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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화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더빙: ‘변사’의 후예들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
생각만 해도 온몸이 간지러운 대사다. 중학교 시절인가 주말만 되면 텔레비전에서 ‘방화(邦畵)’를 상영했다. 지금은 한국영화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식민지 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방화로 불렸다. ‘경아~’와 ‘아~ 행복해요’는 영화 <별들의 고향>(1974)의 한 장면이었다. 버터를 잔뜩 바른 것 같은 신성일의 목소리와 이에 질세라 이상야릇하면서 간지러운 콧소리를 내는 안인숙의 ‘러브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닭살이 돋는다. <별들의 고향>뿐만이 아니었다. 방화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의 목소리는 대개 비슷했다. ‘빠다’ 아니면 ‘코맹맹이’ 소리였다.

나야 버터 바른 목소리와 콧소리가 느끼하고 간지러운 목소리라고 느꼈지만, 어떤 사람들은 터프하고 나긋나긋하다고 느꼈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방송을 보며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별들의 고향>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는 본인의 것이 아닌 전문 성우의 목소리였다. 잠깐 실망을 하기는 했지만, 이내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대신 연기했던 성우가 누군지 더 궁금해졌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입을 맞췄던 성우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만약 그들의 목소리 연기가 없었다면 영화의 흥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목소리 연기자인 성우의 선배격인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변사’다. 변사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온 백성의 엔터테이너이자 목소리 연기자였다.
나는야 ‘뿡뿡이 춤’을 추는 사나이!
영화가 끝나고 불이 꺼졌다. 막간(幕間)의 쇼가 펼쳐질 시간이다. 무대 뒤편에서 악대의 무도곡 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갑자기 오색 조명들이 무대를 비췄고, ‘뿡뿡’ 거리며 자전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 프록코트에 중절모를 쓴 한 사내가 무대로 등장했다. 사타구니에 자전거 나팔을 끼우고 연신 엉덩이를 흔들며 뿡뿡, 뿡뿡거리는 그 사내의 몸짓에 관객들은 소리를 지르며 열광했다.
지금 같으면 성행위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공연법에 걸려 검찰 조사를 받을 만한 퍼포먼스를 한 이 사내에게 여성 팬들은 마음을 빼앗겼다. 여성 팬들은 뿡뿡이 춤을 추는 사내에게 와이셔츠, 넥타이, 향수, 한복 등을 선물했다. 그렇다고 그 사내에게 여성 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화려하고 구성진 언변을 못 잊어 식음 전폐한 남성 팬도 한 둘이 아니었다. 당대의 소년과 소녀를 불문하고 그의 괴상망측한 춤과 언변에 빠져들어 헤어 나올 줄 몰랐다.
수많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웃고 울린 이 사내의 이름은 서상호(徐相昊)였다.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스타이자, 은막의 톱스타들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엔터테이너 서상호의 직업은 활동사진(영화) 변사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두터운 팬 층을 형성했고, 이들에게 일상의 즐거움을 선사했던 서상호는 자신의 인기를 주체하지 못했고, 그의 말년은 너무나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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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영화가 수입된 후 삼십 여년이란 짧은 역사 밖에 갖지 못하였지만, 일찍 영화 해설계에 군림하여 무성영화 황금시대에 ‘팬’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던 서상호(徐相昊)가 지난 팔월 십이일 밤 그리운 옛 둥지 우미관(優美館) 한 구석에서 한 많은 그의 후반생을 죽음으로 청산하고 말았다. 아홉수가 어렵다는 옛말도 있거니와 그도 해가 바뀌면 오십 세가 될 나이, 인생 오십에 공 없는 몸으로 세상사람 낯을 보기가 부끄러웠던지 마흔아홉 살을 일기로 ‘모히’[모르핀] 중독자라는 가장 명예롭지 못한 죽음을 하였다.
―柳興台, “銀幕暗影 속에 喜悲를 左右하든 當代 人氣辯士 徐相昊 一代記”, <朝光>, 193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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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대중문화 최고의 스타였던 서상호야말로 조선 무성영화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역사였다. 그렇다면 식민지 조선에서 ‘변사’라는 신종 직업은 어떤 직업이었으며, 그들의 삶은 또한 어떠했을까?

민중 오락의 제왕, 키네마가 납신다
활동사진, 즉 영화는 박래품이었다. 조선에 영화가 들어 온 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이다. 1899년 무렵 한성전기회사에서 영화를 상영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본격적으로 영화가 수입된 것은 1903년경이었다. 1903년 한성전기회사의 공터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는데, 당시 입장료는 10전이었다. 사람들은 물 건너온 박래품, 활동사진을 보기 위해서 매일 밤 인산인해를 이뤘다. 매일 저녁 관람객은 약 1,000여 명이 넘었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 명이었으니, 정말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인 셈이다.

