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1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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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09.04.19]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장르의 소멸"과 책 말미에 부록처럼 실려 있는 몇 가지 외국어본 후기들을 함께 읽었다. 이로써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읽기는 우선 끝이 났다. 하지만 모든 끝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시작을 동반한다. 물론 다 읽었다고 해서 그것을 진정으로 다 읽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옮긴이 후기에 따르면 "장르의 소멸"은 원래 책에는 없던 내용인데 91년에 영어 번역본이 나올 때 처음으로 씌어진 챕터라고 한다. 그러므로 80년에 출간된 기존의 책과 91년에 쓴 이 챕터 사이에는 11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고, 그 간격에는 물론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적·비평적 전개 과정이 함축되어 있다. 그런 사정을 미리 앍고 읽는다면 이 챕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밝히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근대문학(19세기 근대소설)은 끝이 났고 그 말은 곧 근대문학 이외의 다른 장르가 회복되었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장르의 소멸"이라는 챕터 제목은 곧 "장르의 회복"이라는 제목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챕터는 크게 소세키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장르에 대한 이야기(+사생문)와, 유머를 하나의 축으로 하여 쓴 바흐친과 프로이트에 대한 이야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소세키는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다양한 장르의 픽션을 썼다. 여기서 말하는 장르란, 노스롭 프라이가 <비평의 해부>에서 분류해둔 네 가지 픽션 장르, 즉 노벨, 로망스, 고백, 아나토미를 말한다. 90년대까지도 소세키의 작품은 초기 작품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마지막 작품인 <명암>으로 발전해간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서양의 19세기적인 소설>(*근대문학)을 규범으로 삼고, 그것을 지향하여 모든 장르가 해소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이라고 번역되는 novel은 사실 "온갖 다양한 종류의 것을 넣을 수 있는 형식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제까지의 모든 장르를 탈구축하는 형식"(228)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그러므로 소설이 픽션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픽션도 아닌 것이다. 모든 장르를 탈구축한다는 면에서, 사실은 정련된 형태 자체가 불가능한 장르이다. 따라서 소세키의 작품이" 이른바 <근대소설>다운 <명암>을 향해 성숙해 나아갔다는 식의 견해는 근본적으로 옳지 않"(229)은 것이다.


 쓰보우치 쇼요와 모리 오가이의 몰이상 논쟁에서 모리 오가이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소설은 역사적 발전 단계로 존재하고 그것은 곧 픽션 중에서도 19세기 서양 소설이 우위에 있다는 관점에 따른 주장이 된다. 하지만 19세기 서양 소설이 우위에 있다는 말 자체에는 소설 이외의 장르가 소멸해야한다는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 오가이는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그는 쇼요와의 논쟁에서 이미 "<장르의 소멸>의 역사적 필연성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229) 하지만 오가이는 말년에 역사소설이라(고 불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장르의 픽션을 쓰게 되었고 이는 에도 이래의 사전(史傳) 장르를 회복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장르의 픽션을 통폐합시켜버리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반발하여 탄생된 작업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후 <우회>에 이르기까지 소설쓰기를 했다기보다는 사생문쓰기를 했다. 마사오카 시키에 의하면 "사생문은 리얼리즘이라는 의미의 <사생>이 아니라 모든 언어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시키의 제자들이 아니라 맹우(盟友) 소세키에 의해 계승"되었다. "근대문학의 내러티브는 <ㅡㅆ다(た)>라는 과거형에 의해 완성된다." 하지만 "사생문의 특징 중 하나는 현재형으로 씌어졌다는 것이다."(231) 또한 "<ㅡㅆ다>가 어느 한 시점에서의 회상으로 존재한다면, 소세키는 <ㅡㅆ다>의 거부에 의해 전체를 집약시키는 관점을 거부하고 있다."(232) 소세키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근대문학적 서술기법을 거부하고 사생문을 쓴 것이다. "사생문이 과거 시제 <ㅡㅆ다>를 거부하는 것은 근대 소설이 소거시키려 했던 화자를 보존시키는 일과 이어져 있"는데 왜냐하면 근대소설에는 <작가(화자)>가 중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에크리튀르의 영도(零度)>, 즉 중립적인 글쓰기를 실현하는 것이고 "<다>라는 종결 어미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반면에 "<다>를 거부하는 사생문은 화자를 회복"시키고 실제로 소세키의 소설에는 항상 화자가 존재한다. 소세키에게 사생문이란, 말하자면 어른이 아이를 보는 태도였고, 그는 "사생문의 본질을 세상에 대한 <심적 태도>에 근거해서"(233) 판단하고 있었다.


