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바닥 민심의 바로미터, 인력거꾼
 

가난을 대물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배워야 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엄연히 사회적으로 귀천은 존재했고, 가난에 죄가 없다지만 곤궁함은 ‘죄’가 되기 일쑤였다. 인력거꾼은 사회적으로 천대 받는 직업이었고, 가난한 부류였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인력거꾼들도 자신의 천한 직업을, 가난을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 첫째가 바로 ‘공부’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은 바로 이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24년 인력거꾼 3,000여 명이 뜻을 같이했다. 김만수를 중심으로 ‘경성차부협회’를 조직한 것이다. 회원으로 가입한 인력거꾼들은 매달 20전씩 돈을 모았다. 그들에게는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고 싶었다. 
 

   
 

비록 인력거를 끌어도 배워야 하고 알아야겠다. 하물며 우리들의 자손에랴! (……) 직업에 귀천이 있으랴마는 남달리 사람이 사람을 끄는 차부(車夫). 그들의 땀방울에는 자제는 가르쳐야겠다는 굳은 결심의 눈물이 섞인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있으랴!”, 〈동아일보〉, 1932년 3월 31일

 
   



인력거꾼들은 매달 20전씩 모은 돈으로 학교를 설립했다. ‘대동학원(大東學院)’이었다. 드디어 인력거꾼 자제들의 배움터가 생겼다. 인력거꾼들은 자신들은 비록 천대 받는 직업에 종사하지만, 자신의 자식만큼은 열심히 공부해서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인력거를 끌고 또 끌었다. 
   

 

 


모든 것이 잘돼가는 것 같았다. 학교는 점점 번창해갔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경성차부협회’가 사분오열되었다. 그리하여 매달 45원씩 내는 교사(校舍) 임대료를 지불하지 못하게 되었고, 집주인은 학교의 문을 봉쇄하고 학교의 기물을 전부 차압했다. 학생도 선생도 학부모도 울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었다.

이때 기생들이 움직였다. 인력거를 가장 많이 애용했던 기생들이 인력거꾼들의 사정을 듣고 도움을 준 것이었다. 한성 권번, 조선 권번, 대정 권번, 한남 권번, 대동 권번에 속해 있는 700여 명의 기생들이 합심하여 다섯 차례의 후원 연주회를 열었다. 대성황이었다. 기생들은 연주회 수익과 자신들이 힘겹게 번 돈을 십시일반 모았다. 그 총액이 3,300여 원이나 되었다. 그녀들은 이 돈으로 인력거꾼들이 세운 대동학원을 후원했다. 기생들이 모아 건넨 돈으로 대성학원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꺾일 뻔한 인력거꾼들의 희망도 그 날개를 다시 펼 수 있게 됐다.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는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본 사람들만이 아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던 인력거꾼의 어려움을 알아차리고 따뜻한 손길을 내민 것은 또 다른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웃음을 팔아야 했던 기생들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1-04-0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부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예전의 기생은 의리가 있었는데, 요즘 1%들은 영 ***

대동상고 2016-11-02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의 모교에 이런깊은 사연이 있엇군요 지금은 모두 돌아가셧겟지만 기생누님들깨 감사드립니다..(__)


 

 

3. 바닥 민심의 바로미터, 인력거꾼
 

인력거를 위협하는 삼각 편대


 

1925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누구나 모든 일이 좀 더 잘되기를 기원한다. 신문은 ‘유명한’ 사람들의 새해 ‘덕담’이나 소망을 기사화한다.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도 싣는데, 유명인들의 이야기로만 기사를 채우는 것은 ‘친 서민’ 정책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름의 ‘구색 맞추기’인 셈이다. 1920년대 사회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새해가 밝아오자 기자들은 거리로 나가 ‘서민들’의 이야기를 취재했다. 남대문 밖에서 인력거를 끄는 김만복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의 새해 희망은 이랬다.

