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야기의 메신저, 전기수

 

쿠바의 담배 공장, 위험한 책 읽기


 
 
18세기 중반 정조가 소설을 탄압했을 때, 저 멀리 쿠바에서도 조선과 같은 일이 발생했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는 17세기 이래로 질 좋은 시가를 제조하는 나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18세기 중반 쿠바의 시가 제조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시가 제조업자이자 시인이었던 ‘사투르니노 마르티네스’라는 사람은 노동자들의 계몽을 위해 신문을 창간하기로 하고, 정치 연재물뿐만 아니라 과학과 문학에 관한 글들을 신문에 싣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투르니노 마르티네스는 신문을 발간하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신문을 발간했는데 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정작 신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쿠바 노동자들 중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의 비율은 약 1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사투르니노 마르티네스는 다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전기수를 고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구아나바코아 고등학교 교장에게 공장에서 책을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해달라고 부탁했고, 엘 피가로 공장의 사장에게는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줄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1866년 드디어 엘 피가로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줄 전기수가 고용되었다. 책을 읽어주는 대가는 노동자들이 각출하여 지불하였다. 이때 공장에서 자주 읽혔던 책은 역사 개론서인 〈세기의 전쟁〉이나 역사 소설인 〈세계의 왕〉, 그리고 정치와 경제학 입문서 등이었다.   

 

 

1866년 1월에 시작됐던 이러한 책 읽기 방식은 급속도로 쿠바의 노동자들에게 퍼져나갔다. 엘 피가로를 시작으로 해서 곧 다른 공장들도 노동자들에 책을 읽어줄 전기수를 고용하기에 이르렀고, 많은 사람들이 이 방식에 대해서 찬사를 보냈다. 약 4개월이 지난 1866년 5월 식민지 쿠바의 정치 담당 총독은 다음과 같은 칙령을 선포하였다.   

 

   
 

1. 담배 공장, 작업장, 그리고 모든 형태의 일터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책 읽기나 신문 읽기, 혹은 근로자 각자가 종사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토론 등을 빙자하여 이끌어내는 행위를 엄금한다.
2. 경찰은 이 칙령을 집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를 펼칠 것이며,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작업장 소유자나 대표, 관리인은 사태의 위험성에 따라 법으로 엄하게 다스릴 것이다.
―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독서의 역사〉, 정명진 옮김, 세종서적, 2000

 
   

  

노동자들이 전기수를 고용하여 책을 읽는 이러한 움직임을 총독은 ‘체제 전복 행위’로 파악했고 이로 인해 ‘독서 금지령’이 내려진다. 하지만 총독의 이런 엄포 때문에 노동자들이 책 읽기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공공연한 장소에서 책 읽는 행위는 사라졌지만, 오히려 은밀한 독서가 진행되었다. 권력의 안테나가 닿지 않는 곳에서 노동자들은 전기수를 고용하여 책을 계속 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들이 전기수에게 읽어주기를 부탁했던 책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고 한다. 

 

 

 쿠바의 담배 제조장 노동자들에게 전기수가 읽어주는 책은 세상을 보는 통로였다. 노동자들은 전기수의 목소리를 통해 소설을 읽으면서 세상의 부조리함과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깨달아갔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책 읽기는 위험했다. 식민지 쿠바의 총독은 노동자들의 책 읽기가 언젠가는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는 체제를 전복시킬 거대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정조나 식민지 쿠바의 총독 모두 ‘책’ 그 자체를 문제 삼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전기수가 읽어주는 그러한 책들이 체제와 제도를 옹호하는 책이 아니라 체제를 비판하고 경계하고 조롱하는 책이었다는 점이다. 민중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책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조롱하고 경계하는 책, 자신의 억압된 삶을 이야기 속에서나마 탈주할 수 있었던 책을 원했고, 민중들의 이 같은 소망은 언제나 지배자들의 세계관과는 불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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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7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한에서 허용하는 소설책은 어떤 것일까하는 생각이 문득드네요.
 

