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만에 기똥차게 운이 좋았다가 만 인력거꾼 김 첨지와 그의 동료들의 삶은 가난과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제는 어려웠다. 인력거꾼 김 첨지뿐만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 살고 있는 ‘서민’들의 삶은 대개 궁핍한 것이었다. 이때 마침 식민지 당국은 ‘어려운 서민들을 위한’ 물가 안정책을 내놓았다. 2008년이었던가. 기획재정부가 ‘가격 집중 관리 대상 52개 생필품 리스트’를 작성해서 물가를 잡고, 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겠다고 공언했던 기억이 난다. 식민지 당국의 정책도 바로 그런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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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경찰부에서 시내 각 경찰서장을 모아서 의논하였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의논한 결과 각 경찰서장은 각 영업자 조합의 조합장과 교섭하여 여러 가지 물가를 내릴 터이라는데, 제일 먼저 시작할 것은 목욕비와 이발료와 인력거 삯이라는데 (……) 인력거 삯은 이전 삯전보다 대략 십 분의 이 가량 내리게 할 계획인데 이것은 경찰 당국의 의견이라.
―“경찰이 조합 측에 교섭”, 〈동아일보〉, 1922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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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를 잡겠다고 나선 식민지 당국이 한 일은 가장 하층민의 경제적 터전을 단속하는 일이었다. 물론 인력거 삯에 대한 시시비비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일부 인력거꾼들은 손님들에게 바가지요금을 청구해 승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식민지 당국의 입장에서는 ‘교통비’를 내려 물가를 잡겠다는 것이었지만, 가뜩이나 생계가 어려웠던 인력거꾼들의 원망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20년대가 인력거의 전성시대였으니만큼, 인력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력거 운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취한 이들은 영업주들이었지 인력거꾼들이 아니었다. 인력거 삯을 인하한다는 당국의 결정을 알게 된 인력거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1922년 11월 19일 오전 11시, 수백 명의 인력거꾼들이 집합했다. 당국의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11월 21일 오후 1시 조선인 측 인력거꾼 대표 두 명과 일본인 측 인력거꾼 대표 두 명이 충무로 경찰서에 출두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제출했다. 첫 번째 의견은 당국에서 정한 인력거 삯 인하율이 너무 가혹하니 조금만 인하하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영업주와 인력거꾼의 배분율을 조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영업주와 인력거꾼의 이익 배분율은 일본인 영업주 밑에서 일할 경우 일본인 영업주 대 일본인 인력거꾼은 10대 7, 일본인 영업주 대 조선인 인력거꾼은 10대 6이었다. 조선인 영업주와 조선인 인력거꾼의 이익 배분율은 5대 5였다. 특히 조선인 인력거꾼에 대한 일본인 영업주의 차별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조선과 일본의 인력거꾼 대표들은 이 의견을 경찰서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22년 11월 22일 동이 텄다. 오전 7시 무렵 충무로 낭화좌(浪花座)에 300여 명의 인력거꾼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인력거 삯 인하 반대와 영업주와의 이익 분배 개선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21일 경찰서에 제시한 자신들의 의견이 묵살되자 ‘동맹 파업’을 단행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9시부터 인력거꾼들은 동맹 파업에 돌입했다. 경성의 모든 인력거를 멈춰 ‘패닉 상태’를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오전 9시면 경성의 시민들이 출근할 시간이었는데, 인력거꾼들이 동맹 파업에 돌입하자 경성의 남부 지역 교통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인력거 대신 전차를 타고 출근하기도 했지만, 전차의 운행만으로는 경성 사람들의 교통량을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인력거꾼들은 자신들과 영업주의 이익 분배를 8대 2로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또한 일본인 인력거꾼과 조선인 인력거꾼의 차별 철폐도 주장했다. 동맹 파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력거꾼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인력거꾼 조합’을 결성하고 조합장과 부 조합장을 선출했다.
경찰서에서는 정복 경찰과 사복 경찰을 파견하여 이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만약에 벌어질 수 있는 폭력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당국의 입장에서는 근래 들어 처음 일어난 일인 인력거꾼들의 동맹 파업에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오전 11시 인력거꾼들은 인력거 영업주와 인력거꾼 모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을 선택하여 조합장과 부조합장을 선출하고 40여 명의 평의원도 뽑았다. 오후 1시부터 현안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진행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인력거 영업 제도와 이익 분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한 논의 과정에서 일본의 인력거 영업 제도를 구체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사태가 커지자 당국은 인력거꾼의 이익을 위해 적극 협조하겠다고 발표했다. 내지, 즉 일본의 인력거 영업 제도를 조사해서 식민지 조선에도 반영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국이 인력거꾼의 이익 분배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는 없었다. 영업주들은 인력거꾼들에게 인력거를 끌고 싶으면 끌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만두라는 식으로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상사도 일어났다. 동맹 파업에 참가하지 않고 운행을 했던 인력거를 부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인력거에 타고 있던 손님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경성을 전복할 것 같았던 인력거꾼들의 동맹 파업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력거꾼들은 당국의 ‘호의적’인 태도와 ‘인력거꾼 조합’이 앞으로 벌여나갈 협의를 믿고 자진 해산했으며, 23일 오후, 다시 영업을 시작한다. 하루라도 영업을 하지 못할 경우 자신들에게 닥칠 경제적 곤궁함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동맹 파업이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22년의 경험은 훗날 1924년에 이르러 미약하지만 꽃을 피운다. 1924년, 경성 시내 인력거꾼 600여 명이 모여 자신들의 친선과 이익과 권리를 위해 ‘조선노동친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