우리’에겐 인력거가 있다!

 

교통 기관의 발달은 곧 그 나라의 경제적 수준을 알 수 있는 지표다. 고속도로가 깔리고 KTX, 신칸센, 테제베 같은 고속철도가 놓인 나라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않은 나라는 드물다. 철도와 자동차와 같은 교통 기관의 발달은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근대의 발명품이자 근대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조선보다 몇십 년 앞서 서구식 근대화를 받아들였던 일본은 서구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야말로 근대화의 핵심이라고 여겼다. 서구에서 발명한 철도와 군함, 전등과 같은 신문물을 들여와 이를 바탕으로 기술력을 키워나간 일본은 또한 벽돌 거리를 조성하는 등 도시의 도로망을 정비해가면서 서구 따라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일본의 서구 문명에 대한 콤플렉스는 깊어만 갔다.

일본은 자국을 서구와 같은 문명개화한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변화의 원동력은 모두 서구에서 수입한 선진 기술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서구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 스스로 개발한 ‘근대 최대의 발명품’이 생겨났다. 바로 인력거였다. 인력거는 일본 메이지 시대(1868∼1912)에 등장한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일본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일본의 자랑거리였다.

 

 

메이지 초기만 해도 아직까지 교통망과 통신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일본은 도로를 정비하고 주택을 개량하는 등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편리한’ 도시 정비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프랑스의 파리나 영국의 런던과 같은 도시를 그들도 건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도시 정비 사업을 시행했지만 그 속도가 아주 빠르지는 않아 여전히 좁은 골목들이 많았다. 일본 사람들은 이 좁은 길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으며,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인력거를 개발한 것에 엄청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1870년부터 상용화하기 시작한 인력거의 종류는 다양했다. 일인승과 이인승이 있었으며, 바퀴에 따라 두 바퀴 인력거, 세 바퀴 인력거, 네 바퀴 인력거가 있었다. 인력거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부의 상징이었다. 부자들은 금가루와 은가루 및 칠기로 화려하게 장식한 인력거를 주문 제작했는데, 이는 인력거의 ‘위용’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인력거는 일본 내에서만 사용된 교통수단은 아니었다. 1885년 일본인 최대의 발명품인 인력거는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유럽 지역에 근대의 후발 주자이자, 한때 ‘야만인’으로 불렸던 일본인이 만든 교통수단이 수출된 것이다. 이후 인력거는 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지에도 수출되었으며, 일본인이 만들어낸 이 발명품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인력거가 등장하자 ‘차부(車夫)’, 즉 인력거꾼이 생겼다. 일본의 발명품인 인력거는 조선에도 수출되었고, 대한제국 정부의 고위 관료나 부자들이 이용했다. 1890년대 조선 사람들은 인력거를 개화된 세상을 상징하는 ‘모던’한 교통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인력거가 조선에 처음 유입되었을 때 조선인들은 이를 사람의 힘으로 끈다고 해서 완차(腕車) 또는 만차(挽車)라고 불렀다. 1894년 일본인 하나야마(花山帳場)가 영락정(永樂町)에 인력거 회사를 차리고 영업을 시작했는데, 운행된 인력거는 10대였으며 인력거꾼은 일본인이었다.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일본의 발명품을 반겼다. 그들은 ‘구시대’의 유물인 가마를 버리고 인력거를 선택했다.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인력거를 애용했고, ‘개화풍’을 맞은 사람들이라면 으레 인력거를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선택했다. 인력거의 수요가 증가하자 조선에서도 마침내 자체적으로 인력거를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7년 ‘동창사’라는 회사에서 일본의 인력거에 맞서 ‘조선 인력거’를 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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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 2010-10-04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에게 백만원이 생긴다면?
일단 지갑말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있는척좀 해야겠다^^

이승원 2010-10-1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있는 척 좀 하다가, 잃어버리는 수가^^*

비로그인 2011-04-0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게 백억이 있다면' 이라는 질문에 쓴미소를 띄우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그 이상의 돈을 가지고 우리와 똑같이 근심,걱정을 하며 산다.

이가연 2015-08-11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tvn 젠틀맨리그팀 이가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인력거 사진을 찾는 중에 선생님 블로그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인력거 사진을 방송자료화면으로 1~2초 정도 노출을 시키려고합니다
자료사진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가연 010-9111-0786 으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락기다리겠습니다!
 