 고진은 소세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비인정(非人情)이라는 말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인정>(낭만파)도, <몰인정>(자연파)도" 아닌 것이다. (논리적인 비약으로밖에 볼 수 없지만) 고진은 이 비인정을 유머라고 말하고 있다. "유머는 화자 없이는, 즉 소세키가 말하는 <작가의 심적 태도> 없이는 나오지 않는 것"이고 결국 유머는 사생문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에서 시작된 글이 사생문이라는 어떤 서술기법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 이유는 결국 소세키가 "사생문을 <소설>로 향하는 싹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설>에 반하는 것으로 자각하고 있었"(234)기 때문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사생문은 장르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다."(235)


 "장르의 소멸" 마지막 네 페이지는 사생문에서 파생된 유머(비인정)와 관련하여 바흐친과 프로이트의 이론을 말하고 있으나, 정신분석이나 신경증, 초자아 등에 대한 개념의 부재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문장을 뜯어가며 이해하기를 시도했으나 예약해둔 세 시간이 훌쩍 날아가버려 그만...)


 80년에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쓸 당시에만 해도 스스로 자신의 비평이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자신이 어떤 지점(네이션 혹은 세계화와 관련한 비평)으로 향하고 있는지 인식한 후에 다시 본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는 이미 그 지점에 대한 내용이 책속에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장르의 소멸" 챕터 뒤에 나오는 각종 후기 및 부치는 말은 주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쓴 글이다. 그러므로 그 글들에는 자신이 비평하는 지점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 대한 재해석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후기들을 보며 소세키가 영국에 가서 느꼈던 영문학에 대한 이질감과 유사한 종류의 이질감을 느꼈다.


 88년 문고판에 부친 글 중에는 다음과 같은 단락이 있다. "1980년대에 일본의 <근대 문학>은 결정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것은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내면>, <의미>, <작가 주체>, <깊이> 같은 관념들이 부정되고, 그들에 종속되어 있던 <언어>가 해방되었음을 뜻한다. 말을 바꾸면 근대 문학이 배척했던 장르들, 즉 <언어 유희>, <패스티시>, <로망스(SF를 포함한다), <새타이어>가 복권되었다는 것이다."(244) 몇 년 전에 가라타니 고진이 발표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글의 본질은 이미 88년에 완성된 것이다. 그가 문학 비평을 더이상 할 수 없는 이유는 발췌한 단락에 다 나와 있다. 현재의 (복권된) 문학으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비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학의 종언"이 현재까지도 논쟁적인 이유는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의 저자로서보다는 (네이션) 비평가로서 더욱 이름을 알렸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모종의 이질감을 느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옮긴이 후기를 보면 이런 가정을 더욱 확신할 수밖에 없다. 옮긴이는 가라타니 고진이 기왕 썼던 비평에 대한 인식을 지닌 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 대해서 후기를 적고 있다. 책 자체의 내용보다는 책 이후에 가라타니 고진이 행한 비평에 초점을 맞춰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었다. 막상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쓸 당시에는 그런 인식이 부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옮긴이에게도, 가라타니 고진에게도, 이 책은 이미 전도(은폐)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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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 단편집 지만지 고전선집 128
모리 오가이 지음, 손순옥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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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28]


손순옥이 번역하여 지만지고전천줄에서 나온 <모리 오가이 단편집> 중 <무희>와 <마리 이야기>와 <아씨의 편지>를 읽었다. 모리 오가이의 소설을 읽게 된 첫 번째 계기는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내면의 발견"에서 언문일치와 관련된 작품으로 다뤄지기 때문이고, 두 번째 계기는 역시 같은 책 중 "구성력에 대해서"에서 쓰보우치 쇼요와의 논쟁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언급되기 때문이다. 모리 오가이의 초기작들과, 역사소설로 거칠게 분류되는 후기작들 사이에 '이상'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몰' 되는가에 대해 "깊이"를 가지고 볼 생각.

