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던 엔터테이너, 변사 (3)
 

변사, 영화를 번안하다

변사는 영화의 대본을 보고 연기를 했다. 뿐만 아니라 변사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갔다. 변사는 영화의 해설자이자 주연 배우들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성우이자 조선적 상황에 맞춰 영화를 적극적으로 ‘오역’했던 각색가이자 번안가의 역할도 떠맡았다.  

 

   
 

활동사진은 다만 형용(形容)으로 만의 미를 나타내는 일종의 무언극이다. 그럼으로 변사의 설명이 있은 후에 비로소 보는 사람이 자세히 알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변사의 설명으로써 그 사진에 대한 예술적 가치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변사는 불가불 그 극에 대한 사실과 성질 여하를 자세히 안 뒤에 출연하는 배우의 표정을 따라 틀림없이 설명을 하여야 비로소 예술적 가치를 완전히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활동사진 변사는 연극배우들보다 지식과 사상이 우월한 자로 인지의 발전을 속히 관찰하여서 그에 따라 손님에게 만족을 주어야 할 것이다.
―八克生, “활동변사에게”, <매일신보>, 1919년 8월 22일

 
   

 

당시에 개봉되었던 대부분의 무성영화는 미국 영화였다. 자막이 있었지만 영어로 된 자막이었으니, 웬만한 관객들은 쉽사리 자막을 읽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변사는 관객과 영화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야만 했다. 영화 대본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영화의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해설도 좋게 마련이다. 여기에 더해 변사는 조선적 상황에 맞춰 대본에 없는 말을 넣거나 의도적으로 내용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서상호는 (……) ‘타이틀’에 없는 말을 그럴듯하게 창작하여 집어넣어서 더한층 갈채를 받기 시작하였으며, ‘타이틀’에 ‘쫀’이나 ‘메리-’로 있건 말건 대중에 영합하기 위하여서 김서방 박서방 휘뚜루마뚜루 이름을 붙이다가 나중에는 ‘메리-’가 ‘뺑덕어멈’이 되어 나오기까지 하였다.
―柳興台, “銀幕暗影 속에 喜悲를 左右하든 當代 人氣辯士 徐相昊 一代記”, <朝光>, 1938년 10월

 
   

  

 

금발의 메리가 검은 머리의 뺑덕어멈으로 변한다고 해서 관객들이 질타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순간순간의 재치를 발휘하는 변사의 연기에 빠져들기만 했다. 전문직이었던 변사도 영화의 장르에 따라 좀더 전문적으로 분화해갔다. 사극은 김덕경, 문예극은 서상호와 우정식, 활극은 이병조, 희극은 최병룡, 연애극에는 변사 출신의 감독 김영환이 전문 변사로 활동했다. 서상호는 미국 영화인 <명금>(1915)과 <암굴왕>(1913)의 변사로 유명했다. <명금>의 원제는 이었고, ‘어두운 동굴의 왕’이라는 <암굴왕>의 원제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 그럼 서상호가 가장 호평받았던 <암굴왕>의 해설 장면을 들어보자.   

 

   
 

오! 하느님이시여. 원수의 하나를 인제서야 갚았습니다. 이십여 년의 장구한 세월을 무변대해이고도 차디찬 뇌옥에서 꽃 같은 청춘을 속절없이 다 늙히고, 복수의 불타는 일념은 골수에 사무쳐 그는 언제든지 이날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柳興台, “銀幕暗影 속에 喜悲를 左右하든 當代 人氣辯士 徐相昊 一代記”, <朝光>, 1938년 10월

 
   

 

오페라백은 괴상한 복면이다 

변사의 인기가 높아갈수록, 무성영화에서 변사의 역할이 높아갈수록, 각계각층에서 변사의 일거수일투족에 비상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총독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1년이 되자 변사의 자격을 제한하는 면허시험제도가 실시되었다. 1922년 5월에는 ‘흥행 및 흥행장 취체 규칙’이 제정되었으며, 1922년 6월 27일에 제1회 변사시험이 실시되었다.  

