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반복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09.05.21]


I - 1

오에 겐자부로에 이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말면서도 고진은 '고유명'에 대한 언급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오에 겐자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는 공히 고유명이 없지만 그 둘은 전혀 다른 의미라고. <만엔원년의 풋볼>에서는 그것이 타입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1973년의 핀볼>에서는 그것이 그저 차이를 구별해주는 시차적 기호밖에 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고진은 소쉬르의 언어학에 관해 잠시 들먹이더니 잽싸게 칸트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1973년의 핀볼>에서 '나'가 열심히 탐독하고 있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인식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는 모든 판단을 취미, 그러므로 '독단과 편견'에 지나지 않다고 간주하는 어떤 초월론적 주관"(143)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이 매우 사적인 인상이 강함에도 사소설(경험적 주관에 의한 소설로 봄)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약하자면, "오에 겐자부로의 '나'가 언어의 알레고리적 횡단이나 어긋남을 가져오는 장치인 데 대해, 무라카미의 작품에서 언어는 이런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항상 통제되고 있다."(143)

I - 2.

이 장에서 등장하는 소설은 고진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풍경의 발견"에서 논했던 구니키다 돗포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풍경을 풍경으로서 발견하는 것은 역으로 외적인 풍경을 거부하는 '내적인 인간'"(144,145)이며, "여기에 '근본적인 도착'이 숨어있다"(145)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하루키가 발견한 것도 이런 종류의 '풍경'. 이를테면 '발자크 소설에 나오는 수달'이나 '클로드 룰루슈의 영화에서 자주 내리는 비'과 같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고유명의 범람. 이를 통해 독자는, 어떤 의미 내지는 해석과는 무관한, 그저 당대의 세련된 풍경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고유명의 범람을 통해 하루키는 근대문학에 있었던 것과 같은 형태의 전도를 만들어 낸다.

I - 3.

하루키의 <양을 둘러싼 모험>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의 발췌문이 인용된다. "무의미한 것을 유의미한 것 위에 놓는 가치전도"(147)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특히 하루키 작품에 범람하는 숫자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 숫자를 반복적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사건의 임의성, 넓게 보아 세계의 임의성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고 고진은 보고 있다). 더불어 구체적인 날짜. 대개의 작가는 "날짜를 생략함으로써 작품을 '일반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데 반해 하루키는 "특정 날짜 속에 작품을 위치"(150)시킨다. 그건 역사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역사성을 공무화(空無化)하고자 함이다. 하루키가 특정 날짜, 그러니까 고유명을 남용하는 이유는 반대로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이다. 숫자의 남용도 마찬가지.

I - 4.

고진은 고유명이 역사성(또는 정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결국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이르게 된다. 이런 날짜의 과잉은 "'역사의 종언'"을 주장"(151)하고 있는 것이라고. <1973년의 핀볼>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보통의 고유명사는 (<상실의 시대>에서도 다시 등장하는 이름을 가진) 나오코. 하지만 '나'가 사랑하는 것은 나오코가 아니라 1970년에 처음 만난 핀볼머신이다. '나'는 핀볼머신에 대해 탐색한다. "이 탐색은 대상이 플레이(놀이) 기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진지하게 이루어진다."(152) 이것은 아이러니다. 하르트만의 <독일관념론의 철학>에 따르면, "아이러니에서는 모든 것이 장난임과 동시에 진지함이고, 모든 것이 마음 밑바닥부터 숨김없이 드러나 있음과 동시에 깊숙이 숨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루키는 이런 아이러니를 통해 "모든 피한정성을 넘어서는 초월론적 자기"(153)를 확보하게 된다. '나'는 핀볼머신과 대화하지만 그 대화는 결국 자기독백으로 귀결된다. 이를 통해 "'나'가 고집하고 있는 것은 어떤 한정도 받아들이지 않는 임의성의 세계"(154)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결국 이런 "독아론적 세계가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 자명한(base)가 된 것이다."(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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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 안드리치 단편집 - 지만지고전천출 34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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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09.05.16]