오늘 읽은 세 편의 단편은 모두 그의 초기작이다. 모리 오가이가 독일에서의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화자는 모두 (대략) 젊은 남자지만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사람은 소녀라고도 불렸다가 아가씨라고도 불리는 10대 중후반의 (아마도) 독일 여자다. 세 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화자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도 대체로 외국인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너무나도 일본적인 이유는 작가가 일본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독일 여자들의 내면에서 (당시) 일본 여자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특유의 애절한 정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일본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름만 외국인(독일인)이고 실제로는 일본인이라는 얘기다.

이 세 편의 소설은 모리 오가이의 초기 삼부작이라고 불리는데 역자 손순옥에 따르면 "초기 삼부작에서는, 개인의 진정한 사랑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당시의 일본 남성이나 또는 잘못된 사회제도 및 관습 등을, 외국 여성이긴 하지만 하나같이 여주인공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10p)고 한다. (이것을 고진이 말하는 '이상'이라고 봐도 괜찮을까.) 작가가 그런 것들을 지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주인공들이 일본인의 심성을 지녔음에도 외국인의 가면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바꿔 말해서 그런 것들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런 장치를 쓴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모리 오가이가 독일에서 정말로 경험한 것은 독일의 풍경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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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1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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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02]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아동의 발견"과 히구치 이치요의 <해질무렵 무라사키> 중 "키재기"를 읽었다.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을 함께 읽기로 한 이유는 "아동의 발견" 말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변에서 아이를 위해 씌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표현된 훌륭한 작품을 찾아볼 수가 있다.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이다. 그녀가 쓴 것은 이른바 청년기가 아니라 아이가 그 상태대로 작은 어른인 것 같은 세계에 침투하는 하나의 균열, 즉 얼마 안 가 과도기로 현재화(顯在化)할 청년기의 징후였다. 히구치 이치요야 말로 아이 시대에 대해 쓰면서도 <유년기>나 <동심>이라는 전도를 벗어난 유일한 작가였다."(177)

 "아동의 발견"에서 말하고자 하는 골자는 아동이라는 존재가 개념으로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고진은 그런 발견(혹은 왜곡)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어떤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저 발견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아동 문학사가들은 일본에서 <진정한 근대 아동 문학>이 탄생한 것은 오가와 미메이 무렵이라는 데 거의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151)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그러나 곧 오가와 미메이의 아동이 "<현실의 어린이> 쪽에서 보면 전도된 관념일 뿐"이라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런 주장들이 아동의 전도성을 비판하기만 할 뿐 그 전도의 성질을 밝혀주지 않는다며, 역설적이지만 그런 주장들이 오히려 아동의 전도성을 은폐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현실의 어린이> 또는 <진정한 어린이>라는 개념이 실제 아이들과는 무관하게 만들어져버린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는 어른으로부터 (개념상) 분리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분리가 가능하게 된 이유는 청춘기라는 개념과 함께 성숙이라는 관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어른은 그냥 단순히 한 쪽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게 구조적으로 연관되어"(168)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숙이라는 문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어른으로부터 격리된 유년기가 성숙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성숙을 지향하기 때문에 미성숙한 것"(171)이라고 고진은 말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들 가지고 있는 성숙이라는 관념은, 그러나 실은 판타지에 가까운 것이다.

 성장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도, 실제로 그 소설들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성장(혹은 성숙)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기에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성장소설 속 아이들은 어떤 사건 사고들을 거치면서 문득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것들을 정말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성장을 위해서 미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성장이라는 개념 없이 성장해버린 (성장)소설처럼 보여 흥미롭다.)