 

   
 

시내 장사동(長沙洞) 사십팔 번지 사는 정한설(鄭漢卨, 22세)은 이제로부터 삼년 전에 우미관 변사로 무대에 오른 이후, 금일까지 매우 근실히 지나오던 중 지난 오일 구시 반경에 활동사진이 중간에 끝나고 십 분간 휴식을 하게 된 틈을 타서 무대에 나타나, 일반관객을 향하여 긴장한 표정과 흥분된 어조로 주먹에 힘을 주면서 ‘오늘은 자유를 부르짖는 오늘이요, 활동을 기다리는 오늘이라. 우리의 맑고 뜨거운 붉은 피를 온 세상에 뿌리여 세계의 이목을 한번 놀래어서 세계 만국으로 하여금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정성을 깨닫게 하자’는 등 활동사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온당치 못한 말을 하였음으로 즉시 입장하였던 경관에게 취체[取締: 단속―인용자]되어 목하 종로 경찰서에 구인 조사 중인데 활동사진 변사로서 언론에 대한 관계로 취체 구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더라.
―“자유를 절규하고”, <동아일보>, 1920년 7월 8일

 
   

 

 

3․1 운동 직후였고,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문화정책으로 바뀐 시점에서 터진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사건과 변사 면허시험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극장이라는 다수한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 변사의 역할은 절대적이었고, 그런 변사를 통제할 필요가 생긴 것임에는 분명했다. 1926년에 실시된 변사 면허시험의 문제는 이렇다. 시험이니 원문 그대로 적는다. 한번 맞춰보시길.  

 

   
 

○ 다음에 기록한 바 문자의 뜻을 간단히 설명하라.
衝動, 處女說明, 五色酒, 러브씬, 刹那主義, 크라이막스, 文盲, 로케손, 社會主義, 赤化.
―<동아일보>, 1926년 12월 8일

 
   

 

1927년 2월 25일에도 경기도청에서 변사 면허시험을 실시했는데, 지원자는 10명이었다. 몇 명이 합격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변사 시험을 보겠다는 사람들의 지식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답안이 참으로 엉뚱하다.   

 

   
 

變態心理? (답) 變한 心의 變態, 시시로 심리가 변하는, 즉 찰나.
오페라백? (답) 괴상한 복면, 불란서 파리의 대극장.
힌트(hint)? (답) 사진의 기계가 장막에 合치 않는 것을 ‘힌트’가 不合한다고 함.
스크린(영사막)? (답) 임시로 제작한 장소, 정지시키는 것.
키네마 팬? (답) 이태리에서는 대극장.
―“오페라백은 怪常한 覆面”, <동아일보>, 1927년 3월 1일

 
   

 

변사는 뛰어난 언변으로 무장했지만, 그들의 지식과 교양이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본에서도 변사 면허시험이 있었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9일자 “동경전보”에 의하면, 일본의 일류 변사로 매우 인기가 많았던 한 사람이 ‘문제(問題)’라는 의미를 알지 못해서 벌벌 떨다가 별안간 실신하여 병원에 실려 갔다고 한다. 이처럼 일류 변사든 이류 변사든 간에 그들의 학식은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았고, 영화 팬이 많아질수록 점점 변사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witter 2010-08-30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많은 지식을 가진 것과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사이에는 반드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뛰어난 학생이 반드시 훌륭한 스승이 될 수는 없듯이....변사면허시험의 역설이겠지요?^^

이승원 2010-08-30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죠^^* 이야기꾼 변사가 가끔 부럽습니다. 강의를 하다가 졸고 있는 수강생들을 볼 때마다, 더욱,,,,

황정매 1029 2011-04-0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중간에 명금의 원제는 ...... 이었고, 에서 .......부분이 빠져있네요.
 

 

이승원입니다. 제 글을 읽는(은) 누리꾼 여러분들께 알려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모던 엔터테이너, 변사"를 비롯한 앞으로 연재될 글에는 사실 많은 ‘각주’가 숨어 있습니다. <삼천리>, <별건곤>, <대한매일신보> 등 옛날 잡지와 신문 같은 1차 자료는 제가 직접 인용을 하고 그 출전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2차 자료, 즉 제가 글을 써나가는 데 도움을 준 각종 책들과 논문들은 각주 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 연재이고, 가독성을 생각해서 일단 각주를 숨겼습니다. 단행본으로 책이 나오게 되면 숨겨져 있는 각주를 모두 되살려내서 표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모던 엔터테이너, 변사 (2)
 

취군 나팔을 따라 극장에 가다 

 

   

 

근일 단성사에서 풍류가 밤낮으로 질탕하여 노래하고 춤추기로 사람의 심장을 방탕하게 하는지라. 장안의 호걸들이 황금을 무수하게 허비하였더라.
―“시사평론”,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4일

 
   

 

   
 