말은 영화였지만, 당시 영화의 상영 시간은 아주 짧았다. 또한 지금과 같은 영화는 아니었다. 자연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을 촬영한 다큐 필름과 비슷했다. 활동사진이라는 이 신기한 발명품을 고종 황제도 몸소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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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밤 오후 여덟시 중명전에서 활동사진회를 열어 대황제폐하, 황태자전하와 태자비, 영친왕 저하, 황귀비께옵서 관람을 하셨는데 전무과(電務課) 기사 원희정(元熙貞) 씨의 설명으로 빙활(氷滑), 군함의 수병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모습, 다양한 사람들의 풍경, 해수욕장의 광경 등 20여종을 모두 관람하셨는데 전쟁영화는 한편도 없었다고 하더라.
―“활동사진어람”, <만세보>, 1907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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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일가가 본 영화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빙활, 즉 스케이트, 해수욕장 풍경, 군함의 수병 등을 보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황제 일가가 본 영화의 내용들이 당시에는 대단한 볼거리였다. 당시만 해도 스케이트도, 군함도, 해수욕장도 조선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영화는 근대에 들어 생긴 새로운 예술 장르였지만, 그것이 조선으로 유입되었을 때 영화는 예술이라는 이름보다는 ‘근대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의미가 더 컸다. 고종 황제와 그 주변 사람들은 서구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활동사진 덕택이었다. 활동사진은 조선 사람들에게 낯선 신세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신기한 근대 문명의 산물이었으며, 서구 문명은 스크린이라는 앵글 속에서 재현되었다.
조선인들에게 활동사진은 서구 세계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무료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오락거리였다. 단성사, 연흥사, 원각사와 같은 극장이 문을 열었고, 외국 영화도 더 많이 수입되었다. 조선에서 활동사진이 일반인들에게 친숙해 진 지 20여 년이 지난 1927년에 이르면 영화 관객은 260만 명에 이르렀고, 1935년에는 880만 명이었다. 1925년을 기준으로 해서 2,250여 편에 이르는 영화가 수입되었는데, 이 중 미국 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미국 영화가 2,130여 편이었고, 유럽 영화가 124편이었다. 영화 상설관도 전국적으로 39곳에 이르렀다. 가히 영화의 황금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송깡깽이’는 누구인가?
변사는 무성영화와 함께 등장했다. 앞서 고종 황제가 활동사진을 관람할 때 원희정이란 사람이 ‘해설’을 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활동사진은 당연히 무성영화였다. 자막이 있기는 했지만, 그 자막은 외국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활동사진을 해설해주는 변사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변사가 외국어에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원희정을 전문적인 변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변사가 전문 직업으로 등장한 것은 1910년 영화전문관이었던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된 이후로 알려져 있다. 변사가 하는 일은 활동사진이 시작하기 전에 활동사진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역할이었다. 이를 전설(前說)이라고 했다. 영화와 관객 사이를 연결하는 매파가 변사였던 것이다.
1910년대에만 해도 우리에게 익숙한 장편의 무성영화보다는 사진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보여주는 단편 활동사진이 더 많았다. 활동사진이나 무성영화가 생겨났다고 해서 바로 변사라는 직업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변사의 기원은 어디서 찾을까.
변사의 기원을 일본과 조선의 전통에서 찾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조선 변사의 기원은 일본의 전통극에서 찾는다. 일본의 전통극인 분라쿠(文樂)나 가부키(歌舞技)에 등장하는 극해설자, 즉 분라쿠의 다유(大夫), 가부키의 다케모도(竹本)의 역할을 변사가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조선의 전통극인 가면극과 남사당놀이에서 변사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탈춤에 등장하는 말뚝이와 남사당놀이에 등장하는 산받이를 변사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활동사진 변사 좌담회“라는 기사가 1938년 4월호 <조광>이란 잡지에 실렸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무성영화가 사라지고 발성영화인 ‘토키(Talkie)’가 등장한다. <조광>의 기획은 한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인기 직종이었던 변사가 토키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가는 시점이 되었기 때문에 변사의 활동을 회고하기 위해서였다. 참석자의 면면을 보면 사회는 소설가이자 연극인이었던 함대훈(咸大勳)이 맡았다. 변사로 참석한 사람은 성동호(成東鎬), 박응면(朴應冕), 서상필(徐相弼)이었는데, 이들은 변사로서는 끝물을 탄 셈이었다. 이들의 회고에 의하면 조선 최초의 변사는 ‘송깡깽이’였으며, 그 이름은 송병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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