 

5. 이야기의 메신저, 전기수

 

‘도토리 소설가’라 불리는 꼬마 ‘전기수’
 
 

그가 네 살 때인 1909년 겨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호구지책을 찾아 떠돌아다니던 끝에 황해도 장연군에 정착했다. 어머니는 환갑이 넘은 최 도감의 후처로 들어갔지만, 거의 몸종이나 다름없었다. 최 도감에게는 전처소생의 아들과 딸이 있었고, 그들의 온갖 구박을 견디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집에 있을 때는 그나마 견딜 만했다. 하지만 가끔 어머니가 일 때문에 외출을 할 때면 집에 있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뒷산에 올라 망연히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서럽고 외로운 나날들이었다. 그때마다 소설을 읽었다. 최 도감이 보던 것인지 아니면 전처소생의 아들이 보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집에는 한글로 쓰인 〈춘향전〉이 있었다. 그는〈춘향전〉을 탐독하며 한글을 겨우 깨쳤다. 이때가 여덟 살이었다. 그 뒤 옛 소설 읽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비록 시골이라고는 하나 여차여차한 경로를 통해 〈삼국지〉니 〈옥루몽〉이니 하는 소설들을 접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품과 같이 옛 이야기는 외로운 소녀의 마음을 따스하게 위무해주었다. 책 읽기는 날로 풍성해져갔다. 옛 소설을 열심히 읽던 그는 낭독 솜씨 또한 뛰어났다. 조그만 어린 여자애의 소설 읽는 솜씨가 일품이라는 소문이 마을에 파다했고 동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듣고자 어린 소녀를 찾았다. ‘도토리 소설장이’. 어른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는 매일 밤 이 집 저 집 불려 다니며 고운 목소리로 어른들에게 소설을 읽어줬다. 이야기가 끝나면 인심 좋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에게 과자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옛 소설을 맛깔스럽게 낭독했던 소녀는 커서 정말 소설가가 됐다. 그의 이름은 강경애, 장편 〈인간문제〉와 단편 <소금>을 쓴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소설가였다.   

 

 

동네 어른들에게 옛 소설을 읽어주며 외로움을 떨치고 조금이나마 삶의 기쁨을 찾던 강경애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이나 낭독자는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소설책이나 이야기책을 읽어주었던 사람을 전기수(傳奇叟) 혹은 강독사(講讀師)라 불렀다.

이야기꾼과 전기수 그리고 강독사는 엄밀히 말하면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야기꾼은 일종의 구전된 이야기, 야담 따위나 스스로 창작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나가는 재담(才談)의 달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이야기꾼의 이야기 레퍼토리 안에는 다양한 소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꾼을 문학계에서는 강담사(講談師)라 부른다. 일종의 ‘스토리텔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기수’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이야기책 읽어주는 노인’이라는 뜻인데, 전문적인 직업명은 아니다. 이는 강독사(講讀師)라 부른다. 또한 판소리의 소리 광대를 강창사(講唱師)라고 부른다.

이야기를 풀어나가거나 구연하는 방식에 따라 강담사, 강독사, 강창사로 나뉘기는 하지만 이들의 공통분모는 이야기를 구연, 혹은 연행(演行)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전기수’라고 부르고 있기에 여기서도 강독사라는 낯선 용어 대신에 우리에게 익숙한 전기수라는 명칭을 계속 쓰려 한다.

전기수의 등장은 소설, 혹은 이야기책의 대중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문화적 풍토와도 관계가 깊다. 오늘의 주제는 전기수라는 직업을 통해 옛날의 독서 문화를 살펴보는 것이다.


 

담뱃가게 살인 사건 

 

정조 14년, 1790년 8월의 일이었다. 장흥에 거주하는 신여척(申汝倜)이란 사람이 이웃집 형제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참다못해 발로 차서 죽였다. 어처구니없는 살인 사건이었다. 형조로부터 이 사건을 들은 정조는 느닷없이 담뱃가게 살인 사건을 얘기했다. 

 

   
 

옛날 한 남자가 종로거리 담뱃가게에서 소설책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대목에 이르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침을 뱉더니 담배 써는 칼을 잡아 소설책 읽는 사람[讀史人]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이따금 이처럼 맹랑하게 죽는 일과 우스운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정조실록〉, 정조 14년 8월 10일; 안대회,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한겨레출판사, 2010

 
   

 

정조가 신여척의 살인 사건을 듣고 담뱃가게 살인 사건을 얘기한 것은 살인 사건의 ‘우발성’에 대한 경계 때문은 아니었다. 정조가 말한 사건의 핵심은 담뱃가게에서 소설책을 읽어주던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바로 ‘소설책’이었다.