 

2. 소리의 네트워커, 전화교환수
 

이제는 수화기를 내려놓을 시간

 

식민지 시기 여자 전화교환수는 사람들의 관계를 매개해주는 소리의 네트워커였다. 그네들이 했던 일은 통신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영역이었지만, 대부분 여성이라는 이유로, 서비스직에 몸담고 있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홀대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화교환수는 근대 문명의 ‘진보’와 함께 과학이 발전하면서 생긴 신종 직업이었다. 전화교환수는 어떤 면에서는 ‘문명’의 혜택을 받은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진보하는 문명과 과학은 전화교환수를 ‘퇴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1935년에 이르면 공전식 전화교환기 대신 ‘자동식 전화교환기’가 등장한다. 이제 전화교환수가 일일이 전화선을 연결시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1935년 10월 1일 경성중앙전화국에 근무하던 전화교환수 100명이 퇴직했다. 신문에는 퇴직이라고 나왔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정리 해고된 것이다.  

 


 

  식민지 시기의 ‘언론’은 전화교환수의 힘겨운 노동 환경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노동 환경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의견은 내놓지 않았다. 이는 식민지 시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고,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10월 5일 새로운 종합 일간지가 창간되었다. 시기에 걸맞게 그 이름도 〈자유신문〉이었다. 


  “먼저 찾을 것은 ‘우리말’―일상생활에서 일본어를 말살하라”. 1945년 10월 23일자 〈자유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오랫동안 일제의 ‘강압’에 의해 ‘우리말’을 빼앗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말이야말로 민족정신의 요체라고 믿어왔던 지식인들이었기에 빼앗긴 ‘우리말’에 대한 사랑은 더더욱 깊었을 것이다. ‘우리말’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상생활에서 일본어를 ‘말살’하는 것이었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전화교환수의 ‘말’이었다. ‘모시모시, 하이, 난방’이 문제였던 셈이다. 매일 접하는 전화교환수의 일본어야말로 가장 먼저 말살하고 척결해야 할 식민지의 잔재였던 것이다. 틀린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 전화교환수의 ‘빼앗긴 청춘’도 다시 ‘찾아주자’고 말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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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 2010-09-29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우 흥미로운 주제네여^^
관심있게 볼께여~~

두릿두릿 2010-09-30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리의 네트워커, 전화교환수! ^^

이승원 2010-09-30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관심 부탁드립니다^^*

비로그인 2010-10-02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억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이언 2017-04-17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올~ 유익! 유익!
학교 숙제에 도움! 도움!
비 해피~^^

미아네 2017-04-17 21:07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그런 듯!

Be Happy 2017-04-17 21:08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나 도 비 해 피
 

 

2. 소리의 네트워커, 전화교환수
 

4척 7촌의 노동 조건, 나는 기계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언론도 여성의 직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과 그 직업에 대한 특집 기사가 종종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1927년 3월호 〈별건곤〉에는 “여자직업안내―돈 없어서 외국 유학 못 가고 취직할 곳 몇이나 되는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다룬 직업은 여자 교원, 여의사, 부인(婦人) 기자, 유치원 보모, 간호사, 아나운서 등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전화교환수를 다뤘다. 


〈동아일보〉는 “돈벌이하는 여자 직업 탐방기”라는 기획기사를 꾸렸는데, 그 첫 번째 직업이 여자 전화교환수였다. 〈동아일보〉는 1928년 2월 25일과 26일자 신문에 여자 교환수에 대한 심층 취재 기사를 실었다. 그 제목 또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기사 제목은 “‘하이 하이, 난방’이 입버릇 된 교환수 아가씨의 설움―앞에는 손님의 야비한 욕설, 뒤에는 교환 감독의 꾸지람, 그러고도 일급은 팔구십 전”.
〈동아일보〉는 8년이 지난 1936년 2월 20일자 신문에서도 여성의 직업에 관한 특집 기사를 실었는데, 여기에서도 전화교환수의 직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기사의 제목은 “얼굴보다 중요한 ‘키’, 산호가지 같은 ‘귀’, 이상야릇한 ‘적성시험’, 전화교환수의 자격”이었다.
  