한국에 몇 백 년 이래로 춘향가이니 심청가이니 흥부타령이니 화용도타령이라 하는 각색 음탕하고 허탄하게 연희하던 것을 오늘날에 이르러 이인직 씨가 팔을 뽐내고 대담하게 개량한다 자담[自擔]하였으며, 오늘날에 이르러 이인직 씨가 눈을 부릅뜨고 대담하게 개량한다 자기[自期]하였도다. (……) 오늘날 연희하는 마당에 태서 근대의 워싱턴이나 나폴레옹의 웅위한 기개를 볼 줄 알았더니 슬프다, 괴이하도다.
―“연극장에 독갑이”,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8일

 
   

 

1900년대 초 극장은 오늘날처럼 영화만 상영하는 곳은 아니었다. 각 극장에서는 오후만 되면 취군 나팔을 요란스럽게 울렸다. 취군 나팔대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활동사진 선전을 하며 관객 몰이에 여념이 없었다. 근대 초기 연흥사, 단성사, 협률사, 원각사 등의 극장은 ‘풍속개량’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정작 극장은 유교적인 윤리 속에 갇혀 있던 성적 욕망과 개인의 쾌락이 범람하는 근대적인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근대 초기 계몽 지식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질타하는 글들을 수도 없이 토해냈다. 그러나 이미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문화가 전파한 ‘쾌락’에 도취된 대중의 움직임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근대의 시작은 바로 ‘산업화’된 엔터테인먼트의 조직적 확산이기도 했던 것이다. 

관객들은 극장에서 활동사진만 보지는 않았다. 1907년 동대문에 있었던 광무대에서는 검무, 승무, 한량무, 무고(舞鼓), 관기남무(官妓男舞), 성진무(性眞舞)와 더불어 프랑스에서 수입된 활동사진을 상영하였다. 활동사진의 분량은 보통 15분에서 20분 정도였고, 마지막 순서였다. 극장은 대중에게 활동사진뿐만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러한 극장의 관행은 한동안 지속되었다가,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영화상설관, 즉 경성고등연예관이 설립되면서 점차 사라져갔다.  

 

 


변사의 시대가 열리다

이제 변사의 음성을 한번 들어보자. 무성영화 <아리랑>에서의 변사 목소리다. 
 

   
 

친구도 나가고 영진이도 나가고 빈 동리 빈 집안에 홀로 남은 영희는 현구의 사진을 가만히 내어 들고 기꺼울 그 앞날을 남모르게 그려볼 때 별안간에 방문이 열려지며 영희 앞에 들어서는 건장한 사나이.  
영희: 에구머니 당신이 웬일이셔요. 어서 나가주셔요.  
기호: 응! 오늘은 동리도 비고 집도 비고 서울서 온 그 자식도 없으니 참으로 좋은 기회다. 자! 내 말을 들어라, 응!
돈 많은 자의 세력을 믿고 꽃 같은 영희를 꺾으려는 기호는 혈안을 부릅뜨고 영희를 들어 안을 때, 처녀는 아무리 반항하였으나 무지한 그의 팔에 꺾이어진 가는 허리!
이때에 마침 놀이터에 갔던 현구가 돌아왔다.
현구: 오! 이 악마 같은 놈아. 영희를 거기 놓아라.
현구와 기호의 사이에는 맹렬한 육박이 시작되었을 때 영진이가 돌아와 이 모양을 보았다. 그는 낫을 찾아가지고 기호와 그의 부하들에게 달려들었다.(음악)

 
   

 

무성영화 <아리랑>은 1926년 10월 5일부터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이후 1938년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아리랑>은 히트를 쳤다. <아리랑>의 변사는 성동호였다. 흥행에 성공을 거둔 <아리랑>의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시키게 만들었던 것은 변사의 애절하고도 극적인 목소리였다. 변사는 단순히 대본을 읽는 것만이 아니었다. 스크린에서는 배우가 주연이었지만, 극장에서는 변사가 단연 ‘주연을 넘어선 주연’이었다. 사람들이 영화를 관람할 때 주연 배우보다 그 영화의 변사가 누구냐에 더 관심이 있었던 때였다.  

 

 

변사의 인기에 따라 영화도 덩달아 인기를 얻었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 변사는 배우보다 더 현장에서 연기에 몰입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관객의 호응도 좋게 나왔다. 그 호응이란 이런 것이다.  