정조는 ‘호학(好學)’의 군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폭군 연산군에 대비되는 ‘성군’으로 칭송받는 정조는 개혁 군주라는 호평과 함께 조선의 역대 군주 중에서 한국인들이 호의를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통해 국가를 통치하려 했으며, 보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독서광이기도 했다. 그런 정조였지만, 패관잡기의 일부였던 소설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통제를 가했다. 정조는 개혁 군주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감성’을 억압했던 군주이기도 했던 것이다. 정조는 학문을 권장했지만, 그 학문이란 오직 ‘주자학’을 뜻했다. 정조는 주자학의 범주에서 빠져나가려는 학풍에 대해서 철저하게 단속했다. 그가 일으킨 문체반정(文體反正, 1792년) 역시 주자학적 문체에서 벗어난, 즉 제도적 글쓰기의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유로운 글쓰기’에 대한 일종의 탄압이었다.

여기 문체반정의 그물에 걸려 유배를 떠났던 자들 중 유일하게 경화세족이 아닌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이옥(李鈺)의 글을 보자.   

 

   
 

천지만물(天地萬物)은 천지만물의 성(性)이 있고, 천지만물의 상(象)이 있고, 천지만물의 색(色)이 있고, 천지만물의 성(聲)이 있다. 총괄하여 살펴보면 천지만물은 하나의 천지만물이고, 나누어 말하면 천지만물은 각각의 천지만물이다. 바람 부는 숲에 떨어진 꽃은 비 오는 모양처럼 어지럽게 흐트러져 쌓여 있는데, 이를 변별하여 살펴보면 붉은 꽃은 붉고 흰 꽃은 희다. 그리고 균천광악(鈞天廣樂-천상의 음악)이 우레처럼 웅장하게 울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현악(絃樂)은 현악이고 관악(管樂)은 관악이다. 각각 자기의 색을 그 색으로 하고 각각 자기의 음을 그 음으로 한다. (……) 대체로 논하여 보건대 만물이란 만 가지 물건이니 진실로 하나로 할 수 없거니와, 하나의 하늘이라 해도 하루도 서로 같은 하늘이 없고, 하나의 땅이라 해도 한 곳도 서로 같은 땅이 없다. 마치 천만 사람이 각자 천만 가지의 성명을 가졌고, 삼백 일에는 또한 스스로 삼백 가지의 하는 일[事]이 있음과 같다. 오직 그와 같을 뿐이다.
―이옥 지음, ‘일난(一難)’, “이언(俚諺)”, 〈완역 이옥전집 2〉,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엮음, 휴머니스트, 2009

 
   

 

이옥은 세상의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오직 ‘다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옥의 생각이었다. 주자학을 절대적인 ‘진리’이자 보편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 믿었던 정조에게 이옥의 상대적이고 개별적인 사유는 곧 이단의 학풍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암 박지원도 그랬다. 그의 문체, 특히 〈열하일기〉의 문체는 ‘소품체’라는 이유로 정조의 노여움을 샀다. 문체는 작가의 정신이자 혼이자 정체성이다. 정조는 문체를 단속함으로써 지식인들의 뇌수까지 뜻대로 지배하고 길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정조는 서학, 고증학, 소품, 소설을 배척했다. 신여척의 살인 사건을 판결하면서 예로 든 담뱃가게 살인 사건의 핵심은 정조가 그토록 탐탁하지 않아 하던 소설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있음을 문제 삼은 것이다. 어이없는 살인 사건의 주범은 인간이라기보다 그 인간의 감정을 추동하는 ‘소설’이라고 정조는 믿었다. 따라서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고 본능적인 욕망을 뛰놀도록 추동하는 소설의 내용은 주자학을 신봉했던 정조에게는 철저하게 ‘불경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사도세자가 〈금병매〉와 〈육포단〉 같은 애정 소설을 탐독하고 즐겼던 전과(?)가 있어, 정조의 소설에 대한 배척이 더욱 완강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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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nffjr 2010-11-2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토리 소설가! 하핫, 재밌네요 ㅋㅋ

