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위 넓은 모자를 젖혀 쓰고 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빈 인력거 채를 가슴에 넌지시 걸고 남대문 통을 들어서는 김 군과 같이 오게 되었다. 설왕설래에 대개 안목은 서로 터놓았겠다. “하루 얼마나 수입되오”를 비롯하여 “불평이 없느냐” “괴롭지 않으냐” “아니꼬운 꼴이 많겠지” 등의 말로 시끄럽게 물어보았다. 그는 태평무사의 기분으로 “인력거 끄는 놈이 불평이 왜 없으며 고통이 왜 없겠소. 그저 참지요. 별수 있습니까. 어쨌든 타시는 손님만 많으면 그만이지요.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것 밖에 없어요”라고 한다. 그리고 기자가 앞은 이렇고 뒤는 이렇고 하는 자기네 듣기 좋게 하는 말에 감심(感心)이 되는지 “글쎄요. 그랬으면 여간 좋겠소. 세상에 당신 같은 이가 많기를 바라겠소. 세상에 참 별 양반 많습지요. 실컷 부려먹고도 욕하고 눈 흘기고 그러지요. 그러나 저러나 타기만 하면 그만이에요”라고 또 한 번 타는 사람 많기를 바란다.
―“신년과 제4계급의 감상”, <개벽>, 1925년 1월
|
|
| |
|
 |
얄미운 기자의 말에 순진하게 대답을 한 인력거꾼 김만복 씨의 새해 소망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손님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장사나 영업을 하는 ‘보통 사람들’의 아주 작지만 절실한 소망이었고, 김만복 씨의 새해 소망도 그랬다. 그러나 시대의 분위기는 그의 새해 소망을 ‘배신’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
|
|
| |
전 세계는 자동차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이 덕인지 몰라도 조선에도 웬만한 시골만 가보면 대개 비루먹은 당나귀 같은 낡은 포드차가 몇 대씩은 털털거리고 다니고, 서울만 해도 총 수효가―이것은 절대 비밀이라고 하면서 한 700~800대 되지요 하는 경성부의 말대로―700~800대 되는 모양이다. (……) 1원 택시, 80전 택시가 그야말로 가두로 진출하자 지금의 자동차 타기는 옛날에 인력거 타기보다 (……) 그만큼 민중화한 셈이다. 요즈음 자동차의 삼촌쯤 되는 버스라는 큼직한 친구가 나타나서 경성전기회사의 수입을 나누어 먹고 있다. 왈(曰) 부영 버스, 왈 경인 버스, 왈 경성 유람 버스. 버스 수효만 한 50대 된다든지? 그분 아니라도 도락꾸(트럭)라는 큼직한 친구가 있어 경성 시내에 있는 200여 대의 달구지의 밥그릇을 위협하고 있다.
―“자동차 홍수 시대”, <중앙일보>, 1931년 12월 18일
|
|
| |
|
 |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해야 할까. 동맹 파업이 끝나고 곧 해가 바뀌어 1923년이 됐다. 평양에도 드디어 전차가 개통됐다. 평양의 인력거꾼들은 울상을 지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에 전차가 보급되었고 그럴수록 인력거꾼들의 삶의 터전은 점점 더 사라져갔다. 또한 경성에서는 일본인들이 중국인 마부를 고용하고 마차 30대를 들여와 영업 허가를 받았다. 인력거보다 저렴한 요금을 무기로 쌍두마차가 손님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인력거꾼들은 중국 마차의 영업 허가를 취소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경성을 기준으로 1920년에 91대였던 전차는 1925년에 이르자 123대로 32대나 증가했다. 전차만 증가한 것이 아니라 도심의 주요한 상권마다 전차의 신설 노선이 생겨났다. 5전만 내면 탈 수 있는 전차는 이제 경성 사람들의 발이 되었다. 1920년 6만 1,405명, 1925년 9만 1,636명, 1935년 15만여 명이 하루 동안 전차를 이용했다.
1928년에는 7전짜리 버스가 운행되었으며, 시내 균일 1원짜리 택시도 등장하여 인력거꾼들을 위협했다. 경성 시내 평균 요금이 50전 정도였던 인력거에 비해 택시가 비싸긴 했지만, 택시를 타는 특별한 매력을 인력거는 따라갈 수 없었다. 한때 인력거를 이용했던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도 등을 돌려 자동차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1931년 택시 요금이 시내 균일 80전이 되자 인력거는 점점 퇴물로 전락한다. 1929년 경성의 인구는 39만여 명이었다. 이 중에서 11만 명이 전차를, 1만 명이 버스를 이용했다. 이러한 상황을 인력거꾼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인력거를 자주 이용하는 단골 고객이 있기는 했지만, 기생이나 왕진 가는 의사 정도였다고 한다.
 |
|
|
| |
“자동차 바람에 골탕 먹은 것은 저희들뿐이죠!”