 

   
 

‘이때에 나타나 보이는 청년은 후레뎃릿구 백작, 비조와 같이 기차에 몸을 날려 악한의 뒤를 추격!’하고 일대 기염을 토하면 관중은 사진보다도 변사에 취하고 손뼉을 쳤다.
―夏蘇, “영화가 백면상”, <朝光>, 1937년 12월

  

   
 

지금도 도화극장, 신부좌의 제일극장 같은 데 가면 간혹 볼 수 있지만, 활극장면에 박수를 한다든가 연애 장면이 나오면 짐승의 소리 같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것은 전부 이 시대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柳興台, “銀幕暗影 속에 喜悲를 左右하든 當代 人氣辯士 徐相昊 一代記”, <朝光>, 1938년 10월

 
   

  

   
 

그 당시의 극장으로 말하면, 야시장에서 싸구려로 파는 이야기 책 또는 고대소설을 읽을 때에나 나옴직한 말투로 전설(前說)을 끝내야만 의례히 영사가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변사는 한껏 목소리를 가다음어 제스처도 멋지게 해설을 전개하는데, 흥에 겨울 때의 그 얼굴 표정이 또한 볼 만했다. (……) 옛날의 변사들은 참으로 눈물겨운 노력을 해야만 했다. 특히 의음(擬音)을 내느라고 그들은 무척 골몰했는데, 예를 들면 대포 소리나 다이나마이트 터지는 소리 대신에 북을 두드렸고, 격투장면에는 발을 동동 구르고, 실감을 내기 위해 테이블을 쿵쿵 치면서 호들갑을 떨어야 했던 것이다. 영사 개시 전에는 의례히 악대가 흥겹게 행진곡도 연주했고, 한껏 모양을 낸 변사가 무대에 나타나면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지정된 자리에 앉은 변사는 갖은 애교를 다 부리면서 청산유수와 같은 열변을 한바탕 늘어놓기 일쑤였다.
―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

 
   

  

요컨대 변사는 영화의 ‘숨은 주연배우’이자 관객의 리액션을 좌지우지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했다. 변사는 스크린 왼쪽에 자리 잡았다. 조그만 책상을 설치하고 그 위에 대본과 스탠드가 놓였다. 변사는 스크린과 대본을 번갈아 보며 영화를 ‘연기’해냈다. 외국어로 된 자막을 읽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변사는 살아 있는 자막이었다. 변사가 연기를 훌륭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변사의 능력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무성영화는 삼박자가 맞아야만 했다. 스크린을 비추는 영사기사가 있어야 했고, 변사의 목소리 연기에 따라 상황에 적절한 음악이 깔려야 했다.

변사와 영사기사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무성영화는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녹음기가 발명되자 변사와 영사기사와 오케스트라의 혼연일체는 깨졌다. 변사들은 녹음된 음반에 맞춰 대본을 읽었다. 녹음된 음반이 등장하자 점차 오케스트라는 사라지고 말았다.

변사는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또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되기 전인 막간을 이용해서 서상호처럼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막간극도 해야만 했다. 관객들의 입장에서 보면 무성영화보다, 그 영화의 주인공보다 변사가 더 극장에 가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이슈메이커였던 셈이다.


인기는 돈을 낳고

각 극장마다 담당 변사가 따로 있었다. 대부분 우미관과 단성사를 중심으로 변사들이 활동했다. 단성사의 주임변사는 서상호였고, 그 밑에 최병룡, 우정식 등이 있었으며, 우미관의 주임변사는 이병조였다. 서상호의 경우는 우미관에서 단성사로 옮긴 경우였다. 우미관의 ‘달라 박스’가 돈을 따라 단성사로 옮긴 것이다. 변사의 인기만큼이나 그들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극장들은 경쟁적으로 인기 있는 변사를 모셔오기에 바빴고, 지방 극장에서는 초청 비용 말고도 따로 거마비를 줘야만 인기 있는 변사를 모셔올 수 있을 정도였다.  

 

 

변사가 활약하던 시절 총독부에서 근무하던 고급 관리들의 월급은 30원에서 40원 사이였다. 변사의 월급은 일류 배우보다 많았다. 잠시 ‘3천만의 연인’으로 불렸던 식민지 조선의 최고 스타였던 문예봉(文藝峯)의 에피소드를 한번 보자.  