 

 

   
 

위 넓은 모자를 젖혀 쓰고 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빈 인력거 채를 가슴에 넌지시 걸고 남대문 통을 들어서는 김 군과 같이 오게 되었다. 설왕설래에 대개 안목은 서로 터놓았겠다. “하루 얼마나 수입되오”를 비롯하여 “불평이 없느냐” “괴롭지 않으냐” “아니꼬운 꼴이 많겠지” 등의 말로 시끄럽게 물어보았다. 그는 태평무사의 기분으로 “인력거 끄는 놈이 불평이 왜 없으며 고통이 왜 없겠소. 그저 참지요. 별수 있습니까. 어쨌든 타시는 손님만 많으면 그만이지요.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것 밖에 없어요”라고 한다. 그리고 기자가 앞은 이렇고 뒤는 이렇고 하는 자기네 듣기 좋게 하는 말에 감심(感心)이 되는지 “글쎄요. 그랬으면 여간 좋겠소. 세상에 당신 같은 이가 많기를 바라겠소. 세상에 참 별 양반 많습지요. 실컷 부려먹고도 욕하고 눈 흘기고 그러지요. 그러나 저러나 타기만 하면 그만이에요”라고 또 한 번 타는 사람 많기를 바란다.
―“신년과 제4계급의 감상”, <개벽>, 1925년 1월

 
   

  
 

얄미운 기자의 말에 순진하게 대답을 한 인력거꾼 김만복 씨의 새해 소망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손님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장사나 영업을 하는 ‘보통 사람들’의 아주 작지만 절실한 소망이었고, 김만복 씨의 새해 소망도 그랬다. 그러나 시대의 분위기는 그의 새해 소망을 ‘배신’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전 세계는 자동차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이 덕인지 몰라도 조선에도 웬만한 시골만 가보면 대개 비루먹은 당나귀 같은 낡은 포드차가 몇 대씩은 털털거리고 다니고, 서울만 해도 총 수효가―이것은 절대 비밀이라고 하면서 한 700~800대 되지요 하는 경성부의 말대로―700~800대 되는 모양이다. (……) 1원 택시, 80전 택시가 그야말로 가두로 진출하자 지금의 자동차 타기는 옛날에 인력거 타기보다 (……) 그만큼 민중화한 셈이다. 요즈음 자동차의 삼촌쯤 되는 버스라는 큼직한 친구가 나타나서 경성전기회사의 수입을 나누어 먹고 있다. 왈(曰) 부영 버스, 왈 경인 버스, 왈 경성 유람 버스. 버스 수효만 한 50대 된다든지? 그분 아니라도 도락꾸(트럭)라는 큼직한 친구가 있어 경성 시내에 있는 200여 대의 달구지의 밥그릇을 위협하고 있다.
―“자동차 홍수 시대”, <중앙일보>, 1931년 12월 18일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해야 할까. 동맹 파업이 끝나고 곧 해가 바뀌어 1923년이 됐다. 평양에도 드디어 전차가 개통됐다. 평양의 인력거꾼들은 울상을 지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에 전차가 보급되었고 그럴수록 인력거꾼들의 삶의 터전은 점점 더 사라져갔다. 또한 경성에서는 일본인들이 중국인 마부를 고용하고 마차 30대를 들여와 영업 허가를 받았다. 인력거보다 저렴한 요금을 무기로 쌍두마차가 손님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인력거꾼들은 중국 마차의 영업 허가를 취소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경성을 기준으로 1920년에 91대였던 전차는 1925년에 이르자 123대로 32대나 증가했다. 전차만 증가한 것이 아니라 도심의 주요한 상권마다 전차의 신설 노선이 생겨났다. 5전만 내면 탈 수 있는 전차는 이제 경성 사람들의 발이 되었다. 1920년 6만 1,405명, 1925년 9만 1,636명, 1935년 15만여 명이 하루 동안 전차를 이용했다.
  

