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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군 나팔을 따라 극장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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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일 단성사에서 풍류가 밤낮으로 질탕하여 노래하고 춤추기로 사람의 심장을 방탕하게 하는지라. 장안의 호걸들이 황금을 무수하게 허비하였더라.
―“시사평론”,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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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몇 백 년 이래로 춘향가이니 심청가이니 흥부타령이니 화용도타령이라 하는 각색 음탕하고 허탄하게 연희하던 것을 오늘날에 이르러 이인직 씨가 팔을 뽐내고 대담하게 개량한다 자담[自擔]하였으며, 오늘날에 이르러 이인직 씨가 눈을 부릅뜨고 대담하게 개량한다 자기[自期]하였도다. (……) 오늘날 연희하는 마당에 태서 근대의 워싱턴이나 나폴레옹의 웅위한 기개를 볼 줄 알았더니 슬프다, 괴이하도다.
―“연극장에 독갑이”,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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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극장은 오늘날처럼 영화만 상영하는 곳은 아니었다. 각 극장에서는 오후만 되면 취군 나팔을 요란스럽게 울렸다. 취군 나팔대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활동사진 선전을 하며 관객 몰이에 여념이 없었다. 근대 초기 연흥사, 단성사, 협률사, 원각사 등의 극장은 ‘풍속개량’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정작 극장은 유교적인 윤리 속에 갇혀 있던 성적 욕망과 개인의 쾌락이 범람하는 근대적인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근대 초기 계몽 지식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질타하는 글들을 수도 없이 토해냈다. 그러나 이미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문화가 전파한 ‘쾌락’에 도취된 대중의 움직임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근대의 시작은 바로 ‘산업화’된 엔터테인먼트의 조직적 확산이기도 했던 것이다.
관객들은 극장에서 활동사진만 보지는 않았다. 1907년 동대문에 있었던 광무대에서는 검무, 승무, 한량무, 무고(舞鼓), 관기남무(官妓男舞), 성진무(性眞舞)와 더불어 프랑스에서 수입된 활동사진을 상영하였다. 활동사진의 분량은 보통 15분에서 20분 정도였고, 마지막 순서였다. 극장은 대중에게 활동사진뿐만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러한 극장의 관행은 한동안 지속되었다가,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영화상설관, 즉 경성고등연예관이 설립되면서 점차 사라져갔다.

변사의 시대가 열리다
이제 변사의 음성을 한번 들어보자. 무성영화 <아리랑>에서의 변사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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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도 나가고 영진이도 나가고 빈 동리 빈 집안에 홀로 남은 영희는 현구의 사진을 가만히 내어 들고 기꺼울 그 앞날을 남모르게 그려볼 때 별안간에 방문이 열려지며 영희 앞에 들어서는 건장한 사나이.
영희: 에구머니 당신이 웬일이셔요. 어서 나가주셔요.
기호: 응! 오늘은 동리도 비고 집도 비고 서울서 온 그 자식도 없으니 참으로 좋은 기회다. 자! 내 말을 들어라, 응!
돈 많은 자의 세력을 믿고 꽃 같은 영희를 꺾으려는 기호는 혈안을 부릅뜨고 영희를 들어 안을 때, 처녀는 아무리 반항하였으나 무지한 그의 팔에 꺾이어진 가는 허리!
이때에 마침 놀이터에 갔던 현구가 돌아왔다.
현구: 오! 이 악마 같은 놈아. 영희를 거기 놓아라.
현구와 기호의 사이에는 맹렬한 육박이 시작되었을 때 영진이가 돌아와 이 모양을 보았다. 그는 낫을 찾아가지고 기호와 그의 부하들에게 달려들었다.(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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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 <아리랑>은 1926년 10월 5일부터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이후 1938년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아리랑>은 히트를 쳤다. <아리랑>의 변사는 성동호였다. 흥행에 성공을 거둔 <아리랑>의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시키게 만들었던 것은 변사의 애절하고도 극적인 목소리였다. 변사는 단순히 대본을 읽는 것만이 아니었다. 스크린에서는 배우가 주연이었지만, 극장에서는 변사가 단연 ‘주연을 넘어선 주연’이었다. 사람들이 영화를 관람할 때 주연 배우보다 그 영화의 변사가 누구냐에 더 관심이 있었던 때였다.