자음과모음 2010-11-29 09:56   좋아요 0 | URL
이야기에 위로받고 또 이야기로 사람들을 위로하던 작은 소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상상되는 별명이에요! ㅎㅎ

이승원 2010-11-30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아이패드가 출시되었는데, 책을 읽어준다고 하더군요ㅠㅠ^^

자음과모음 2010-12-01 11:08   좋아요 0 | URL
아이패드가 책도 읽어주는군요! 재밌는 아이디어네요. 읽는 것과 듣는 것은 전혀 다르니까요-

비로그인 2011-04-07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으로 읽는 책과 귀로 듣는 책에는 차이가 있어요. 읽는 이의 감정이 개입되서 작가의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더군요. 똑같은 책을 여자가 읽을 때와 남자가 읽을 때가 달라요.
 

 

5. 이야기의 메신저, 전기수

 

 

   
 

소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소설이 이를테면 제3자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제시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3자의 운명이, 그 운명을 불태우는 불꽃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따뜻함을 우리들에게 안겨주기 때문이다. 독자가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한기에 떨고 있는 삶을, 그가 읽고 있는 죽음을 통해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인 것이다.
―발터 벤야민, “얘기꾼과 소설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99

 
   

  

책 읽어주는 남자
   


10대 소년과 30대 여인의 사랑은 처음부터 비극이 예정된 소설처럼 출구가 없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2009년)를 보았을 때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10대 소년과 30대 여인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초반부까지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영화는 어린 마이클(랄프 파인즈)의 첫 사랑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고, 전쟁을 겪은 성숙한 여인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치유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영화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첫사랑보다, 홀로코스트와 나치즘 그리고 전범 재판보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마이클과 한나와의 사랑을 매개하는 것이 ‘책을 읽어주는 행위’라는 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녀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어린 소년은 성숙한 여인에게 책을 읽어준다. 마이클은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한나는 어린 소년의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글을 읽을 수 없었던 그녀가 알지 못했던 모든 행복을 ‘책 읽어주는 소년’을 통해 뒤늦게 깨달은 한나.     

 

  

그러나 한나는 자신의 행복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린 마이클이 〈채털리 부인의 여인〉과 〈오디세이〉를 한나에게 읽어주며 은밀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어느 날 한나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이클 곁을 떠난다. 첫사랑이 떠나자 마이클의 책 읽어주기도 끝났다.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던 마이클은 다시는 누군가를 그처럼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다.

8년 후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우연히 한나와 마주친다. 2차 세계대전 전범 재판을 참관하기 위해서 법정에 들어선 마이클은 피고가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한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충격에 휩싸인다. 유태인 강제 수용소의 감시원이었던 한나는 유태인을 학살한 죄가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수감 생활을 시작한다. 마이클은 감옥에 있는 한나를 위해 다시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마이클은 10년 동안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한나에게 보낸다. 마이클의 목소리로 구연된 이야기를 들으며 한나는 평온을 되찾는다.   

 

 

한나는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도 어린 소년들에게 책을 읽혔다. 글을 모르는 한나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한나는 마이클의 목소리로 녹음된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들으며, 그저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로만 보였던 글자를 그제야 깨우치기 시작한다. 마이클이 읽어주는 이야기책의 소리와 소설 원본에 적힌 글자를 비교해가며 알파벳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더(The)’라는 글자를 깨우치기까지 60여 년이 걸린 셈이다. 한나는 글을 깨우치자 마침내 마이클에게 아주 짧은 편지를 보낸다.  

 

   
 

Thanks for the latest, kid.
I really liked it.
꼬마야
지난번 책 좋았어.