 

 

 


1928년에는 7전짜리 버스가 운행되었으며, 시내 균일 1원짜리 택시도 등장하여 인력거꾼들을 위협했다. 경성 시내 평균 요금이 50전 정도였던 인력거에 비해 택시가 비싸긴 했지만, 택시를 타는 특별한 매력을 인력거는 따라갈 수 없었다. 한때 인력거를 이용했던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도 등을 돌려 자동차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1931년 택시 요금이 시내 균일 80전이 되자 인력거는 점점 퇴물로 전락한다. 1929년 경성의 인구는 39만여 명이었다. 이 중에서 11만 명이 전차를, 1만 명이 버스를 이용했다. 이러한 상황을 인력거꾼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인력거를 자주 이용하는 단골 고객이 있기는 했지만, 기생이나 왕진 가는 의사 정도였다고 한다. 

 

 

   
 

“자동차 바람에 골탕 먹은 것은 저희들뿐이죠!”
낮잠을 자다 일어난 XX조(組) 인력거부가 긴 한숨을 쉬며 말머리를 내민다.
“그래도 지금 수입이 상당히 있습니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옛 일을 생각하면 한심하죠. 그전에야 어디 우리 세상이었지요. 그런데 그놈의 자동차가 우리를 죽인 셈이죠.”
“손님이 아주 없습니까?”
“그야 아주 없으면 살겠어요! 그저 한탄만 납니다. 자동차! 그놈의 자동차! 흥 그것두 자동차를 한 번 타려면 ‘5원 입쇼, 6원 입쇼’ 하던 철만 해도 우리들이 괜찮았지만 서울에 택시가 생겨서 80전을 내붙이고 난 뒤에는 아주 우리가 망해버렸어요.”
“그럼 요즘은 어떤 사람이 많이 타요?”
“기생이죠! 그렇지만 기생은 요리점 전속 인력거가 있으니까 두루 우리는 술 취한 손님이나 혹시 병자나 태우게 되니까 어디 그리 수입이 많습니까?”
“……”
―“자동차는 우리의 적-패배자의 昔日夢”, 〈조광〉, 1935년. 10월

 
   


 


자동차가 생기고, 버스가 생기고, 전차가 늘어나고, 거기에다 경성의 도로도 새로 정비되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살았던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은 ‘스피드’에 열광했다. 바야흐로 스피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력거를 타고 스피드를 즐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인간의 다리가 가솔린 엔진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한때 최신 교통수단이었던 인력거는 택시, 버스, 전차와 같은 더 진보한 교통수단에 밀렸다. 거기에다 길까지 좋아졌다. 좁은 골목들이 조금씩 사라져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됐다. 길이 좋아지자 자동차나 버스, 전차의 승차감이 따라 좋아졌고 이제 인력거는 그런 승차감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게 됐다. 이제 앞에서 이 서방이 100만원이 생기면 경성 시내의 모든 자동차를 사서 다 부숴버리겠다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28년 버스와 택시가 경성의 거리를 지배해갈 무렵부터 인력거꾼은 줄기 시작한다. 1928년부터 약 5년간 1,000여 명의 인력거꾼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직장을 떠나야만 했다. 인력거꾼을 그만두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33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의 기사 “자동차 등살에 인력거 수난, 세상은 속력을 요구한다”를 보면, 1928년 인력거 수는 총 1,281대였다. 1932년에 이르면 222대로 약 1,000대가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인력거 끄는 일을 그만 두고 이들이 선택한 직업은 대부분 남의 집 행랑살이나 날품팔이였으며, 착실하게 돈을 좀 모은 인력거꾼들은 군고구마 장사로 생계를 꾸려갔다.

인력거와 인력거꾼의 전성시대는 자동차의 전성시대에 밀려 시대의 낙오자로 시대 뒤편으로 점점 사라져갔다. 인력거꾼의 힘찬 두 다리에 의지해서 도시화된 경성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인력거꾼의 힘찬 두 다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네 바퀴 탈것이 경성을 지배해갔다. 
 