 번역자인 김지향은 <이보 안드리치 단편집>이라는 제목 아래 작가의 단편들을 묶으면서 "그(*이보 안드리치)의 문학적 사유와 정신적 교감의 틀을 만들었던 유년기 안드리치의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은 오래된 추억의 창고, 보물 상자를 열어보는 것만큼 설레고 흥분된 일일 것"(11)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보스니아라는 나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보통의 한국 독자라면 그의 기억을 더듬는 것이 그다지 설레고 흥분된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편집에서, 더불어 작가에게 있어 유년기의 보스니아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비록 이 책이 보스니아의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수월하게끔 편집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몇 가지 대표적인 나무만 가지고 숲 전체를 아우를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1961년 '조국의 역사와 관련된 인간의 운명을 철저히 파헤치는 서사적 필력'이라는 평가로 안드리치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드리나 강의 다리>를 먼저 읽어보았다. 기왕 보는 작가, 숲의 윤곽이나마 파악하고 싶어서.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 바로 이 드리나 강변의 소도시 비셰그라드였다. 드리나 강의 다리가 작가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점은 이 소설을 읽어보면, 아니, 이런 소설을 썼다는 그 자체로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보 안드리치 단편집>과 <드리나 강의 다리>를 읽고 나서 알게 된 점은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외세의 부침에 많이 시달렸다는 사실과 작가의 서사전개 방식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소설 작법 스타일. 장편에서도 그랬거니와 단편집에서도, 작가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 혹은 주제를 돋보이게끔 하려는 구성적 의지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소설이라는 장르로 분류될 이 단편들이 내게는 에세이처럼,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쓴다는 점에서 회고담처럼 느껴졌다. 파노라마라는 물건을 축으로 자신이 어린 시절 만난 사람들과 겪었던 일들을 꿈과 현실로 교묘하게 중첩시킨 <파노라마>와, 동물을 의인화하여 우화적으로 써낸(그러나 실은 이 작품만이 거의 유일하게 소설처럼 느껴졌던) <아스카와 늑대>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작품들이 그랬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작가가 글을 쓰면서 특히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문장을 통해 직접 독자에게 알려주고 있으니까. "회상ㅡ때때로, 그리고 누군가의 회상ㅡ은 움직이는 커다란 힘을 가질 수있다.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동안, 그것들은 망각 속에 누워서 빛도 발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썩어갈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느 순간 누군가의 생생하고 힘 있는 기억으로 움직일 때, 그다음에는 끝까지 갈 필요가있다. 모든 것을 모든 면에서 밝힐 필요가 있고, 사실 그대로 있었던 그대로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만약 필요하다면 보충할 필요도 있다."(87-88)


 자신이 사는 곳에서 했던 서커스 공연을 보며 느꼈던 감정들과 그 후 서커스 단원들과 연관된 어떤 사건에 대해 쓴 <서커스>, 유태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그 후 느꼈던 괴로움과 수치에 대해 쓴 <아이들>, 친구의 나쁜 짓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발생한 미묘한 죄책감과, 납득할 수 없었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매질에 대해 쓴 <창(窓)>, 탑에서 놀며 느꼈던 공포감과, 그곳에서 만난 소녀에 대해 쓴 <탑>,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실수로 손상시키고 그로 인해 겪은 괴로움에 대해 쓴 <책>까지. 거의 모든 단편들이 집착에 가까울 만큼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얼마나 수도 없이 당시나 그 이후에도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던가. 그렇지만 결코 나는 해답을 얻지 못했다."(106) 작가는 어쩌면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아니면 그 해답을 구할 수 없어서 어린 시절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답하려고 했던 걸까. 소설의 내용을 봐도, 보스니아의 역사를 보더라도, 심지어 다음과 같은 글을 접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우리가 '어린이'라고 부르는 작은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 현명하고 성숙한 사람들이 되고 난 뒤에는 잊게 되는 자기들만의 커다란 아픔과 기나긴 고통을 가지고 있다."(108) 아니면 <책> 서두에 인용한 다음과 같은 글. "또다시 스스로 묻는다네. 왜 어린 시절은 그렇게 불행한 것일까?"(134)


 하지만 작가는 결국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말로도 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바로 그런 생생한 단편적인 광경이 때때로 나타나기도 하고 기억 한편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133)다고 믿었으니까. 사진은 사진이고, 세상은 세상이므로 "그 몇 개 안 되는 사진들의 죽은 풍경과 지역들은 아무것도"(40) 되살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작가 자신의 파노라마로부터 펼쳐지는 세상의 많은 그림들이 빠르게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져버리는 걸 막기 위해서, 혹은 "영원히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려는 불가피한 한순간을"(71) 그려내기 위해서, 고통스러웠고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그에게는 어린 시절이 소중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ps1.

 단편집 첫 수록 글인 <나는 어떻게 책과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는가?>는 같은 역자가 번역한 <드리나 강의 다리> 해설에는 <어떻게 내가 문학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을까>로 번역되어 있다. '문학'에 대해 말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책'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급하게 청탁을 받아서 휘리릭 써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운 글이었다.


ps2.
 