 
   

 

중년의 남자가 된 마이클은 아내와 이혼한 상태였고, 백발의 노파가 된 한나를 보면서도 아직까지 마음이 편치 않다. 마이클은 한나에게 이야기책을 녹음하여 보내줄 수는 있지만 한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품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나의 사면이 결정되자 교도관은 마이클에게 전화를 걸어 한나와의 면회를 주선한다. 20년 만에 마이클과 한나는 재회하지만 마이클은 한나의 손길을 조용히 뿌리친다. 한나가 출소하면 살 집과 직장을 마련해놓고 사회 교육 프로그램까지 등록해놓은 마이클이었지만, 아직까지 마음으로부터 그녀를 용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마이클: 책 많이 읽어요?
한나: 누군가 나에게 읽어주는 게 더 좋아. 이젠 그것도 끝이겠지?

 
   

 

마이클은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한나의 눈빛을 외면한다. 한나는 어느새 마이클의 ‘짐’이 되어버린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출소하기 전날 한나는 마이클이 구연한 책들을 책상 위에 쌓아놓고 신발을 벗고 그 위에 올라가 생을 마감한다. 출소하는 날이 다가왔지만 한나는 ‘바깥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의지가 없었다. 감옥에서 유일하게 배운 게 있다면 글을 읽을 줄 알게 된 것인데, 그 능력을 한나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마이클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 소박한 마음을 마이클은 받아주지 않았다. 한나에게 소설 혹은 이야기책은 읽는 게 아니라 듣는 것이었다. 마이클이 녹음하여 들려주던 이야기 테이프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모든 희망의 끈을 놓고 떠나버린다.

한나가 글을 읽을 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낭독’이라는 매개를 통한 교감이 아니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묵독’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위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만이 지닐 수 있는 낭독의 아우라. 마이클이 낭독해주는 이야기가 끝나자 한나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희망 또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닐까. 도대체 이야기란 무엇일까. 소설을, 이야기책을 듣는다는 것은 또한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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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lang 2010-11-28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년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한나의 눈빛이 빛나던 장면들. 슬프도록 아름다웠죠.

자음과모음 2010-11-29 10:12   좋아요 0 | URL
누군가의 목소리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특별해요 정말. 우리 안으로 흘러드는 어떤 매력적인 시공간 속에 우리는 무방비 상태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승원 2010-11-3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the에 동그라미를 치는 장면을 보며, 저는 울컥......

자음과모음 2010-12-01 11:09   좋아요 0 | URL
앗 선생님 감성초식남...

비로그인 2011-04-0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민오기 전 중도실명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녹음일을 10여년 했었지요. 오직 시각장애인만 대출이 되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못해서 안타까웠어요.
 

 

4. 문화계의 이슈메이커, 기생 

 

 

이런 ‘특별한’ 기생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강명화와 강향란의 이야기는 특별한 기생담의 정점에 놓여 있다.

강명화는 현대판 ‘춘향’과도 같았다. ‘천한’ 기생 강명화와 거부의 ‘독자’ 강병천은 사랑하는 사이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가끔 나오는 대기업 후계자와 화류계 여성 사이의 사랑인 셈이었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끝내 동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지킨 강명화와 강병천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강명화는 ‘자유연애’와 ‘연애지상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그의 사랑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권의 소설로 재창조되었으며, 1967년에는 윤정희와 신성일이 주연한 영화 <강명화>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10만여 관객을 모았다. 강명화와 강병천의 정사(情死)로 인해 여러 명의 연인들이 그들의 ‘본을 받아’, 강명화를 따라간다며 정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죽했으면 단재 신채호가 ‘자살귀(鬼) 강명화가 열녀가 되는 문예가 무슨 예술이냐!’고 비판했겠는가. 





 

강명화도 강명화였지만, 단발 미인 혹은 단발랑이라 불렸던 강향란 또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기생이었다. 당시 신문 보도를 통해 그녀의 삶을 따라가보자.    

