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야기의 메신저, 전기수

 

 

   
 

소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소설이 이를테면 제3자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제시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3자의 운명이, 그 운명을 불태우는 불꽃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따뜻함을 우리들에게 안겨주기 때문이다. 독자가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한기에 떨고 있는 삶을, 그가 읽고 있는 죽음을 통해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인 것이다.
―발터 벤야민, “얘기꾼과 소설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99

 
   

  

책 읽어주는 남자
   


10대 소년과 30대 여인의 사랑은 처음부터 비극이 예정된 소설처럼 출구가 없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2009년)를 보았을 때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10대 소년과 30대 여인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초반부까지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영화는 어린 마이클(랄프 파인즈)의 첫 사랑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고, 전쟁을 겪은 성숙한 여인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치유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영화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첫사랑보다, 홀로코스트와 나치즘 그리고 전범 재판보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마이클과 한나와의 사랑을 매개하는 것이 ‘책을 읽어주는 행위’라는 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녀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어린 소년은 성숙한 여인에게 책을 읽어준다. 마이클은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한나는 어린 소년의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글을 읽을 수 없었던 그녀가 알지 못했던 모든 행복을 ‘책 읽어주는 소년’을 통해 뒤늦게 깨달은 한나.     

 

  

그러나 한나는 자신의 행복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린 마이클이 〈채털리 부인의 여인〉과 〈오디세이〉를 한나에게 읽어주며 은밀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어느 날 한나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이클 곁을 떠난다. 첫사랑이 떠나자 마이클의 책 읽어주기도 끝났다.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던 마이클은 다시는 누군가를 그처럼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다.

8년 후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우연히 한나와 마주친다. 2차 세계대전 전범 재판을 참관하기 위해서 법정에 들어선 마이클은 피고가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한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충격에 휩싸인다. 유태인 강제 수용소의 감시원이었던 한나는 유태인을 학살한 죄가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수감 생활을 시작한다. 마이클은 감옥에 있는 한나를 위해 다시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마이클은 10년 동안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한나에게 보낸다. 마이클의 목소리로 구연된 이야기를 들으며 한나는 평온을 되찾는다.   

 

 

한나는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도 어린 소년들에게 책을 읽혔다. 글을 모르는 한나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한나는 마이클의 목소리로 녹음된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들으며, 그저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로만 보였던 글자를 그제야 깨우치기 시작한다. 마이클이 읽어주는 이야기책의 소리와 소설 원본에 적힌 글자를 비교해가며 알파벳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더(The)’라는 글자를 깨우치기까지 60여 년이 걸린 셈이다. 한나는 글을 깨우치자 마침내 마이클에게 아주 짧은 편지를 보낸다.  

 

   
 

Thanks for the latest, kid.
I really liked it.
꼬마야
지난번 책 좋았어.

 
   

 

중년의 남자가 된 마이클은 아내와 이혼한 상태였고, 백발의 노파가 된 한나를 보면서도 아직까지 마음이 편치 않다. 마이클은 한나에게 이야기책을 녹음하여 보내줄 수는 있지만 한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품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나의 사면이 결정되자 교도관은 마이클에게 전화를 걸어 한나와의 면회를 주선한다. 20년 만에 마이클과 한나는 재회하지만 마이클은 한나의 손길을 조용히 뿌리친다. 한나가 출소하면 살 집과 직장을 마련해놓고 사회 교육 프로그램까지 등록해놓은 마이클이었지만, 아직까지 마음으로부터 그녀를 용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마이클: 책 많이 읽어요?
한나: 누군가 나에게 읽어주는 게 더 좋아. 이젠 그것도 끝이겠지?

 
   

 

마이클은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한나의 눈빛을 외면한다. 한나는 어느새 마이클의 ‘짐’이 되어버린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출소하기 전날 한나는 마이클이 구연한 책들을 책상 위에 쌓아놓고 신발을 벗고 그 위에 올라가 생을 마감한다. 출소하는 날이 다가왔지만 한나는 ‘바깥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의지가 없었다. 감옥에서 유일하게 배운 게 있다면 글을 읽을 줄 알게 된 것인데, 그 능력을 한나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마이클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 소박한 마음을 마이클은 받아주지 않았다. 한나에게 소설 혹은 이야기책은 읽는 게 아니라 듣는 것이었다. 마이클이 녹음하여 들려주던 이야기 테이프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모든 희망의 끈을 놓고 떠나버린다.

한나가 글을 읽을 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낭독’이라는 매개를 통한 교감이 아니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묵독’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위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만이 지닐 수 있는 낭독의 아우라. 마이클이 낭독해주는 이야기가 끝나자 한나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희망 또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닐까. 도대체 이야기란 무엇일까. 소설을, 이야기책을 듣는다는 것은 또한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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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lang 2010-11-28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년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한나의 눈빛이 빛나던 장면들. 슬프도록 아름다웠죠.

자음과모음 2010-11-29 10:12   좋아요 0 | URL
누군가의 목소리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특별해요 정말. 우리 안으로 흘러드는 어떤 매력적인 시공간 속에 우리는 무방비 상태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승원 2010-11-3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the에 동그라미를 치는 장면을 보며, 저는 울컥......

자음과모음 2010-12-01 11:09   좋아요 0 | URL
앗 선생님 감성초식남...

비로그인 2011-04-0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민오기 전 중도실명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녹음일을 10여년 했었지요. 오직 시각장애인만 대출이 되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못해서 안타까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