 

   
 

당대 인기 여배우인 문예봉(文藝峯) 여사가 <춘향전>과 <춘풍(春風)>을 찍느라고 분주하게 스튜디오로 출입하던 작년 겨울 일. 집이 가난한 터이라 쌀과 나무를 산다고 5원, 10원씩 늘 가불해갔었다. 하루는 <춘풍> 촬영을 하다가 문여사가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거의 울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감독과 카메라맨이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지금까지 5원, 3원 달라고 해서 모은 돈 60원을 아무도 모르게 치마 속 포켓에 비장(秘藏)해두었더니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로케이션 다니는 바람에 그만 이 어디 떨어졌는지 없어졌다.” 함이다. 그 어려운 살림에 3원, 3원 타다가 60원까지 모아둔 결심도 어지간하거니와 그렇게 피와 눈물의 60원을 없애게 한 악마의 죄, 또한 크다 할 것이다.
―“六十圓 일흔 文藝峯”, <삼천리>, 1936년 2월

 
   

 

최고의 배우 문예봉이라고 해서 생활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배우도 월급쟁이일 따름이었다. 문예봉 같은 일류 배우의 월급은 40원에서 50원 사이였다. 허나 잘나가는 변사의 월급은 70원에 달했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스타였던 변사들의 수입은 다른 월급쟁이들에 비해서 훨씬 높았다. 서상호 같은 경우 그렇게 많은 돈을 모았지만, 결국 기생집을 들락거리고 모르핀을 맞느라고 다 소비하고 말기는 했지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ku 2010-08-2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고의 변사 서상호의 라이프스토리가 참 흥미롭네요. 선생님 글에서는 사라진 직업뿐만 아니라 사라져간 사람들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좋습니다.^^

이승원 2010-08-30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능력이 모자라긴 하지만, ku님의 칭찬에 힘입어^^, 사라져간 사람들의 냄새가 나는 글을 쓰기 이해 더 노력하겠습니다.

inhak524 2010-09-03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서상호 라는 변사의 얘기가 궁금해지네요. 잘 읽었어요.

doingnow 2010-09-0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능엔터테이너는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아니었군요!ㅋㅋ저당시에도 언변과 연기에 능해야 몸값이 폭등?ㅋㅋ 너무 재미있어요!!엄마 무릎에 누워 다 끝나가는 옛날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조르는 고런 심정이네요..ㅋㅋ

황정매 2011-04-0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명세를 톡톡히 치뤘네요.
 

 

1. 모던 엔터테이너, 변사 (1)
 

옛날 영화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더빙: ‘변사’의 후예들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

생각만 해도 온몸이 간지러운 대사다. 중학교 시절인가 주말만 되면 텔레비전에서 ‘방화(邦畵)’를 상영했다. 지금은 한국영화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식민지 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방화로 불렸다. ‘경아~’와 ‘아~ 행복해요’는 영화 <별들의 고향>(1974)의 한 장면이었다. 버터를 잔뜩 바른 것 같은 신성일의 목소리와 이에 질세라 이상야릇하면서 간지러운 콧소리를 내는 안인숙의 ‘러브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닭살이 돋는다. <별들의 고향>뿐만이 아니었다. 방화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의 목소리는 대개 비슷했다. ‘빠다’ 아니면 ‘코맹맹이’ 소리였다.    

 

 

나야 버터 바른 목소리와 콧소리가 느끼하고 간지러운 목소리라고 느꼈지만, 어떤 사람들은 터프하고 나긋나긋하다고 느꼈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방송을 보며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별들의 고향>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는 본인의 것이 아닌 전문 성우의 목소리였다. 잠깐 실망을 하기는 했지만, 이내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대신 연기했던 성우가 누군지 더 궁금해졌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입을 맞췄던 성우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만약 그들의 목소리 연기가 없었다면 영화의 흥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목소리 연기자인 성우의 선배격인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변사’다. 변사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온 백성의 엔터테이너이자 목소리 연기자였다.  

 

 나는야 ‘뿡뿡이 춤’을 추는 사나이!

영화가 끝나고 불이 꺼졌다. 막간(幕間)의 쇼가 펼쳐질 시간이다. 무대 뒤편에서 악대의 무도곡 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갑자기 오색 조명들이 무대를 비췄고, ‘뿡뿡’ 거리며 자전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 프록코트에 중절모를 쓴 한 사내가 무대로 등장했다. 사타구니에 자전거 나팔을 끼우고 연신 엉덩이를 흔들며 뿡뿡, 뿡뿡거리는 그 사내의 몸짓에 관객들은 소리를 지르며 열광했다.

지금 같으면 성행위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공연법에 걸려 검찰 조사를 받을 만한 퍼포먼스를 한 이 사내에게 여성 팬들은 마음을 빼앗겼다. 여성 팬들은 뿡뿡이 춤을 추는 사내에게 와이셔츠, 넥타이, 향수, 한복 등을 선물했다. 그렇다고 그 사내에게 여성 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화려하고 구성진 언변을 못 잊어 식음 전폐한 남성 팬도 한 둘이 아니었다. 당대의 소년과 소녀를 불문하고 그의 괴상망측한 춤과 언변에 빠져들어 헤어 나올 줄 몰랐다.