  

 

   
 

고급차가 줄을 지어 흘러 다니는 서울 거리 한복판에 ‘세기의 유물’인 인력거가 건재. (……) 타는 손님은 예전 같으면 의례히 ‘기생’ 아가씨들이건만 요즘 등장한 밤거리의 ‘인력거’ 기다리는 손님은 오직 ‘놈팡이’들. 그리고 가는 곳은 ‘인육시장’. 이래서 이 ‘세기의 유물’은 밤거리 ‘홍등가’의 총아인 양 재롱을 부리고 그대로 ‘윤락’과 ‘사회악’의 상징. 혼탁한 이 사회의 갖은 추악과 더불어 세기의 유물 인력거여! 한시바삐 우리들 눈앞에서 사라지사이다!
―“‘前세기의 유물’ 건재-사회악으로 타락한 인력거”, <동아일보>, 1955년 5월 22일

 
   

 

 

1928년부터 점점 감소하기 시작한 인력거와 인력거꾼들의 생존 본능은 질기고 질겨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그렇지만 7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인력거와 인력거꾼에 대한 평판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인력거꾼은 마치 홍등가의 ‘삐끼’처럼 취급받았고,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당해야 할 존재로 비춰졌다. 인력거와 인력거꾼이 사라진다고 홍등가가 문을 닫을 리 없었다. 홍등가를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는 ‘보이지 않은 손’은 따로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애꿎은 인력거꾼, 힘없는 인력거꾼만 지탄을 받았다. 마침내 1969년 인력거는 택시에 밀려 더 이상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진정 ‘세기의 유물’로 사라지게 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빙고 2010-10-2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이 서방의 격한 마음이 이해됩니다. 조선판 러다이트 운동 같네요...

둥이 2010-10-22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년 역사의 인력거꾼들의 이야기 잘들었습니다.
'사라진 직업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좋아여^^
아~~난 내직업이 50년은 더 가야 하는데...^^

비로그인 2011-04-05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판 인력거꾼은 대리운전수?
 

 

3. 바닥 민심의 바로미터, 인력거꾼
 

 1922년 11월, 인력거꾼들의 동맹 파업

 


열흘 만에 기똥차게 운이 좋았다가 만 인력거꾼 김 첨지와 그의 동료들의 삶은 가난과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제는 어려웠다. 인력거꾼 김 첨지뿐만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 살고 있는 ‘서민’들의 삶은 대개 궁핍한 것이었다. 이때 마침 식민지 당국은 ‘어려운 서민들을 위한’ 물가 안정책을 내놓았다. 2008년이었던가. 기획재정부가 ‘가격 집중 관리 대상 52개 생필품 리스트’를 작성해서 물가를 잡고, 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겠다고 공언했던 기억이 난다. 식민지 당국의 정책도 바로 그런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경기도 경찰부에서 시내 각 경찰서장을 모아서 의논하였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의논한 결과 각 경찰서장은 각 영업자 조합의 조합장과 교섭하여 여러 가지 물가를 내릴 터이라는데, 제일 먼저 시작할 것은 목욕비와 이발료와 인력거 삯이라는데 (……) 인력거 삯은 이전 삯전보다 대략 십 분의 이 가량 내리게 할 계획인데 이것은 경찰 당국의 의견이라.
―“경찰이 조합 측에 교섭”, 〈동아일보〉, 1922년 11월 5일

 
   

  