 

 

  


이 기사들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15세에서 20세 이하의 미혼 여성으로 연령 제한이 정해져 있는 여자 교환수의 학력은 여자보통학교 졸업 정도면 됐다. 월급은 20원에서 많게는 50원 정도이니 학력과 나이에 비해 적은 월급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 기자가 중앙전화국 광화문분국의 전화교환수를 어렵사리 설득하여 취재한 여자 전화교환수의 고용 조건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전화교환수는 채용 시험을 보아야 했다. 시험 과목은 국어, 산술, 작문이었다. 여기서 ‘국어’는 당연히 ‘일본어’였다. 이 밖에도 기억력과 동작 예민성 등을 살펴보는 적성시험도 보았으며, 예민한 청각과 ‘어여쁜’ 목소리도 전화교환수가 되기 위한 중요한 자격 조건이었다. 월급은 견습생일 경우 19원 50전이었고, 정식 교환수로 진급하면 24원 정도였다. 근무 시간은 9시 30분에서 4시 30분이었으며, 사흘에 한 번씩 야근이 있고, 다음 날 9시 40분부터 휴식을 취하는 방식이었다. 평균 근무 시간으로 따지면 8시간에서 12시간 사이였다. 편의상 전화교환수의 월급이 24원 정도라고 했지만, 이는 한 달 내내 근무하면 받을 수 있는 총 합계였다. 전화교환수는 월급제가 아니라 일급제였다. 매일매일 돈을 받는 식이었다.
 

 

 


전화교환수의 자격 요건 중에서 재미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신장 제한이었다. 키가 너무 작으면 전화교환수 채용시험을 아예 볼 수가 없었다. 신장 4척 7촌 이상이 기준이었다. 4척 7촌이면 142.4cm이다. 이렇게 기준을 정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전화교환대의 높이 때문이었다.

전화교환수는 규칙상 45분 동안 일하고 15분간 휴식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통화량이 많은 시간에 휴식을 취하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통화량이 가장 많았다. 이 시간대에 여자 전화교환수 한 사람이 상대하는 교객은 210명 정도였다. 이들은 단지 전화회선만 꽂아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화 연결을 바라는 고객을 직접 응대해야만 했으니, 한 시간에 210명 정도에게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모시 모시, 하이, 난방’을 지속적으로 말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가끔을 실수도 하기 마련이었다.


또한 그네들의 일이란 철저하게 단순 반복 노동이었다. 특히 전화교환수의 근무지에는 그들을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전화교환수 감독이었는데, 감독은 남성이었다. 전화교환수 감독은 전화교환수들이 한눈을 팔거나 딴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했다. 눈을 부라리고 있는 감독이 지배하는 조그만 방에 갇혀서 마치 녹음된 레코드에서 나오는 소리마냥 매일 똑같은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래서일까. 매일 매일 ‘모시 모시, 하이 하이, 난방 난방’을 외쳐야 했던 전화교환수들의 애환이 가끔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이야기로 저잣거리에 유통되기도 했다.
 

   
 

김혜숙의 기도
전화교환수이자 기독교를 신실하게 믿는 김혜숙 양은 밤에 잘 때마다 취침 전에 기도를 올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는 하느님입니까? 저는요 혜숙인데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것을 듣고 있던 그 오빠가 
“습관은 할 수 없군!”
―“笑話”, 〈삼천리〉, 1932년 5월.

 
   



어떤 여자 전화교환수는 자신의 직업은 신경을 잃어버린 기계처럼 목소리로만 일하는 이상한 직업이며, 자신은 단순한 기계일 뿐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한 달에 삼십 원 내지 사십 원의 월급! 이것이 그들의 몸을 붙들어 매고 그리고 어여쁜 손가락도 입도 귀도 모두 뺏어버렸다. 아무리 보아도 움직이는 인형이다! 소리 나는 기계다! 인조인형(人造人形)은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였다.
―“여자직업 순례―어느 편이 기계인지 분간키 어려운 동작”, 〈중외일보〉, 1929년 10월 10일.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여자 전화교환수가 ‘모던’한 신여성의 직업임은 분명했다. 신여성이라 불리는 여성들의 직업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 있었고, 그렇지 못한 직업이 있었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여성이 직업을 갖되,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교사’와 같은 직업을 선택해야만 했다.
 