 단편집을 읽으면서 계속 히구치 이치요가 생각났다. 이 둘은 소설 스타일도 다르고 주제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고 사용 언어도 다르고 활동 시기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떠오른 이유는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몰이상(沒理想)적이라는 점에서 둘이 유사했기 때문에. 다른 이유가 또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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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반복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09.05.13]


가라타니 고진는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 특히 <만엔원년의 풋볼>에 대해 말하면서 우선 그의 소설에는 고유명이 없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엄밀히 말해서 고유명이 없다기 보다는 등장인물이 어떤 타입명을 가진다는 얘기. 그러니까 형인 미쓰(密)는 내향적이고 비행동적인 타입의 이름이고 동생인 다카(鷹)는 폭력적이고 행동적인 타입의 이름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작품인 <죽은 자의 사치>에도 타입명이 나오는데, 그건 사르트르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조금은 심각하면서도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자는 대자존재이고 죽은 자는 즉자존재(사물)이다. 대자존재는 항상 무엇인 바로 그것이 아니라, 무엇이 아닌 바로 그것인 존재형태"이며 그러므로 대자존재란 본래 이름이 없고 이름은 그저 "타자에 의해 강제로 대자존재를 사물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107) 결국 고유명을 가진다는 말은 대자존재인 사람을 사물화한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흔한 이름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근대문학의 특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타입명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소설 이전에는 일반적이었다. 18세기 영국소설을 중심으로 <소설의 발생>을 얘기한 이안 와트는 그것을 유명론적 경향과 결부시키고 있다. "유명론(nominalism)이란 보편 또는 개념이 실체라는 실재론(realism)에 대해, 개물(개체)만이 실체이고 개념은 그로부터 추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고"이고 그것은 결국 "문학에서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것(*유명론)은 철학상의 리얼리즘(*실재론)을 부정함으로써 태어난 것"(107)이라고 할 수 있다.


"흔한 고유명은 개체individual를 보여준다."(109) 근대리얼리즘에 있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개(個)가 항상 어떤 일반성(보편성)을 상징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가라타니 고진에게 있어서 근대문학 전반의 구조를 의미한다. "근대문학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을 '상징'한다고 하는 하나의 신념인 것이다."(110) 이러한 사실은 발터 벤야민이 <독일비극의 기원>에서 괴테가 한 다음의 말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이 보편적인 것을 위해 특수한 것을 구하는가, 혹은 특수한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보는가는 대단히 다르다. 전자로부터는 우의(알레고리)가 생겨나고, 그 경우 특수한 것은 보편적인 것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후자 쪽은 본래 문학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거나 지시하는 것 없이 특수한 것을 표현한다. 이 특수한 것을 생상하게 파악한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ㅡ또는 나중에야 비로소 아는 것이지만ㅡ보편적인 것을 동시에 손에 넣는 것이다."(109-110)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인지) 근대에서는 알레고리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다. 말하자면 "'보편을 생각하고 지시하고 있는' 타입의 작품"(110), 즉 우의적인 작품은 문학 비평에서 평판이 나쁠 수밖에 없고 타입명을 사용하여 이미 그 속에 보편을 담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오에 겐자부로 역시 비평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 위 글을 인용하며 <독일비극의 기원>에서 주목한 점은 근대에 폄하되어온 알레고리의 의의이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의 관심은 "상징적 사고의 자명성이 확립한 후(*일본근대문학의 시기)에만 출현하는 알레고리적 작가(*오에 겐자부로)에 있다."(111)


상징적 소설에서, 특수한 것이 일반적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소설에서의 고유명이란 그것 자체의 고유한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전에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개(個)에 붙여진 임의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근대 리얼리즘은 "고유명을 이용하면서도 실은 고유명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111) 이런 고유명은 역사적인 사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왜냐하면 "사실로서의 개체로 이루어진 역사라는 사고에는 그것이 일반성과 연결된다는 암묵적인 신념이 전제"(113)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112)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역사가도, 근대소설가도, 거기에서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미 그 사건 속에서는 "일반성으로 해소되는 것을 거부하는 단독성(특이성)singularity이 결여되어 있다."(113) 그것은 이미 그 속에 어떤 알레고리적 의미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일회적인 사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113)


모든 역사 속에는 고유명(사건)이 존재한다. 이런 사실에서 알레고리적인 작가가 집착하는 것은 상징적인 사고를 통해 일반화(또는 반복)되지 않는 그 사건의 일회성+특이성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보편적인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이런 일회성+특이성으로 인해 그 작품은 되려 비역사적으로 보이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인 다니엘 디포는 화자에 지명이나 특정 연호를 부여함으로써 그 작품을 더욱 리얼하게 만들고 있다. "디포는 이런 '세부'의 집적이 리얼리티를 낳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113)고 그것은 곧 "신은 세부에 머문다"는 사고, 즉 명확히 상징적인 사고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고유명은 지시작용 이외에 다른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본 하이쿠 작가인 마츠오 바쇼의 사실성은 근대리얼리즘에서의 사실성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그는 어떤 개물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다른 풍경이나 역사나 그밖의 것들을 연결하고 있다. 어떤 것을 말하며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실성은 알레고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상징적인 사고에서는 어떤 표현이 끊임없이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부정"(114)되며 그 고유명은 단지 어떤 개물을 지시하는 기호로 간주될 뿐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거부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고유명이다.