물가를 잡겠다고 나선 식민지 당국이 한 일은 가장 하층민의 경제적 터전을 단속하는 일이었다. 물론 인력거 삯에 대한 시시비비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일부 인력거꾼들은 손님들에게 바가지요금을 청구해 승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식민지 당국의 입장에서는 ‘교통비’를 내려 물가를 잡겠다는 것이었지만, 가뜩이나 생계가 어려웠던 인력거꾼들의 원망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20년대가 인력거의 전성시대였으니만큼, 인력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력거 운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취한 이들은 영업주들이었지 인력거꾼들이 아니었다. 인력거 삯을 인하한다는 당국의 결정을 알게 된 인력거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1922년 11월 19일 오전 11시, 수백 명의 인력거꾼들이 집합했다. 당국의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11월 21일 오후 1시 조선인 측 인력거꾼 대표 두 명과 일본인 측 인력거꾼 대표 두 명이 충무로 경찰서에 출두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제출했다. 첫 번째 의견은 당국에서 정한 인력거 삯 인하율이 너무 가혹하니 조금만 인하하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영업주와 인력거꾼의 배분율을 조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영업주와 인력거꾼의 이익 배분율은 일본인 영업주 밑에서 일할 경우 일본인 영업주 대 일본인 인력거꾼은 10대 7, 일본인 영업주 대 조선인 인력거꾼은 10대 6이었다. 조선인 영업주와 조선인 인력거꾼의 이익 배분율은 5대 5였다. 특히 조선인 인력거꾼에 대한 일본인 영업주의 차별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조선과 일본의 인력거꾼 대표들은 이 의견을 경찰서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22년 11월 22일 동이 텄다. 오전 7시 무렵 충무로 낭화좌(浪花座)에 300여 명의 인력거꾼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인력거 삯 인하 반대와 영업주와의 이익 분배 개선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21일 경찰서에 제시한 자신들의 의견이 묵살되자 ‘동맹 파업’을 단행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9시부터 인력거꾼들은 동맹 파업에 돌입했다. 경성의 모든 인력거를 멈춰 ‘패닉 상태’를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오전 9시면 경성의 시민들이 출근할 시간이었는데, 인력거꾼들이 동맹 파업에 돌입하자 경성의 남부 지역 교통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인력거 대신 전차를 타고 출근하기도 했지만, 전차의 운행만으로는 경성 사람들의 교통량을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인력거꾼들은 자신들과 영업주의 이익 분배를 8대 2로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또한 일본인 인력거꾼과 조선인 인력거꾼의 차별 철폐도 주장했다. 동맹 파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력거꾼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인력거꾼 조합’을 결성하고 조합장과 부 조합장을 선출했다.

경찰서에서는 정복 경찰과 사복 경찰을 파견하여 이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만약에 벌어질 수 있는 폭력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당국의 입장에서는 근래 들어 처음 일어난 일인 인력거꾼들의 동맹 파업에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오전 11시 인력거꾼들은 인력거 영업주와 인력거꾼 모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을 선택하여 조합장과 부조합장을 선출하고 40여 명의 평의원도 뽑았다. 오후 1시부터 현안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진행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인력거 영업 제도와 이익 분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한 논의 과정에서 일본의 인력거 영업 제도를 구체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사태가 커지자 당국은 인력거꾼의 이익을 위해 적극 협조하겠다고 발표했다. 내지, 즉 일본의 인력거 영업 제도를 조사해서 식민지 조선에도 반영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국이 인력거꾼의 이익 분배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는 없었다. 영업주들은 인력거꾼들에게 인력거를 끌고 싶으면 끌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만두라는 식으로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상사도 일어났다. 동맹 파업에 참가하지 않고 운행을 했던 인력거를 부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인력거에 타고 있던 손님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경성을 전복할 것 같았던 인력거꾼들의 동맹 파업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력거꾼들은 당국의 ‘호의적’인 태도와 ‘인력거꾼 조합’이 앞으로 벌여나갈 협의를 믿고 자진 해산했으며, 23일 오후, 다시 영업을 시작한다. 하루라도 영업을 하지 못할 경우 자신들에게 닥칠 경제적 곤궁함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동맹 파업이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22년의 경험은 훗날 1924년에 이르러 미약하지만 꽃을 피운다. 1924년, 경성 시내 인력거꾼 600여 명이 모여 자신들의 친선과 이익과 권리를 위해 ‘조선노동친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둥이 2010-10-1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인력거꾼이 되기 위해 도전하는 당신!!!
잘~알 생각 하시구 화이링^^

chatterbox 2010-10-19 0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조선노동친목회! 이름이 참 정겹소.^^

비로그인 2011-04-05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가는 불로소득자, 고소득자에게 세금만 바르게 거둬도 잡히는데....
 