 

   
 

요새 경성 시내에는 어떤 여학생이 머리를 깎고 남자 양복에 캡 모자를 쓴 후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닌다고 하여 일반 사회에서는 이야기의 꽃이 피게 되었다. (……) 조선에서는 남자와 같이 살아보겠다는 어떤 주의와 이상을 가지고 머리를 깎은 여자는 이 여자가 처음이다.
―“斷髮娘(일): 머리 깎고 남복한 여학생, 그는 한성권번의 강향란”, <동아일보>, 1922년 6월 22일

 
   

 

강향란은 한성 권번의 유명한 기생이었다. 경성 화류계에 출입하는 남자치고 강향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향란은 한 손님에게 이끌린다. 이 남자는 경성에서 유명한 웅변가이자 변호사였다. 사랑은 무르익었고, 두 사람은 장래를 언약한다. 결혼을 결심한 강향란은 기생을 그만두고 배화여학교 보통과 4학년에 입학한다.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하기에 이른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정인이 배신을 한 것이다. 죽기로 결심하고 한강에 뛰어들려던 강향란은 다행히 지나가던 지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강향란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남자야, 네 이름은 악마이리니!’ 강향란은 남자에게 동정을 구하느니 차라리 남자와 똑같이 살겠다며 중국인이 경영하는 이발소에 찾아가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양복을 입었다.  

배화학교에서는 단발한 여학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그녀를 퇴학시켰다. 강향란은 ‘강석자’로 이름을 바꾸고 근우회 활동을 하며 여성운동도 펼쳤다. 여성이 남성의 노리개 취급받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강향란을 비난하는 남성들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을 들먹이며, ‘남자로 모습을 바꾼 강향란을 조속히 매장하라!’고 떠들어댔다. 만신창이가 된 강향란은 조선을 떠나 상하이로 거처를 옮기지만, 희망을 품고 떠났던 상하이의 삶 또한 팍팍했다.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 강향란은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이후 강향란은 영화배우로 변신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강향란, 강명화, 노홍은, 왕수복, 복혜숙 등은 기생이었으며, 이들은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이슈 메이커였다. 이들은 때론 신여성의 상징으로, 때론 항일 독립운동가로, 때론 자선사업가로, 때론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런 기생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현재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기생은 논개, 춘향, 황진이 정도다. 적장과 함께 투신자살한 의기 논개, 정절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 춘향, 송도삼절로 알려진 황진이. 우리는 이들을 통해 기생의 삶을 상상한다. 애국, 정절, 절개. 이 얼마나 남성적 시선으로 점철된 단어들인가. 기생의 삶은 우리의 기대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전통예악의 전수자니, 독립투사니, 노동운동가니, 자선사업가니, 현대판 여배우니 등등, 어떠한 방식으로 불렸든 기생은 ‘신분’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기생은 남성들이 만들어낸 성 문화의 산물이며, 남성들은 기생을 통해 그들의 예술도, 몸도, 영혼도 버젓이 착취했다. 어쩌면 기생들의 화려한 ‘미담’은 왜곡된 남성들의 성 문화를 미화하면서 남성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은폐하고 위장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항일운동, 노동운동, 국채보상운동, 자선사업 등에 힘을 쏟았던 기생들을 격려하고 칭송하는 많은 글들에는 ‘기생도 이렇게 한다!’라는, ‘너희(기생)도 인간이, 국민이 될 수 있다!’라는, ‘천한 기생보다 못한 삶을 살면 안 된다’라는 식의 폭력적인 논리가 깔려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8. 오리엔탈 기생

 

기생에 관심을 둔 것은 조선의 남성들만이 아니었다. 조선으로 여행 온 외국인들은 기생에 대해서 꼭 한마디쯤 하는 등 기생에 관심을 표했다. 실제로 외국인들은 조선의 기생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1903년 러시아 황실 지리학회 탐사대의 일원으로 조선을 방문한 폴란드계 러시아인(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식민지였다)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Waclaw Sieroszewski)는 조선인 통역관에게 부탁하여 기생의 공연을 직접 관람했다. 그는 ‘과연 궁중 연회에 참석한 예기들도 몸을 팔았을까’에 대해서 아주 궁금해했으나 끝내 알아내지 못한 채 러시아로 귀국했다. 훗날 그는 <기생 월선이>(1906)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여행한 수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의 기생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관심 안에는 ‘조선 여자들은 극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들’이라는 식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작동하고 있었다. 조선의 기생은 일본의 게이샤와 더불어 외국인들의 특별한 관심거리였다. 이방인들은 기생들의 가무에 찬탄하면서도 결국 그녀들을 남성 권력의 ‘노예’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기생은 매우 어릴 때부터 다른 한국 여인들이 하지 않는 여러 가지 악기의 연주, 창(唱), 무용, 독서, 낭송, 작문, 취미 활동 같은 기예를 훈련받아 그들의 매력을 성숙시켜 나간다. 그들의 운명은 상류계급 남자들이 유쾌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교육은 필수적인 것이다. (……) 온갖 훈련들, 격리되지 않고 열려 있는 사회적 위치가 그들을 빛나게 하지만 한국의 기생들은 일본의 게이샤와 처지가 다르다. 일본에서는 게이샤가 종종 귀족의 아내가 되며 심지어 총리대신의 정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누구도 기생을 그런 자리로 끌어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인화 옮김, 살림, 1994