수많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웃고 울린 이 사내의 이름은 서상호(徐相昊)였다.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스타이자, 은막의 톱스타들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엔터테이너 서상호의 직업은 활동사진(영화) 변사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두터운 팬 층을 형성했고, 이들에게 일상의 즐거움을 선사했던 서상호는 자신의 인기를 주체하지 못했고, 그의 말년은 너무나 쓸쓸했다.  

 

   
 

조선에 영화가 수입된 후 삼십 여년이란 짧은 역사 밖에 갖지 못하였지만, 일찍 영화 해설계에 군림하여 무성영화 황금시대에 ‘팬’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던 서상호(徐相昊)가 지난 팔월 십이일 밤 그리운 옛 둥지 우미관(優美館) 한 구석에서 한 많은 그의 후반생을 죽음으로 청산하고 말았다. 아홉수가 어렵다는 옛말도 있거니와 그도 해가 바뀌면 오십 세가 될 나이, 인생 오십에 공 없는 몸으로 세상사람 낯을 보기가 부끄러웠던지 마흔아홉 살을 일기로 ‘모히’[모르핀] 중독자라는 가장 명예롭지 못한 죽음을 하였다.
―柳興台, “銀幕暗影 속에 喜悲를 左右하든 當代 人氣辯士 徐相昊 一代記”, <朝光>, 1938년 10월

 
   

 

1920년대 대중문화 최고의 스타였던 서상호야말로 조선 무성영화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역사였다. 그렇다면 식민지 조선에서 ‘변사’라는 신종 직업은 어떤 직업이었으며, 그들의 삶은 또한 어떠했을까? 

 

 

민중 오락의 제왕, 키네마가 납신다

활동사진, 즉 영화는 박래품이었다. 조선에 영화가 들어 온 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이다. 1899년 무렵 한성전기회사에서 영화를 상영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본격적으로 영화가 수입된 것은 1903년경이었다. 1903년 한성전기회사의 공터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는데, 당시 입장료는 10전이었다. 사람들은 물 건너온 박래품, 활동사진을 보기 위해서 매일 밤 인산인해를 이뤘다. 매일 저녁 관람객은 약 1,000여 명이 넘었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 명이었으니, 정말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인 셈이다.   

 

 

말은 영화였지만, 당시 영화의 상영 시간은 아주 짧았다. 또한 지금과 같은 영화는 아니었다. 자연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을 촬영한 다큐 필름과 비슷했다. 활동사진이라는 이 신기한 발명품을 고종 황제도 몸소 관람했다. 

 

   
 

그저께 밤 오후 여덟시 중명전에서 활동사진회를 열어 대황제폐하, 황태자전하와 태자비, 영친왕 저하, 황귀비께옵서 관람을 하셨는데 전무과(電務課) 기사 원희정(元熙貞) 씨의 설명으로 빙활(氷滑), 군함의 수병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모습, 다양한 사람들의 풍경, 해수욕장의 광경 등 20여종을 모두 관람하셨는데 전쟁영화는 한편도 없었다고 하더라.
―“활동사진어람”, <만세보>, 1907년 5월 12일

 
   

  

고종 황제 일가가 본 영화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빙활, 즉 스케이트, 해수욕장 풍경, 군함의 수병 등을 보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황제 일가가 본 영화의 내용들이 당시에는 대단한 볼거리였다. 당시만 해도 스케이트도, 군함도, 해수욕장도 조선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영화는 근대에 들어 생긴 새로운 예술 장르였지만, 그것이 조선으로 유입되었을 때 영화는 예술이라는 이름보다는 ‘근대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의미가 더 컸다. 고종 황제와 그 주변 사람들은 서구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활동사진 덕택이었다. 활동사진은 조선 사람들에게 낯선 신세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신기한 근대 문명의 산물이었으며, 서구 문명은 스크린이라는 앵글 속에서 재현되었다.

조선인들에게 활동사진은 서구 세계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무료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오락거리였다. 단성사, 연흥사, 원각사와 같은 극장이 문을 열었고, 외국 영화도 더 많이 수입되었다. 조선에서 활동사진이 일반인들에게 친숙해 진 지 20여 년이 지난 1927년에 이르면 영화 관객은 260만 명에 이르렀고, 1935년에는 880만 명이었다. 1925년을 기준으로 해서 2,250여 편에 이르는 영화가 수입되었는데, 이 중 미국 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미국 영화가 2,130여 편이었고, 유럽 영화가 124편이었다. 영화 상설관도 전국적으로 39곳에 이르렀다. 가히 영화의 황금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송깡깽이’는 누구인가?