 우리는 아동을 알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아동 심리학이나 아동 문학을 공부하지만 그런 것들이 <진정한 아이>에 대해 밝혀주지는 않는다.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분리된 것으로서의 <아이>야말로 아동 심리학이나 아동 문학의 비밀을 쥐고 있는 것이다."(171) 그건 비교하자면 푸코가 말하는 광인과 심리학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다. "17세기 후반 광인이 <광인>으로 격리된 이후에 비로소 심리학(정신 병리학)이 존재했으니 심리학이 <광기>를 해명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광인이야말로 그러한 존재 방식을 통해 심리학의 비밀을 쥐고 있다"(170)는 얘기가 된다. 사실 아동 문학으로 읽히는 동화나 옛날 이야기가 실제로 아이를 위해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다시 씌여진다고 한들 그런 것들 속에서는 여전히 잔혹함이나 부조리가 남아 있는 것이다.

 고진은 아동의 기원, 즉 아동이 발견되면서(혹은 발견되기 위해) 은폐된 것들에 대해 따져보다가 결국 두 가지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까 "학제 반포"와 "징병령 반포"가 그것이다. "공장은 <학교>이고, 군대도 <학교>이며, 거꾸로 말하면 근대적 학교제도 그 자체가 그러한 <공장>이다. (...) 근대 국가는 그 자체가 <인간을 다시 만들어내는 하나의 교육 장치>인 것이다. (...) 양심적이고 휴머니스틱한 교육자, 아동 문학인들은 메이지 이래의 교육 내용을 비판하고 <진정한 아이>, <진정한 인간>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근대 국가 제도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175,176)이라고 말하고 있다.

 근대문학이 일본에서 정착되기 이전에 씌어진 소설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히구치 이치요의 <키재기>에는 "아동의 발견"에서 말하는 그런 "발견된 아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저 "작은 어른"들만이 등장할 뿐이다. 아동과 어른이라는 개념의 분리가 자명한 사실처럼 우리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이 소설의 해설에는 "천진한 아이의 경계를 넘는 것조차 모른 채 어른이 되간다"(195)는 식으로 아이와 어른을 굳이 경계지어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경계를 넘는 것조차 모른"다는 말은 사실 그 경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더불어 <키재기>에서는 고진이 밝히고 있는 '발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풍경이라든지, 내면 또는 고백과 같은 그런 것들. 심지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구성력에 대해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상"이나 "이야기" 같은 것들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게 때문에, 아니 그러거나 말거나, 이 소설은 참 좋다. 대단히 추상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뭔가 흐르는 물 같으면서도 단단한 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참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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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1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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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08)

하루 종일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읽었다. 제목에는 물론 '일본'이라는 말이 들어가지만, 그리고 책 속에 나오는 작가들은 전부 일본 작가이지만, 결국 이 책은 '근대문학의 기원'을 살펴보는 책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근대문학의 기원을 살피는 일은 곧 근대문학의 종언을 증명하는 일이었으니 저자가 이 책에서 많이 표현한 단어를 빌려와 쓰자면, 이 책은 결국 전도(顚倒)된 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문학은 19세기에 확립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그런 관념이 오랜 시간에 거쳐 정립되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메이지 20년을 전후로 하여 급속도로 정착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 압축된 시간을 살펴봄으로써 근대(일본)문학의 기원을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자신의 강의 노트를 <문학론>으로 간행한 것은 런던에서 귀국한 지 3년밖에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17) 서론을 제외한, 이 책의 첫 문장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영문학을 공부하러 건너간 영국에서, 유럽에서 말하는 문학이라는 관념에 모종의 거부감(혹은 이질감)을 느꼈다. 소세키가 자라면서 내면화된 문학은 일본 내의 문학, 즉 한문학에서 발생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들어와 그런 거부감/이질감을 유지한 채 소설을 쓴다. 이 책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 후, 풍경(회화)에 대한 설명, 내면(언문일치)에 대한 설명, 고백(기독교)에 대한 설명, 병(메타포)에 대한 설명, 아동에 대한 설명, 구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발견되어 제도화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그것이 곧 근대일본문학의 기원을 밝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작업의 과정을 읽는 일은 개인적으론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나 분야들을 수시로 끌어들여 그 과정을 밝히고 있었으니까. 이 책을 끝까지 봐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도 숱하게 했다.