   
 

저는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이 너무도 학대를 하고 냉대를 하는 것이 서러워 못살겠어요! 책보나 끼고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은 의례히 점잖고 훌륭하다 하여 다정하게 신성하게 대접하면서도 우리 같은 ‘벤또’나 끼고 밥벌이 하는 여자는 덮어놓고 푸대접 한답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에요. 심한 사람들은 놀리기까지도 하니 이럴 때에는 그만 가슴이 쓰리며 울고 싶어서 못 견디겠어요. 어쩌면 우리의 사회는 이같이도 이해와 동정이 없고 게다가 점잖지 못한가요?
―광화문분국 전화교환수 이막동, “교환수가 본 세상, 학대와 비애”, 〈동아일보〉, 1924년 1월 1일.

 
   



여자 전화교환수 가운데 가정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1970년대 ‘여공’들이 집안의 경제는 물론 국가 경제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듯이, 여자 전화교환수 역시 그랬다. 자신의 꿈을뒤로 하고 가정을 위해 ‘봉사’하는 그네들에게 세상은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며 그들의 일과 삶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가끔씩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효녀 심청’과 같은 사건이 있었을 때나 그들의 고된 생활을 다독거려주었다. 

 

운명하는 모친을 위하여 단지(斷指)한 철원의 이소완(李小完, 22세) 양은 십오 세 때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에서 한문과 침선 방적을 배웠다. 대정 십일 년 삼월[1922년 3월]에 철원우편국 전화교환수로 일급 칠십 전에 채용되어 십일 간 견습을 하고, 즉시 사무를 담당했다. 이후 육개성상[6년]을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우편국 한 모퉁이 조그마한 방 속에서 추우나 더우나 군소리 한 마디 아니하고 밤중이나 새벽이나 교환대에 매달려 ‘히야까시’[희롱] 군의 시달리는 전화와 술주정꾼의 되채지 못한 성화며 성미 급한 자들의 야단야단과 부랑자들의 함부로 퍼대는 욕설을 들으면서도 조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열심히 근무하는 직업여성이었다. 웬만하면 자기 손으로 월급을 받으니 동무들과 같이 호사도 하련마는 지금까지도 구두를 신지 않고 집석이가 아니면 고무신을 신고 의복은 항상 광목에 흑색을 물들여 입을 뿐이었으며, 다달이 월급을 저축하여 동생들의 학비와 모친의 치료비를 대왔다 한다.
―“전화교환수로 일가를 부양”, 〈중외일보〉, 1927년 11월 9일.

 
   

 

세상은 미담을 원하고 권한다. 그러나 ‘미담’은 미담일 뿐, 그렇다고 이소완의 힘겨운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 대부분 미담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은 힘든 가정에서 태어나 온갖 간난신고를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과 ‘효’를 그 누구보다 앞서서 행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눈에는, 당시 사회의 눈에는 주인공의 ‘충’과 ‘효’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간난신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자’할 수 없는 그 환경과 보이지 않는 ‘억압’에 시선에 자꾸만 눈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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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lulala 2010-09-30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담을 선전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의심스러워지는 밤입니다^^

이승원 2010-09-30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마, 1937년 이후였는데, 중일전쟁 때였습니다. 전쟁에 참전한 '식민지 조선 청년'의 미담이 잡지 마다 실렸고, 당시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를 전파하기도 했지요. 전쟁에 참전하라고, 우리도 1등 국민이 될 수 있다고^^*

비로그인 2011-04-04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세한 사람들은 대중 앞에서면 충과 효를 강조하지만 그런 사람 중에 성공한 사람은 드물답니다. 부모님 속태우는 가출은 기본이요, 나에게 이익이 안되면 충은 무시되지요.
 

 

2. 소리의 네트워커, 전화교환수
 

‘할로 걸’의 ‘하이, 하이, 난방’?



   
 

누구든지 전화를 걸고 “모시모시” 부르면, “하이! 난방” 하는 꾀꼬리같이 고운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바쁠 때 걸어도, 하이 하이
한가한 때 걸어도, 하이 하이
낮에 걸어도, 하이 하이
밤에 걸어도, 하이 하이
욕하며 걸어도, 하이 하이
웃으며 걸어도, 하이 하이
귀한 사람이 걸어도, 하이 하이
천한 사람이 걸어도, 하이 하이
―“여교환수의 생활 이면”, <동아일보>, 1924년 6월 13일자.