변사는 무성영화와 함께 등장했다. 앞서 고종 황제가 활동사진을 관람할 때 원희정이란 사람이 ‘해설’을 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활동사진은 당연히 무성영화였다. 자막이 있기는 했지만, 그 자막은 외국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활동사진을 해설해주는 변사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변사가 외국어에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원희정을 전문적인 변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변사가 전문 직업으로 등장한 것은 1910년 영화전문관이었던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된 이후로 알려져 있다. 변사가 하는 일은 활동사진이 시작하기 전에 활동사진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역할이었다. 이를 전설(前說)이라고 했다. 영화와 관객 사이를 연결하는 매파가 변사였던 것이다.

1910년대에만 해도 우리에게 익숙한 장편의 무성영화보다는 사진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보여주는 단편 활동사진이 더 많았다. 활동사진이나 무성영화가 생겨났다고 해서 바로 변사라는 직업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변사의 기원은 어디서 찾을까. 

변사의 기원을 일본과 조선의 전통에서 찾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조선 변사의 기원은 일본의 전통극에서 찾는다. 일본의 전통극인 분라쿠(文樂)나 가부키(歌舞技)에 등장하는 극해설자, 즉 분라쿠의 다유(大夫), 가부키의 다케모도(竹本)의 역할을 변사가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조선의 전통극인 가면극과 남사당놀이에서 변사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탈춤에 등장하는 말뚝이와 남사당놀이에 등장하는 산받이를 변사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활동사진 변사 좌담회“라는 기사가 1938년 4월호 <조광>이란 잡지에 실렸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무성영화가 사라지고 발성영화인 ‘토키(Talkie)’가 등장한다. <조광>의 기획은 한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인기 직종이었던 변사가 토키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가는 시점이 되었기 때문에 변사의 활동을 회고하기 위해서였다. 참석자의 면면을 보면 사회는 소설가이자 연극인이었던 함대훈(咸大勳)이 맡았다. 변사로 참석한 사람은 성동호(成東鎬), 박응면(朴應冕), 서상필(徐相弼)이었는데, 이들은 변사로서는 끝물을 탄 셈이었다. 이들의 회고에 의하면 조선 최초의 변사는 ‘송깡깽이’였으며, 그 이름은 송병운이었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route 2010-08-18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첫 직업이 변사라. 정말 추억의 직업이군요. 잘 읽겠습니다. ^^

lohas 2010-08-1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후의 더빙 목소리 중에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목소리도 빼놓을 수 없지요 ㅋㅋㅋ

이승원 2010-08-2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옥희'가 왠지 '오~키~'로 들리는 듯 합니다.

코롱코롱 2010-08-20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캬캬 재미있어염 추천 꾸욱~누르고 갑니다

직장인 2010-08-22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 재미있네요 이런저런 그때 상황 설명 덧붙여 주신 것도 좋았구요. 앞으로 쭉 옛날 직업 소개해주시길 기대할께요!

inhak524 2010-09-03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사라는 직업에 대단했군요 ^^* 잘 읽었어요.

mrmrshyde 2010-09-09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세상에도 사라져가는 직업들이 많은데.. 과거에서 오늘을 읽는 훌륭한 주제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프롤로그 
 

<별건곤(別乾坤)>이란 잡지가 있었다. 1926년 11월에 창간된 이 잡지는 대중들의 온갖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1927년 1월호에는 '현대진직업전람회(現代珍職業展覽會)'라는 기사가 실렸다. ‘현대의 진기한 직업 전람회’라는 뜻일 터이다. 신년 벽두부터 잡지의 편집자들이 소개하는 진기한 직업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뱀 잡아먹고 사는 사람, 뚜드리고 먹고 사는 사람, 새 잡아먹고 사는 사람, 귀신 잡아먹고 사는 사람, 싸움만 찾아서 먹고 사는 사람, 입으로 벌어먹는 사람, 땟국으로 먹고 사는 사람, 똥으로 먹고 사는 사람, 뚫고 먹고 사는 사람, 강짜로 먹고 사는 사람, 어두운 데서 벌어먹는 사람, 천당과 지옥을 오고가는 벌이.