 

3. 바닥 민심의 바로미터, 인력거꾼
 

최신 교통수단을 끄는 최하층 빈민들 



인력거 조합에 소속된 평범한 인력거꾼들의 삶은 고관대작의 인력거를 끄는 인력거꾼의 삶과는 달랐다. 인력거 조합에 소속된 보통 인력거꾼들의 일상은 척박했다. 더욱이 인력거는 매우 비싼 물건이어서 눈독을 들이는 도둑들이 있었고 이따금 인력거를 도둑맞는 일이 생기면 회사의 ‘재산’을 잃어버린 인력거꾼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렇지만 인력거꾼들의 가엾고 비참한 삶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교동 병문 좌편 쪽에 인력거꾼 삼삼오오 대오를 지어 지껄이는 수작 가관일세. 한 작자 하는 말이, 오늘 아침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여편네 속곳 전당 잡히고 팥죽 두 그릇 사다가 조반으로 에워 먹고 나왔다네. 돈도 요사이에는 어찌도 바싹 말랐는지. (중략) 인력거야 하는 소리 전혀 없데. 저녁은 무엇을 먹고 살잔 말인가. 우선 여편네 보기 부끄러워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간들 무엇이라고 말하나.
― “인력거꾼 수작”, 〈서북학회월보〉, 1909년 12월

 
   


 
인력거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한정되어 있었고, 지금의 대중교통 같은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1900년대 인력거꾼들의 삶에는 힘들다고 해서, 또 ‘최저 생계비’에 못 미치는 벌이를 하고 있다고 해서 정부가 지원해주는 보조금도 없었고 그렇다고 회사가 자신들의 ‘이윤’을 줄여가며 고용된 인력거꾼들의 생계에 보탬을 주지도 않았다. 회사는 자신들의 이익을 불리느라 바빴고, 노사 간 ‘상생’이란 말은 그 어떤 사전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인심이 그들의 처지를 위무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근일에 가로 상에서 인력거꾼과 막벌이꾼들이 여름의 곤뇌(困惱, 가난 따위에 시달려 고달픔―인용자)를 이기지 못하여 낮잠을 자다가 순사에게 발로 차이고 뺨도 맞으며 군도 등으로 얻어맞았다. 이에 놀라서 병이 됐다고 칭원(稱冤, 원통함을 이야기 함―인용자)한 자가 있다. 이것은 맞아서 병든 것이 아니라 잠병이 든 것이니 때려서 깨워주는 것은 도리어 고마운 일이라. 독한 약이 입에는 써도 병에는 이로우니 남을 칭원 말고 내 몸을 칭원하시라. 행로인(行路人).
―“투서”,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7일

 
   



 인력거꾼도 노동자고, 막벌이꾼도 노동자다. 이들이 과연 한여름의 무더위 때문에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일까. 1900년대는 ‘개화·계몽’의 시대였다. 인민들의 몸과 마음을 모두 서구식이자 근대적인 표준에 맞춰 ‘개조’하려는 움직임이 대세인 시대였던 것이다. 계몽 지식인들은 조선인들의 가장 큰 ‘병폐’ 중에 하나가 ‘게으름’이라고 생각했다. 게으름의 척결이야말로 쓰러져가는 조선을 ‘문명부강(文明富强)’한 나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계몽 지식인들은 믿었다. 그런 시대였으니 대낮에 한가롭게 낮잠을 자는 최하층 인민들의 모습이 좋게 보였을 리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게으름’도 ‘무지’도 아닌 다른 데 있었다. 힘겨운 일상, 열심히 일해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의 ‘일급’, 그나마도 일거리가 없으면 하는 수 없이 주린 배를 끌어안고 지친 삶의 피난처인 잠 속으로나 빠져들 수밖에. 
 