변사의 인기에 따라 영화도 덩달아 인기를 얻었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 변사는 배우보다 더 현장에서 연기에 몰입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관객의 호응도 좋게 나왔다. 그 호응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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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나타나 보이는 청년은 후레뎃릿구 백작, 비조와 같이 기차에 몸을 날려 악한의 뒤를 추격!’하고 일대 기염을 토하면 관중은 사진보다도 변사에 취하고 손뼉을 쳤다.
―夏蘇, “영화가 백면상”, <朝光>, 193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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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도화극장, 신부좌의 제일극장 같은 데 가면 간혹 볼 수 있지만, 활극장면에 박수를 한다든가 연애 장면이 나오면 짐승의 소리 같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것은 전부 이 시대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柳興台, “銀幕暗影 속에 喜悲를 左右하든 當代 人氣辯士 徐相昊 一代記”, <朝光>, 193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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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극장으로 말하면, 야시장에서 싸구려로 파는 이야기 책 또는 고대소설을 읽을 때에나 나옴직한 말투로 전설(前說)을 끝내야만 의례히 영사가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변사는 한껏 목소리를 가다음어 제스처도 멋지게 해설을 전개하는데, 흥에 겨울 때의 그 얼굴 표정이 또한 볼 만했다. (……) 옛날의 변사들은 참으로 눈물겨운 노력을 해야만 했다. 특히 의음(擬音)을 내느라고 그들은 무척 골몰했는데, 예를 들면 대포 소리나 다이나마이트 터지는 소리 대신에 북을 두드렸고, 격투장면에는 발을 동동 구르고, 실감을 내기 위해 테이블을 쿵쿵 치면서 호들갑을 떨어야 했던 것이다. 영사 개시 전에는 의례히 악대가 흥겹게 행진곡도 연주했고, 한껏 모양을 낸 변사가 무대에 나타나면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지정된 자리에 앉은 변사는 갖은 애교를 다 부리면서 청산유수와 같은 열변을 한바탕 늘어놓기 일쑤였다.
―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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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변사는 영화의 ‘숨은 주연배우’이자 관객의 리액션을 좌지우지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했다. 변사는 스크린 왼쪽에 자리 잡았다. 조그만 책상을 설치하고 그 위에 대본과 스탠드가 놓였다. 변사는 스크린과 대본을 번갈아 보며 영화를 ‘연기’해냈다. 외국어로 된 자막을 읽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변사는 살아 있는 자막이었다. 변사가 연기를 훌륭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변사의 능력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무성영화는 삼박자가 맞아야만 했다. 스크린을 비추는 영사기사가 있어야 했고, 변사의 목소리 연기에 따라 상황에 적절한 음악이 깔려야 했다.
변사와 영사기사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무성영화는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녹음기가 발명되자 변사와 영사기사와 오케스트라의 혼연일체는 깨졌다. 변사들은 녹음된 음반에 맞춰 대본을 읽었다. 녹음된 음반이 등장하자 점차 오케스트라는 사라지고 말았다.
변사는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또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되기 전인 막간을 이용해서 서상호처럼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막간극도 해야만 했다. 관객들의 입장에서 보면 무성영화보다, 그 영화의 주인공보다 변사가 더 극장에 가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이슈메이커였던 셈이다.
인기는 돈을 낳고
각 극장마다 담당 변사가 따로 있었다. 대부분 우미관과 단성사를 중심으로 변사들이 활동했다. 단성사의 주임변사는 서상호였고, 그 밑에 최병룡, 우정식 등이 있었으며, 우미관의 주임변사는 이병조였다. 서상호의 경우는 우미관에서 단성사로 옮긴 경우였다. 우미관의 ‘달라 박스’가 돈을 따라 단성사로 옮긴 것이다. 변사의 인기만큼이나 그들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극장들은 경쟁적으로 인기 있는 변사를 모셔오기에 바빴고, 지방 극장에서는 초청 비용 말고도 따로 거마비를 줘야만 인기 있는 변사를 모셔올 수 있을 정도였다.

변사가 활약하던 시절 총독부에서 근무하던 고급 관리들의 월급은 30원에서 40원 사이였다. 변사의 월급은 일류 배우보다 많았다. 잠시 ‘3천만의 연인’으로 불렸던 식민지 조선의 최고 스타였던 문예봉(文藝峯)의 에피소드를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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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인기 여배우인 문예봉(文藝峯) 여사가 <춘향전>과 <춘풍(春風)>을 찍느라고 분주하게 스튜디오로 출입하던 작년 겨울 일. 집이 가난한 터이라 쌀과 나무를 산다고 5원, 10원씩 늘 가불해갔었다. 하루는 <춘풍> 촬영을 하다가 문여사가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거의 울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감독과 카메라맨이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지금까지 5원, 3원 달라고 해서 모은 돈 60원을 아무도 모르게 치마 속 포켓에 비장(秘藏)해두었더니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로케이션 다니는 바람에 그만 이 어디 떨어졌는지 없어졌다.” 함이다. 그 어려운 살림에 3원, 3원 타다가 60원까지 모아둔 결심도 어지간하거니와 그렇게 피와 눈물의 60원을 없애게 한 악마의 죄, 또한 크다 할 것이다.
―“六十圓 일흔 文藝峯”, <삼천리>, 193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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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배우 문예봉이라고 해서 생활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배우도 월급쟁이일 따름이었다. 문예봉 같은 일류 배우의 월급은 40원에서 50원 사이였다. 허나 잘나가는 변사의 월급은 70원에 달했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스타였던 변사들의 수입은 다른 월급쟁이들에 비해서 훨씬 높았다. 서상호 같은 경우 그렇게 많은 돈을 모았지만, 결국 기생집을 들락거리고 모르핀을 맞느라고 다 소비하고 말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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