단박에 유추할 수 있는 직업도 있지만,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알 듯 모를 듯한 직업이 태반이다. 그럼 하나씩 정답을 맞춰보자. 뱀 잡아먹고 사는 사람은 쉽게 알 수 있다. 땅꾼이다. 당시 기사에서는 ‘깍정이’라고 했다. 뚜드리고 먹고 사는 사람은 ‘딱딱이’다. 딱딱이는 나무토막 두 개를 딱딱 치면서 저녁마다 동네를 순찰하는 방법을 말한다. 새 잡아 먹고 사는 사람은 말 그대로 새 사냥꾼이다. 귀한 새를 잡아 시장에 파는 직업이다. 귀신 잡아먹고 사는 사람은 장님이다. 장님들은 액운이 든 집들을 찾아다니면서 지팡이를 두드리고 요상한 주문을 외워 귀신을 쫓아주고는 돈을 받는다고 한다.

싸움만 쫓아다니며 먹고 사는 직업을 흔히 조폭이나 깡패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변호사다. 신종 직업인 셈이다. 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많다. 목사, 약장수, 성악가, 변호사 등등. 그러나 편집자들이 지목한 직업은 ‘경매쟁이’다. 땟국으로 먹고 사는 직업은 목욕탕 주인, 똥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똥지게꾼, 뚫고 먹고 사는 사람은 연통 수리공, 강짜가 직업인 경우는 신파극에 출현하는 표독스러운 여배우, 어두운 데서 벌어먹는 사람은 활동사진 변사, 마지막으로 천당과 지옥을 오고가면서 벌어먹는 직업은 뚜쟁이다.

<별건곤> 편집자들이 열거한 진기한 직업 중에는 예전부터 있었던 직업도 있고, 근대에 들어 새롭게 생겨난 직업도 있다. 깍정이(땅꾼), 뚜쟁이, 장님(소경) 등은 옛날부터 있었던 직업이다. 딱딱이, 변호사, 활동사진 변사, 여배우, 연통 수리공, 경매쟁이, 똥지게꾼, 목욕탕 주인 등은 근대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직업이다. 이 중에는 이미 사라진 직업들도 있다. 활동사진 변사, 똥지게꾼 등이 대표적이다.

직업에도 생성과 소멸이 있다. 어떤 직업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틈타 새롭게 생겨나고,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직업이 사라졌다고 해서 완전히 소멸된 것만은 아니다. 완전히 ‘멸종’하는 직업은 적다. 예를 들어 식모라는 말은 사라졌지만, 가사 도우미라는 직업이 생겨났고, 활동사진 변사는 사라졌지만 내레이터나 성우라는 직업이 변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저자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갓장수는 시대의 뒷켠으로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해서 모자를 만드는 사람과 이발사가 생겨났으며, 인력거꾼이 사라진 자리를 택시기사가 대신하고 있다.
  

 

 

나는 직업의 변화야말로 근대성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의 배치와 경제적 메커니즘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직업이다. 어떤 직업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직업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좀 더 세련되고 모던해진 직업으로 변화할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는 것이며, 무엇이 새롭게 생겨났을까. 그 생성과 소멸 속에서 나는 근대와 현대를 치열하게 살아갔던,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의 결들을 보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사라진 직업, 새롭게 등장한 직업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네 근대적 삶의 흔적과 무늬를 더듬으면서 지금 여기의 삶을 재조명하고 싶은 것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노닥 2010-08-16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라진 직업이라...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쾌몽 2010-08-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오, 기대가 됩니다 ㅎㅎ

pearl 2010-08-16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너무 재미있습니다. 콩닥콩닥 두근두근...ㅋㅋ

이승원 2010-08-20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실 와 주신 여러분들께 인사드립니다. 저도 이런 형식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라, 콩닥콩닥 두근두근^^*

빨랫줄 2010-08-20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강짜로 먹고사는 사람=여배우 ㅎㅎㅎ 완전 센스 짱인데요?

inhak524 2010-09-03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업의 변화야 말로 근대성이라...공감이 갑니다.

doingnow 2010-09-09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직업이야 말로 사람들이 사는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닐까싶어용! 넘 재밌겠는걸요!ㅎㅎ기대됩니다요!!

신의성실 2010-09-0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밋는 주제네요! 시대별로 요구하는 직업이 다양한 만큼 직업 이름으로도 그 시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네요!
앞으로 연재 기대됩니다.

비로그인 2010-10-02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병인, 요양사들도 새로 생긴 직업이지요. 이전에는 제 부모 병구환을 며느리나 딸이 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