 
   

  

대다수의 외국인들은 기생을 돈에 팔려 간 ‘노예’로 보았다. 또한 기생들의 기예 역시 양반으로 대표되는 남성 권력의 오락과 여흥을 위해 교육받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우리의 상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기생, 드라마 속의 명기는 ‘예술가’지만, 외국인들은 그 예술조차 결국 남성들의 즐거움을 위해 계발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남성 권력의 노예이자 예술가로 불렸던 기생과 기생 제도, 그리고 그와 더불어 공창 제도는 1948년 2월 4일부로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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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6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예쁜 조선 여자네요.
 

 

4. 문화계의 이슈메이커, 기생 

 

6. 약한 자여, 너의 이름은 기생일지니  

  

1937년 4월 19일 오전 7시 20분 신의주 초음정 12번지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코로니얼식 권총을 쏜 사람은 김순자였는데, 그녀는 보통학교 선생으로 근무하다가 현재는 은행에서 근무하는 ‘신여성’이었다. 김순자가 쏜 총알에 맞아 거꾸러진 사람은 남편 조흥갑이었다. 아랫배와 다리에 총상을 입은 조흥갑은 도립 의원 응급실로 실려가 치료를 받았으나 오전 8시 결국 생을 달리하고 만다.  

 

 

배울 만큼 배운 김순자는 왜 조흥갑을 죽였으며, 1발도 아닌 3발씩이나 총을 쐈던 것일까. 그녀의 남편은 공공연하게 외도를 했다. 남편과 정분이 난 여자는 기생이었던 최산월이었다. 조흥갑은 한 달 전부터 산월이에게 빠져 있었고, 산월이도 조흥갑을 좋아했다. 김순자는 기생방에서 놀고 있는 남편을 찾아가 집으로 돌아갈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남편은 감히 아녀자가 기방에 왔다며 오히려 김순자를 나무랐다. 김순자는 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기생에게 자신의 남편을 빼앗겼다는 자괴감이 들었고 이대로 자살할까 생각도 해 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김순자는 피가 거꾸로 도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남편을 찾아갔다. 


김순자는 산월이와 남편이 동침하고 있는 현장을 덮쳤다. 그리고 세 발의 총을 쏘았다. 경찰에 체포된 김순자는 자신의 범행을 순순히 자백했다. 김순자는 기생에게 남편을 빼앗기느니 차라니 남편을 죽이고 자신도 남편을 따라 죽을 작정이었다고 검사에게 진술했다. 그것만이 영원히 자신의 남편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김순자가 범행에 사용한 권총은 남편 조흥갑의 것으로, 그는 안동 경찰서 고등계 형사였다. 내연녀였던 기생 최산월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순자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이지만, 최산월의 입장에서는 ‘사랑’한 것일 수도 있다. 기생과 얽힌 치정 사건은 무수하게 많았다. 기생들도 인간이었고, 그들 또한 사랑을 꿈꾸었다. 기생들의 사랑은 대부분 ‘비극’이었다. 기생들이 사랑한 남성들은 유부남인 경우가 많았다. 유부남이 아닌 경우에도 남자 쪽 집안의 반대로 파국을 맞는 경우가 흔했다. 비록 사랑이 파국으로 끝날지언정 남성과 ‘사랑’이라도 나눈 기생이라면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아! 기생! 듣기에도 진저리나는 기생, 무슨 죄가 있어 사람으로 사람에게 학대와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동정이 없고, 의리가 없는 이 세상에서는 약자를 위하여 분투하는 사람은 없고 강한 자를 위하여 추세하고 복종하는 사람들뿐이라. 기생이라는 것이 듣기에도 욕지기가나고 약한 우리를 동정하여 줄 사람이 없겠지요. (……) 기생도 사람입니다. 기생의 가슴에도 뜨거운 정이 있습니다. 평생을 애인이 없이 고독한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평생을 학대와 유린 중에 시들어버려야 하겠습니까. 아! 남성들이시여. 노래 팔고 웃음 팔고 고기 파는 기생이라고 너무 괄시를 하지 마십시오.
―李月香 , “눈물겨운 나의 哀話”, 〈장한〉, 1927년 1월