낮잠을 자다 일어난 XX조(組) 인력거부가 긴 한숨을 쉬며 말머리를 내민다.
“그래도 지금 수입이 상당히 있습니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옛 일을 생각하면 한심하죠. 그전에야 어디 우리 세상이었지요. 그런데 그놈의 자동차가 우리를 죽인 셈이죠.”
“손님이 아주 없습니까?”
“그야 아주 없으면 살겠어요! 그저 한탄만 납니다. 자동차! 그놈의 자동차! 흥 그것두 자동차를 한 번 타려면 ‘5원 입쇼, 6원 입쇼’ 하던 철만 해도 우리들이 괜찮았지만 서울에 택시가 생겨서 80전을 내붙이고 난 뒤에는 아주 우리가 망해버렸어요.”
“그럼 요즘은 어떤 사람이 많이 타요?”
“기생이죠! 그렇지만 기생은 요리점 전속 인력거가 있으니까 두루 우리는 술 취한 손님이나 혹시 병자나 태우게 되니까 어디 그리 수입이 많습니까?”
“……”
―“자동차는 우리의 적-패배자의 昔日夢”, 〈조광〉, 1935년. 10월
|
|
| |
|
 |
자동차가 생기고, 버스가 생기고, 전차가 늘어나고, 거기에다 경성의 도로도 새로 정비되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살았던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은 ‘스피드’에 열광했다. 바야흐로 스피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력거를 타고 스피드를 즐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인간의 다리가 가솔린 엔진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한때 최신 교통수단이었던 인력거는 택시, 버스, 전차와 같은 더 진보한 교통수단에 밀렸다. 거기에다 길까지 좋아졌다. 좁은 골목들이 조금씩 사라져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됐다. 길이 좋아지자 자동차나 버스, 전차의 승차감이 따라 좋아졌고 이제 인력거는 그런 승차감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게 됐다. 이제 앞에서 이 서방이 100만원이 생기면 경성 시내의 모든 자동차를 사서 다 부숴버리겠다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28년 버스와 택시가 경성의 거리를 지배해갈 무렵부터 인력거꾼은 줄기 시작한다. 1928년부터 약 5년간 1,000여 명의 인력거꾼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직장을 떠나야만 했다. 인력거꾼을 그만두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33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의 기사 “자동차 등살에 인력거 수난, 세상은 속력을 요구한다”를 보면, 1928년 인력거 수는 총 1,281대였다. 1932년에 이르면 222대로 약 1,000대가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인력거 끄는 일을 그만 두고 이들이 선택한 직업은 대부분 남의 집 행랑살이나 날품팔이였으며, 착실하게 돈을 좀 모은 인력거꾼들은 군고구마 장사로 생계를 꾸려갔다.
인력거와 인력거꾼의 전성시대는 자동차의 전성시대에 밀려 시대의 낙오자로 시대 뒤편으로 점점 사라져갔다. 인력거꾼의 힘찬 두 다리에 의지해서 도시화된 경성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인력거꾼의 힘찬 두 다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네 바퀴 탈것이 경성을 지배해갔다.
 |
|
|
| |
고급차가 줄을 지어 흘러 다니는 서울 거리 한복판에 ‘세기의 유물’인 인력거가 건재. (……) 타는 손님은 예전 같으면 의례히 ‘기생’ 아가씨들이건만 요즘 등장한 밤거리의 ‘인력거’ 기다리는 손님은 오직 ‘놈팡이’들. 그리고 가는 곳은 ‘인육시장’. 이래서 이 ‘세기의 유물’은 밤거리 ‘홍등가’의 총아인 양 재롱을 부리고 그대로 ‘윤락’과 ‘사회악’의 상징. 혼탁한 이 사회의 갖은 추악과 더불어 세기의 유물 인력거여! 한시바삐 우리들 눈앞에서 사라지사이다!
―“‘前세기의 유물’ 건재-사회악으로 타락한 인력거”, <동아일보>, 1955년 5월 22일
|
|
| |
|
 |
1928년부터 점점 감소하기 시작한 인력거와 인력거꾼들의 생존 본능은 질기고 질겨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그렇지만 7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인력거와 인력거꾼에 대한 평판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인력거꾼은 마치 홍등가의 ‘삐끼’처럼 취급받았고,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당해야 할 존재로 비춰졌다. 인력거와 인력거꾼이 사라진다고 홍등가가 문을 닫을 리 없었다. 홍등가를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는 ‘보이지 않은 손’은 따로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애꿎은 인력거꾼, 힘없는 인력거꾼만 지탄을 받았다. 마침내 1969년 인력거는 택시에 밀려 더 이상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진정 ‘세기의 유물’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