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특별한’ 기생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강명화와 강향란의 이야기는 특별한 기생담의 정점에 놓여 있다.
강명화는 현대판 ‘춘향’과도 같았다. ‘천한’ 기생 강명화와 거부의 ‘독자’ 강병천은 사랑하는 사이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가끔 나오는 대기업 후계자와 화류계 여성 사이의 사랑인 셈이었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끝내 동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지킨 강명화와 강병천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강명화는 ‘자유연애’와 ‘연애지상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그의 사랑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권의 소설로 재창조되었으며, 1967년에는 윤정희와 신성일이 주연한 영화 <강명화>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10만여 관객을 모았다. 강명화와 강병천의 정사(情死)로 인해 여러 명의 연인들이 그들의 ‘본을 받아’, 강명화를 따라간다며 정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죽했으면 단재 신채호가 ‘자살귀(鬼) 강명화가 열녀가 되는 문예가 무슨 예술이냐!’고 비판했겠는가.

강명화도 강명화였지만, 단발 미인 혹은 단발랑이라 불렸던 강향란 또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기생이었다. 당시 신문 보도를 통해 그녀의 삶을 따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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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경성 시내에는 어떤 여학생이 머리를 깎고 남자 양복에 캡 모자를 쓴 후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닌다고 하여 일반 사회에서는 이야기의 꽃이 피게 되었다. (……) 조선에서는 남자와 같이 살아보겠다는 어떤 주의와 이상을 가지고 머리를 깎은 여자는 이 여자가 처음이다.
―“斷髮娘(일): 머리 깎고 남복한 여학생, 그는 한성권번의 강향란”, <동아일보>, 1922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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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향란은 한성 권번의 유명한 기생이었다. 경성 화류계에 출입하는 남자치고 강향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향란은 한 손님에게 이끌린다. 이 남자는 경성에서 유명한 웅변가이자 변호사였다. 사랑은 무르익었고, 두 사람은 장래를 언약한다. 결혼을 결심한 강향란은 기생을 그만두고 배화여학교 보통과 4학년에 입학한다.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하기에 이른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정인이 배신을 한 것이다. 죽기로 결심하고 한강에 뛰어들려던 강향란은 다행히 지나가던 지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강향란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남자야, 네 이름은 악마이리니!’ 강향란은 남자에게 동정을 구하느니 차라리 남자와 똑같이 살겠다며 중국인이 경영하는 이발소에 찾아가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양복을 입었다.
배화학교에서는 단발한 여학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그녀를 퇴학시켰다. 강향란은 ‘강석자’로 이름을 바꾸고 근우회 활동을 하며 여성운동도 펼쳤다. 여성이 남성의 노리개 취급받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강향란을 비난하는 남성들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을 들먹이며, ‘남자로 모습을 바꾼 강향란을 조속히 매장하라!’고 떠들어댔다. 만신창이가 된 강향란은 조선을 떠나 상하이로 거처를 옮기지만, 희망을 품고 떠났던 상하이의 삶 또한 팍팍했다.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 강향란은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이후 강향란은 영화배우로 변신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강향란, 강명화, 노홍은, 왕수복, 복혜숙 등은 기생이었으며, 이들은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이슈 메이커였다. 이들은 때론 신여성의 상징으로, 때론 항일 독립운동가로, 때론 자선사업가로, 때론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런 기생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현재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기생은 논개, 춘향, 황진이 정도다. 적장과 함께 투신자살한 의기 논개, 정절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 춘향, 송도삼절로 알려진 황진이. 우리는 이들을 통해 기생의 삶을 상상한다. 애국, 정절, 절개. 이 얼마나 남성적 시선으로 점철된 단어들인가. 기생의 삶은 우리의 기대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전통예악의 전수자니, 독립투사니, 노동운동가니, 자선사업가니, 현대판 여배우니 등등, 어떠한 방식으로 불렸든 기생은 ‘신분’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기생은 남성들이 만들어낸 성 문화의 산물이며, 남성들은 기생을 통해 그들의 예술도, 몸도, 영혼도 버젓이 착취했다. 어쩌면 기생들의 화려한 ‘미담’은 왜곡된 남성들의 성 문화를 미화하면서 남성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은폐하고 위장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항일운동, 노동운동, 국채보상운동, 자선사업 등에 힘을 쏟았던 기생들을 격려하고 칭송하는 많은 글들에는 ‘기생도 이렇게 한다!’라는, ‘너희(기생)도 인간이, 국민이 될 수 있다!’라는, ‘천한 기생보다 못한 삶을 살면 안 된다’라는 식의 폭력적인 논리가 깔려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8. 오리엔탈 기생
기생에 관심을 둔 것은 조선의 남성들만이 아니었다. 조선으로 여행 온 외국인들은 기생에 대해서 꼭 한마디쯤 하는 등 기생에 관심을 표했다. 실제로 외국인들은 조선의 기생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1903년 러시아 황실 지리학회 탐사대의 일원으로 조선을 방문한 폴란드계 러시아인(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식민지였다)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Waclaw Sieroszewski)는 조선인 통역관에게 부탁하여 기생의 공연을 직접 관람했다. 그는 ‘과연 궁중 연회에 참석한 예기들도 몸을 팔았을까’에 대해서 아주 궁금해했으나 끝내 알아내지 못한 채 러시아로 귀국했다. 훗날 그는 <기생 월선이>(1906)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여행한 수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의 기생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관심 안에는 ‘조선 여자들은 극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들’이라는 식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작동하고 있었다. 조선의 기생은 일본의 게이샤와 더불어 외국인들의 특별한 관심거리였다. 이방인들은 기생들의 가무에 찬탄하면서도 결국 그녀들을 남성 권력의 ‘노예’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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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은 매우 어릴 때부터 다른 한국 여인들이 하지 않는 여러 가지 악기의 연주, 창(唱), 무용, 독서, 낭송, 작문, 취미 활동 같은 기예를 훈련받아 그들의 매력을 성숙시켜 나간다. 그들의 운명은 상류계급 남자들이 유쾌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교육은 필수적인 것이다. (……) 온갖 훈련들, 격리되지 않고 열려 있는 사회적 위치가 그들을 빛나게 하지만 한국의 기생들은 일본의 게이샤와 처지가 다르다. 일본에서는 게이샤가 종종 귀족의 아내가 되며 심지어 총리대신의 정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누구도 기생을 그런 자리로 끌어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인화 옮김, 살림,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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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외국인들은 기생을 돈에 팔려 간 ‘노예’로 보았다. 또한 기생들의 기예 역시 양반으로 대표되는 남성 권력의 오락과 여흥을 위해 교육받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우리의 상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기생, 드라마 속의 명기는 ‘예술가’지만, 외국인들은 그 예술조차 결국 남성들의 즐거움을 위해 계발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남성 권력의 노예이자 예술가로 불렸던 기생과 기생 제도, 그리고 그와 더불어 공창 제도는 1948년 2월 4일부로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