 
   
  

 

 

   
 

손님은 당신이 하신 것은 생각지도 아니하시고 기생만 죽일 년, 살릴 년 하시고 모주 먹은 돼지 벼르듯 하십니다. (……) 우리네 화류계 여성을 농락하는 모든 남성이 기생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며 더욱 한 번만 친하게 되면 아주 당신네 물건처럼 여기시는 까닭입니다. (……) 장난감 인형과 같이 동물원의 원숭이나 앵무새 같이 미물이나 물건으로 취급하는 까닭에 이런 무리한 요구를 거침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잘못이시지요. 암만 웃음과 노래와 고기를 파는 기생이라 하기로서니 어찌 성명조차 없겠습니까.
―金蘭紅, “기생 생활의 이면(일)”, 〈장한〉, 1927년 1월

 
   

 

예기든 삼패 기생이든 남성들의 입장에서 기생은 남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물건’일 뿐이었다. 화류계를 만든 것도 남성들이었고, 화류계야말로 남성의 전도를 그르치는 ‘악마의 굴’이라고 거세게 비난한 것도 남성들이었다. 기생들은 남성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동정’을 원했다. 기생들은 딱히 생각나는 말을 찾지 못해 ‘동정’이라는 말을 썼을 뿐, 말 그대로 가엾게 여겨 달라는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한 줌의 도덕과 최소한의 ‘자존’ 아니었을까.

  



7. 식민지 조선 문화·예술계의 아이콘, 모던 ‘기생들’

 

기생은 신문과 잡지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다. 당시에 만약 ‘연예 통신’이라는 신문과 방송이 있었다면, 단연 기생들의 이야기로 꽉 찼을 것이다. 기생의 삶은 대중들에게 질리지 않는 가십거리를 충분히 제공하고도 남았다. 기생은 한마디로 식민지 조선식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주역’이었다. 


기생 중에는 조선의 전통 예악을 전수받고 이를 후대에 전승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얼굴과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화초기생도 있었다. 어떤 기생들은 기생 생활을 접은 후에 대중가요 가수로 활동하거나 은막의 스타로 탈바꿈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여배우로 이름을 떨친 기생은 이월화, 석금성, 복혜숙, 신일선 등이었으며, 최고의 레코드 판매 기록을 세운 기생 출신 대중가수로는 왕수복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기생들의 사진을 찍어 ‘기생 사진첩’을 만들어 팔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연예인 브로마이드를 제작한 셈이었다. 그만큼 기생의 인기는 높았다. 인기 높은 기생들은 광고에도 출현하기에 이른다.   
 



예나 지금이나 샴푸 광고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기생 노홍은이 ‘화왕 샴푸’라는 샴푸의 광고 모델이었다. 이 샴푸는 일본의 가오사(花王社 화왕사)의 상품이었다. (가오사의 샴푸 광고 모델로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일본 피겨 스케이트 선수 아다사 마오가 있다.) 


기생은 식민지 조선 광고계의 ‘블루칩’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그녀들은 노동 운동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고, 물산 장려 운동과 자선 사업에 몰두하기도 했으며, ‘문화 외교 사절’의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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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키 2010-11-16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라마 경성 스캔들에 나오던 차송주(한고은)가 생각나네요. 기생의 아름다움과 여배우의 화려함과 혁명가의 지적 포스까지 느껴지던...우리가 기생에게 기대하는 환상이 너무 큰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정말 멋졌다는^^

비로그인 2011-04-06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순자는 조흥갑과 합장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