결론적으로, 끝까지 참고 읽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각종 후기를 제외한, 실질적으로 마지막 챕터인 "장르의 소멸"에서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를 다시 소환한다. 일본 문학 내에서, 혹은 우리나라 일문학과에서 배우는 나쓰메 소세키가 문학적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이 장에서 말하는 소세키는 근대문학과 거리가 있는 작가였다. "소세키는 사생문을 <소설>로 향하는 싹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설>에 반하는 것으로 자각하고 있었"(234)고, 그에게 "사생문이란 <문>의 해방, 장르의 해방을 의미하"(231)는 것이었다. 결국 이 장의 제목인 "장르의 소멸"은 나쓰메 소세키를 빌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소설의 소멸이라는 의미였고, 이후에 고진 스스로도 밝혔듯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전도적으로 예언하는 글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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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를 권함 - 2004년 2월 이 달의 책 선정 (간행물윤리위원회)
야마무라 오사무 지음, 송태욱 옮김 / 샨티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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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3/31]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 나와 알게 된 책이다. 아니, 실은 히라노 게이치로가 이 책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섯 개의 에세이가 담겨 있다. 따로 쓴 글들을 모아서 묶은 책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내기 위해서 쓴 글이었다. 짐짓 공손한 체하며 다치바나 다카시를 까는 듯한 구절이 제법 보인다. 이를테면 "세상에는 천히 읽을 수 없는, 천천히 하는 독서를 견딜 수 없는 책이 있다는 것인가. 물론 그런 책이 있다. 그러나 그런 책은 바로, 결코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다(24p)"라고 쓰고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의견과는 반대된다는 식으로. 

  이 책을 쓴 저자의 목적은 뚜렷하다. 바로 천천히 읽자는 것. 그렇다고 그것이 "한가로이 느긋하게 읽는 것은 아니다. 저속으로 비행한다고 해서 조종사가 한가하게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어쩌면 고속의 비행보다 오히려 집중력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느릿느릿 읽지만 사실은 자신의 의지를 다잡고 있다. 정신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170p)"이라고 한다. 물론 사람마도 읽는 속도가 다를 것이다. 상대적으로 조금 느릴 수도, 혹은 빠를 수도 있지만 "기분 좋게 읽는 리듬을 타고 있을 때, 그 읽기는 읽는 사람 심신의 리듬이나 행복감과 호응한다. 독서란 책과 심신의 조화(38p)"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가 천천히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결국 독서의 소중함, 책읽기의 행복함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이다. 자고 일어나면 수만 개의 정보가 쏟아져나오는, 그야말로 정보의 쓰나미 시대에, 역자의 말처럼 "요즘에는 책을 읽는 시간 자체가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책에서 전혀 정보를 얻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 혼자 있는 시간 자체가 소중(182p)"하다는 걸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한테는 그것이 기쁘다. 바로 지금도 책을 들고 있다. 그 책을 읽고 있다. 그런 생각이 솟아난다. 기쁠 때는 웬일인지 시간도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것 같다. 현실에서는 아주 짧은 한순간이어도 시간은 한없이 피어오르고 펼쳐지며 충만해지는, 그런 기분에 휩싸인다. 그것이 정말 기쁘다. // 젊었을 적에는 독서를 하면서 그러한 감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 더 성급했었다.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어떤 책에 감동한 적은 있었어도 독서 자체에 감동하는 일은 없었다. 시간은 피어오르고 펼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지금은 확실히 독서의 감각이 달라졌다. 체감으로 알 수 있다. 언제쯤부터 알았을까, 그것도 알고 있다. // 바로 천천히 읽게 되고 나서의 일이다.(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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