 
이는 1900년대의 상황만은 아니었다. 인력거의 전성기였던 192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 인력거는 총 4,600여 대였다. 자가용 인력거도 증가했다. 1924년 자가용 인력거는 1,500여 대였다. 경성 시내에서 운행된 영업용 인력거와 자가용 인력거 수는 총 1,997대였다. 가히 인력거의 전성시대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인력거꾼의 삶은 1900년대 초반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개벽〉, 1924년 6월)의 인력거꾼 ‘김 첨지’를 기억하는가. 한 집안의 가장인 김 첨지의 삶은 너무나 비참했다. 열흘 동안 한 푼도 벌지 못한 김 첨지와 그의 아내는 겨우 조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간다. 세  살배기 개똥이는 어미의 젖을 힘껏 빨아보지만 젖이 잘 나올 리 만무하고, 달포가 넘게 콜록거리는 아내에게는 약 한 첩 써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인력거를 끌고 나간 김 첨지는 아침 댓바람부터 저녁까지 30원이라는 거금을 번다. 설렁탕 국물이 먹고 싶다는 아내에게 ‘오라질 년’이라 욕하며 뺨을 갈기고 나오고서도, 막상 돈이 생기니 병석에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과 아내가 그렇게 먹고 싶다던 설렁탕 생각이 났다. 김 첨지는 횡재한 김에 술도 한 잔 걸친다. 얼큰하게 취한 김 첨지는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서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김 첨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은 아내와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고 또 빠는 개똥이 뿐이다. 김 첨지에겐 억세게 ‘운수 좋은 날’이 또한 억세게 ‘운수 옴 붙은 날’이었던 것이다. 현진건은 김 첨지를 통해 1920년대 인력거꾼, 더 넓게는 최하층 빈민의 전형적인 삶을 묘파했던 셈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둥이 2010-10-1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에 역사에 보란듯이 존재하는 이 기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의 역사또한 항상 내가 생각하는 반대로만 가는걸까?
그것이 좌파,우파의 문제인가? 아님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문제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true romance 2010-10-1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운수좋은 날....내가 이렇게 아픈데, 오늘은 나가지 말라고 하던 아내의 모습이 정말 슬펐어요...그런 아내를 두고 인력거를 끌고 나가는 남편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둥이 2010-10-1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마눌님은 오늘 아침에도 빨리 안나가고 뭐하냐며...
우리 아들님은 아빠가 나가는데 토마스만 좋타구 쳐다도 안본다
아~~정말 운수좋은 날이군^^

이승원 2010-10-14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항상 마눌님 잠 깰가봐 몰래 출근하는데요^^*

비로그인 2011-04-05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판 운수 좋은 날: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좋아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자의 제삿날.
 

 

3. 바닥 민심의 바로미터, 인력거꾼
 

사건·사고로 보는 인력거꾼의 일상
 


인력거는 최신 교통수단이면서 문명개화의 상징이자 부와 권력의 척도였지만, 인력거를 끄는 인력거꾼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인력거꾼의 일상은 유난히 시대의 부침(浮沈)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력거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각광을 받기는 했지만,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아니었다. 더욱이 대다수의 인력거꾼은 회사에 고용된 ‘직원’이어서 회사와 수입을 나눠 가져야만 했다. 인력거 삯이 ‘투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인력거 규칙’까지 제정했지만, 투명하지 않은 것은 인력거를 타는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1907년 11월에는 한 일본인이 삯을 달라고 청하는 인력거꾼을 칼로 찌르고 도망친 일이 있었고, 1910년 6월에는 기생을 데리고 청량사로 놀러간 경찰서의 간부들이 인력거꾼에게 차비를 주지 않아 인력거꾼이 경찰청에 하소연하는 일도 있었다. 어디 이뿐인가. 1910년 3월에는 일진회의 ‘한일합방청원운동’을 지원한 ‘국민동지찬성회장’ 이범찬도 인력거를 타고 삯을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인력거꾼이 이범찬의 신발을 인력거 삯으로 가지고 가버렸고 이범찬은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다.

또한 1907년 통감부에서는 단발령을 선포했는데,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부류가 인력거꾼이었다. 통감부는 인력거꾼들에게도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인력거 조합도 통문을 돌려 정책에 따라 단발 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력거꾼들이 단발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통감부에서는 단발하지 않은 인력거꾼들의 영업을 정지시켰다. 또한 저잣거리에서는 조선인 대신 일본인들로 인력거를 대체 운영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이에 인력거꾼들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단발을 하고 말았다.
 



 
1909년 5월, 당시 경시청 부감(副監)이었던 구연수가 저녁 무렵에 인력거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인력거를 몰고 가던 인력거꾼은 옛날 대감 행차 때와 비슷하게 길을 트는 소리를 외쳤는데, 그게 하필이면 일본말이었다. 인력거꾼은 “오이∼, 오이∼(물럿거라∼, 물럿거라∼)” 하며 힘차게 인력거를 끌었다. 이때 만취한 김씨가 갈지자를 그리며 걸어가다가 인력거를 붙들고 인력거꾼에게 호통을 쳤다. 네놈은 도대체 어떤 ‘인종’인데 일본말을 지껄이느냐는 것이었다. 실랑이가 붙었고, 끝내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김씨는 ‘교통 방해자’로 처리되어 경찰서로 끌려갔다.