 
   



‘여자 전화교환수’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모시모시, 하이, 하이, 난방(여보세요, 네, 네, 몇 번이십니까)”를 외치기 시작한 것은 조선에 전화가 도입된 이후 한참이 지나서였다. 전화가 도입되던 초기에는 상투를 틀고 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전화교환수로 근무했다. 설마 그들이 꾀꼬리 같은 하이톤의 목소리로 ‘하이, 하이’를 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화를 발명한 유럽의 전화 회사들도 초기에는 남성을 전화교환수로 고용했다. 하지만 남자 전화교환수들의 불성실한 업무 태도와 비속하고 거친 말투 때문에 종종 고객과의 마찰이 일어나자 전화교환수 자리는 여성으로 대체되었다.

 

 

19세기 후반 들어 전화를 도입한 조선의 통신 환경도 마찬가지였다. 초창기 전화교환수는 모두 남성이었다. 물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아직은 요원했던 사회·문화적 환경도 여자 전화교환수의 등장을 늦추는 계기가 됐다. 1920년대에 들어 전화기의 보급이 증가하자 여자 전화교환수가 등장했으며, 여성들 사이에서 전화교환수는 새로운 직업으로 각광받았다. 그렇다고 1920년 전에 여자 전화교환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있기는 했지만 일본인이었다. 1920년 경성우편국에서 드디어 여자 전화교환수를 공식적으로 채용함으로써 식민지 조선 여성의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그 시작은 ‘창대’했다.

 

   
 

경성우편국에서 전화교환수로 조선 여자를 채용한다고 한다. 학식은 보통학교 졸업 정도면 족하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일어이다. (……) 교환수가 되어 실무에 종사하는 조선 여자가 세 사람이 있으니 세 사람이 다 함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인데, 매우 성적이 양호하다. 이제부터는 [여자전화교환수를-필자] 많이 채용할 것이다. 연령은 15∼6세에서 23∼4세가 제일 좋으며, 성적만 좋으면 4개월마다 상당한 승급도 있을 것이며, 기회를 봐서 여자 판임관도 내겠다고 한다. 지금 있는 세 여자 도무지 야근을 싫어하는 듯한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세상 형편을 알지 못하는 가정의 부모들이 어린 여자를 밤중에 내놓은 것을 위태롭게 여겨서 반대하는 듯하다. 경성우편국에서는 야근하는 교환수에게는 통장을 배부하여 가정과 연락을 취하여 우편국에서 가는 시간과 집에 도착하는 시간을 일일이 기입한 후 시간이 조금만 차이가 나도 엄중한 취조를 함으로 아무 염려할 점이 없을 것이다.
―“환영받는 조선인 전화교환수, 젊은 여자의 새 직업”, <동아일보>, 1920년 4월 12일자.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에게 최하급 관료이기는 하지만 잘만 하면 판임관까지 시켜준다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더구나 경성우편국에서는 당시 조선의 ‘전통’을 염려하여 철저하게 귀댁의 자녀를 ‘보호’할 것이니, 가정에서는 아무런 걱정 말고 회사에 보내라는 것이다. 경성우편국의 이러한 정책은 ‘제국의 본국’인 일본의 시스템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일본의 부모들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딸들이 전화교환수로 취직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를 파악한 일본 정부는 여자 전화교환수들의 근무지 환경을 개선하여 철저하게 남성과 차단시킴으로써 오히려 부모들로부터 ‘안전한’ 직장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이후로 일본 가정에서는 전화교환수라는 직업이야말로 여성들에게는 아주 ‘안전한’ 직업이라고 믿게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여자 전화교환수는 전국적으로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중앙전화국과 광화문분국 그리고 용산분국에 근무하는 여자 전화교환수만 400여 명이었다.

 
  

 

‘진상’ 손님의 욕설에 멍든 그녀들

 

어찌 보면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우고 있는 여자 전화교환수라는 직업이 겉으로는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성을 하대하는 풍토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여자 전화교환수라는 직업은 그리 편한 일자리만은 아니었다. 특히 고객으로부터 ‘죽일 년, 살릴 년!’, ‘빠가’ 같은 언어폭력을 당할 때마다 그녀들의 마음은 멍들어갔다.       

