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별건곤(別乾坤)>이란 잡지가 있었다. 1926년 11월에 창간된 이 잡지는 대중들의 온갖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1927년 1월호에는 '현대진직업전람회(現代珍職業展覽會)'라는 기사가 실렸다. ‘현대의 진기한 직업 전람회’라는 뜻일 터이다. 신년 벽두부터 잡지의 편집자들이 소개하는 진기한 직업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뱀 잡아먹고 사는 사람, 뚜드리고 먹고 사는 사람, 새 잡아먹고 사는 사람, 귀신 잡아먹고 사는 사람, 싸움만 찾아서 먹고 사는 사람, 입으로 벌어먹는 사람, 땟국으로 먹고 사는 사람, 똥으로 먹고 사는 사람, 뚫고 먹고 사는 사람, 강짜로 먹고 사는 사람, 어두운 데서 벌어먹는 사람, 천당과 지옥을 오고가는 벌이.

단박에 유추할 수 있는 직업도 있지만,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알 듯 모를 듯한 직업이 태반이다. 그럼 하나씩 정답을 맞춰보자. 뱀 잡아먹고 사는 사람은 쉽게 알 수 있다. 땅꾼이다. 당시 기사에서는 ‘깍정이’라고 했다. 뚜드리고 먹고 사는 사람은 ‘딱딱이’다. 딱딱이는 나무토막 두 개를 딱딱 치면서 저녁마다 동네를 순찰하는 방법을 말한다. 새 잡아 먹고 사는 사람은 말 그대로 새 사냥꾼이다. 귀한 새를 잡아 시장에 파는 직업이다. 귀신 잡아먹고 사는 사람은 장님이다. 장님들은 액운이 든 집들을 찾아다니면서 지팡이를 두드리고 요상한 주문을 외워 귀신을 쫓아주고는 돈을 받는다고 한다.

싸움만 쫓아다니며 먹고 사는 직업을 흔히 조폭이나 깡패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변호사다. 신종 직업인 셈이다. 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많다. 목사, 약장수, 성악가, 변호사 등등. 그러나 편집자들이 지목한 직업은 ‘경매쟁이’다. 땟국으로 먹고 사는 직업은 목욕탕 주인, 똥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똥지게꾼, 뚫고 먹고 사는 사람은 연통 수리공, 강짜가 직업인 경우는 신파극에 출현하는 표독스러운 여배우, 어두운 데서 벌어먹는 사람은 활동사진 변사, 마지막으로 천당과 지옥을 오고가면서 벌어먹는 직업은 뚜쟁이다.

<별건곤> 편집자들이 열거한 진기한 직업 중에는 예전부터 있었던 직업도 있고, 근대에 들어 새롭게 생겨난 직업도 있다. 깍정이(땅꾼), 뚜쟁이, 장님(소경) 등은 옛날부터 있었던 직업이다. 딱딱이, 변호사, 활동사진 변사, 여배우, 연통 수리공, 경매쟁이, 똥지게꾼, 목욕탕 주인 등은 근대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직업이다. 이 중에는 이미 사라진 직업들도 있다. 활동사진 변사, 똥지게꾼 등이 대표적이다.

직업에도 생성과 소멸이 있다. 어떤 직업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틈타 새롭게 생겨나고,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직업이 사라졌다고 해서 완전히 소멸된 것만은 아니다. 완전히 ‘멸종’하는 직업은 적다. 예를 들어 식모라는 말은 사라졌지만, 가사 도우미라는 직업이 생겨났고, 활동사진 변사는 사라졌지만 내레이터나 성우라는 직업이 변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저자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갓장수는 시대의 뒷켠으로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해서 모자를 만드는 사람과 이발사가 생겨났으며, 인력거꾼이 사라진 자리를 택시기사가 대신하고 있다.
  

 

 

나는 직업의 변화야말로 근대성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의 배치와 경제적 메커니즘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직업이다. 어떤 직업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직업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좀 더 세련되고 모던해진 직업으로 변화할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는 것이며, 무엇이 새롭게 생겨났을까. 그 생성과 소멸 속에서 나는 근대와 현대를 치열하게 살아갔던,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의 결들을 보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사라진 직업, 새롭게 등장한 직업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네 근대적 삶의 흔적과 무늬를 더듬으면서 지금 여기의 삶을 재조명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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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닥 2010-08-16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라진 직업이라...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쾌몽 2010-08-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오, 기대가 됩니다 ㅎㅎ

pearl 2010-08-16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너무 재미있습니다. 콩닥콩닥 두근두근...ㅋㅋ

이승원 2010-08-20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실 와 주신 여러분들께 인사드립니다. 저도 이런 형식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라, 콩닥콩닥 두근두근^^*

빨랫줄 2010-08-20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강짜로 먹고사는 사람=여배우 ㅎㅎㅎ 완전 센스 짱인데요?

inhak524 2010-09-03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업의 변화야 말로 근대성이라...공감이 갑니다.

doingnow 2010-09-09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직업이야 말로 사람들이 사는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닐까싶어용! 넘 재밌겠는걸요!ㅎㅎ기대됩니다요!!

신의성실 2010-09-0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밋는 주제네요! 시대별로 요구하는 직업이 다양한 만큼 직업 이름으로도 그 시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네요!
앞으로 연재 기대됩니다.

비로그인 2010-10-02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병인, 요양사들도 새로 생긴 직업이지요. 이전에는 제 부모 병구환을 며느리나 딸이 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