김씨의 돌발 행동이 경시청 부감이자 훗날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이자 최후로 조선총독부 경무감을 지내게 되는 구연수를 향했던 것인지, 아니면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인력거꾼의 ‘일본말’이 정말로 듣기 싫어서 술김에 나온 행동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인력거꾼을 하대하는 김씨의 태도는 꼴불견이었다.

주인을 잘 만나면 주인의 권세에 빌붙어서 자신이 마치 권력의 핵심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듯, 인력거꾼 중에도 그런 자가 있었다. 회사 소속이 아닌 고관대작의 ‘기사’는 쥐꼬리만도 못한 힘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다음의 기사를 보라. 

 

   
 

일전 밤에 궁내부대신 민병석 씨가 자기 별실을 인력거에 태우고 수표교 등지로 가는데 인력거에 불을 켜지 않았다. 그 장내 순사가 인력거꾼에게 불을 켜라고 권고한즉 그 인력거꾼이 제 상전의 세를 믿고 듣지 않았다. 순사가 길을 막으며 책망을 하자 민궁대가 인력거에서 내려 불문곡직하고 자기 단장(短杖)으로 순사를 때리는 고로 두어 시간을 서로 힐난하였다.
―“야만의 행위”,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5일

 
   



1908년 8월에 제정된 ‘인력거영업단속규칙’ 제10조 9항에 따라 야간에는 인력거에 부착된 제등(提燈)에 불을 켜고 다녀야 한다. 민병석의 인력거꾼은 이 법규를 위반했고, 이에 경찰이 인력거를 세우고 불을 켜라고 권고한 것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장관인 민병석은 법을 어긴 자신의 인력거꾼을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경찰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다. 기사를 보면 법을 어긴 인력거꾼보다 자신의 권력을 믿고 경찰에게 폭력을 가한 ‘무법자’ 민병석의 행동이 더 사회적으로 문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작일 밤에 청년회관회원 임웅재, 장한준 두 사람이 청년회관에서 사무를 보고 작일 상오 한 시에 집으로 가는데 시장하여 승동 어떤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사먹을 즈음에 어떠한 패류 두 명이 민궁대의 청직이라 자칭하며 무고히 집탈하여 장씨를 무수히 난타하고 의관을 찢어버렸다. 순사가 경찰서로 그 사람을 잡아다가 사실을 확인한즉 민궁대의 인력거꾼 박봉헌, 기성원이라더라.
―“인력거꾼 행패”,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5일

 
   



두 기사를 종합해보면, 민병석의 인력거꾼은 주인의 권세를 이용해 ‘공권력’은 물론이거니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짓밟고 다녔던 ‘무법자의 망나니들’이었다. 박봉헌, 기성원 중 한 사람이 바로 순사의 명령을 깔아뭉갰던, 그리하여 순사를 민병석의 지팡이에 무수히 얻어터지게 만들었던 그 인력거꾼이었던 것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둥이 2010-10-11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동차의 종류나 배리량으로 권세를 행하는 지금의 세상과
100년전 세상이 크게 다를바 없다니...
이건 자본주의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그 자체의 문제인가여?
누가 좀 알려줘잉~~

여름 2010-10-13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예나 지금이나 '먹튀'인생은 꼭 있네요.특히 돈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이 더 '먹튀'하려고 드는 행태.. 헐..

이승원 2010-10-1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둥이님, 여름님, 관심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비로그인 2011-04-0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심한 놈들이 시대를 불문하고 권력층에 있네요.

이가연 2015-08-1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tvn 젠틀맨리그팀 이가연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인력거에 대한 사진을 찾던중 블로그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이 사진을 방송 자료화면으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댓글 보시게 되면
꼭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가연: 010-9111-07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