 

   
 

나의 불평이야 이루 어찌 말씀을 하겠습니까. 또 말씀을 하면, 보고 들으시는 어른은 꾸지람을 하시게요! 그러나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교환수는 종일 걸터앉아서 “난방! 하이” 하고만 있으니까 편하고 손쉬운 줄 아시겠지만, 참 바빠서 이루 손이 안 갑니다. 좀 늦으면, “이년아! 빠가, 조느냐 자느냐” 별 욕을 다 하시고, 또 공연히 일없이 수화기를 떼고 이야기를 좀 하자는 둥. 그러나 대구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어떤 때는 울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연약한 교환수의 사정을 아시는 어른은 알아주시지만 사정 모르고 꾸지람만 하시는 어른은 한번 실지로 와 보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전화번호 책 첫 장의 주의를 잘 읽어주셨으면 퍽 필요할까 합니다.
―光化門局 金○淑, “各界各級 白紙 한 겹 關係者間의 新年 訴願”, <별건곤>, 1929년 1월.

 
   

 

 

 

 

교환국에를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그렇지 않지만 가보지 못한 사람은 남의 사정도 모르고 교환수가 조금만 늦게 나오던지 늦게 대주면 덮어놓고 죽일 년! 살릴 년! 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게 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교환대 앞에 앉아서 아무리 두 손을 번갯불같이 놀려도 미처 당해내는 수가 없어서 손님에게 욕을 먹고 또 조금만 딴 데를 보면 감독에게 나무람을 듣고 하여 어느 때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을 하고 싶게 억울하고 분한 적도 있답니다.
―“여자직업안내-돈 없어서 외국 유학 못가고 취직할 곳 몇이나 되는가”, <별건곤>, 1927년 3월.

 
   

 

전화교환수들이 하루 종일 입에 달고 사는 말은 ‘난방! 하이’다. 물론 일본말이다. 당시의 전화 가입자들 대부분이 일본인들이었고, 시대가 식민지 시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몇 번이십니까. 네!’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전화교환수들은 남성들의 언어폭력이나 성희롱을 감내해야만 했다. 혹시나 모를 ‘폭력’ 때문에 자신의 이름조차 온전히 밝히지 못했던 전화교환수 ‘김○숙’의 일상은 단지 그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자 전화교환수들은 신여성이니 모던 걸이니 하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호출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소수자이자 약자였다. 특히 뭇 남성들로부터의 성희롱과 맞서 싸우기엔 그들은 아직 어린 ‘소녀’였다. 물론 전화교환수들에게 폭언을 퍼붓는 남성 고객들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는 말한다. 한 전화 가설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화를 매는 것은 급할 때 급한 일에 쓰자고 매는 일인데, 요새 이 교환수들은 어찌 그리 불친절하고 전화를 걸면 곧 대주지도 않고, 어떤 때는 그저 ‘하나시주’[통화중]라고만 하는 것 같으니, 그래서야 전화를 할 수가 어디 있나요. 여보, 교환수 아가씨네! 새해부터는 좀 빨리빨리 나와 주고 제발 딴 곳으로 대어주어서 남의 모양 숭케 말고, 무슨 말을 하거든 생기 있게 좀 하오. 꼭 몇 끼 굶은 사람처럼 죽어가는 소리를 말고요! 화나는 판에 당신네 말소리까지 생기가 없으면 화가 더 나지 않아요? 꼭 좀 주의하시오. 그러한 점을.
―電話架設者 李昌烈, “各界各級 白紙 한 겹 關係者間의 新年 訴願”, <별건곤>, 1929년 1월.

 
   



철저하게 서비스를 받는 고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창렬은 요즘 말로 ‘진상’ 손님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진상’ 손님이 전화 서비스의 모든 책임을 전화교환수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잘 알지 못해서일 것이고, 사회적으로 이 문제가 제대로 공론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전화교환수는 겉으로는 최첨단 미디어 산업에 종사하는 신여성의 직업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용 조건이나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그렇다면 전화교환수들이 고객의 전화를 잘못 연결한다든가, 몇 끼 굶은 사람처럼 목소리에 생기가 없다든가, 전화를 빨리 빨리 연결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불친절’하고 ‘미숙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 조건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사라진 직업의 역사> 추석연휴 연재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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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holic 2010-09-1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상' 손님들의 욕설에 멍든 소리의 네트워커들, 마음이 아픕니다 ㅠㅠ

비로그인 2011-04-0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진상의 후예들이 인터넷에서 악플로 존속하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