"<만엔원년의 풋볼>에서 구체적인 지명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114) 고작해야, 지방도시라든지 시코쿠(四國)이라는 공간적 특징 정도. "이러한 지명의 배제는 작품을 알레고리적인 것으로 만"(115)드는데, 즉 '골짜기마을'이 지명 그 자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의 우주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현재의 시점과 백 년 전의 시점이 겹쳐지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특정한 시점을 넘어서는 초역사적인 구조가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얼핏 이런 구조는 "마이크로코스모스와 매크로코스모스 사이에 동심원적 조응이 존재하는 것처럼"(115,116) 보이게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만엔원년의 풋볼>이 알레고적이라고 한 이유는 골짜기마을(마이크로코스모스)와 우주(매크로코스모스) 사이의 어긋남, 혹은 현재와 백 년 전 사이의 불일치 때문이다. 그런 어긋남 혹은 불일치를 통해, 즉 일회성+특수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만엔원년의 풋볼>은 무엇보다도 '역사'를 포착하려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에 겐자부로가 '1960년 6월의 정치행동'이라는 특정한 사건을 알레고리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에는 특정한 시점을 지시하는 기호로서의 고유명을 배제함으로써 시공(時空)의 특정성에서 벗어나 있기도 하지만("'1960'년이라는 특정 시점은 '만엔원년(1860년)과 겹치고, 또 '1945년'과 겹침으로 그 특정성(고유성)을 박탈당한다"(118)) 동시에 그것을 고집한기도 한다. 이런 양의성을 통해 오에 겐자부로가 고유명을 진정으로 집착하는 동시에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가라타니 고진이 "그를 알레고리적인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이다."(118)


본 글에 앞서 가라타니 고진은 서력과 연호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서력으로 '1960년'이라고 말하면, 이 해는 세계적인 신좌익 운동의 발단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지만, '쇼와 35년'이라고 하면 메이지 이래의 모든 문제를 집약하는 결절점(結節点)으로 드러나게"(119)되는 것이다. '1960년 6월'에서 출발한 다카시가 아메리카에서 시코쿠 골짜기마을로 귀환하며 '만엔'과 메이지'라는 연호의 세계를 살아가기 시작하는 건 그러므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만엔원년'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백 년 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945년'이나 '1960년'이라는 단어가 지정하는 담론공간('피폭'이나 '신좌익'으로 '상징'되는 공간)이 배제해온 공간, 그러나 여전히 존속하는 공간(이를테면 '쇼와 20년' 혹은 '쇼와 35년'의 공간)에 사람을 이행시키는 기능을 한다."(119,120) 오에 겐자부로는 고유명을 사용함으로써 동시에 고유명(이 전제적으로 상징하는 것)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오에 겐자부로가 '나'라는 화자를 사용한고 그것이 오에에게 고유명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만엔원년의 풋볼>에서 '나'는 작품 기저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감' 그 자체이다. 작가 자신에 가까우면서 동시에 "시대의 풍속을 체현하는 화자"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나'가 "특정한 개체이면서 끝없이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처럼 어긋나며 중층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나'라고 쓰든 '그'라고 쓰든 그것으로 자동적으로 일반성과 연결되어버리는 근대소설의 구조와는 이질적"(121)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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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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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14]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주인공은 없다. 엄밀히 말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드리나 강 위에 세워진 다리다. 터키 제국 시대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400여 년 동안 그 다리를 건넜고 그 다리 주위에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팩션'이나 '역사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개념을 배반한다. 구성적으로도 단순히 에피소딕하거나, 피카레스크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11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석조 다리(*드리나 강의 다리)가 이야기 구성의 구심점을 역할"(481)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다. 이 소설은 대단히 잘 읽히는 문장임에도, 위와 같은 구성상의 이유로 그리 녹록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학교 국어(혹은 문학) 수업 시간에 뻔질나게 배우는 소설의 구성(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위적인 수법인지, 사실 그것은 (오직) 소설의 재미나 감동과 관련된 문제이지 소설의 작법이나 소설의 가치와는 대단히 무관하다는 사실을 <드리나 강의 다리>를 읽고 있는 동안 또한 알 수 있다. 소설은 아쉽게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61년 '조국의 역사와 관련된 인간의 운명을 철저히 파헤치는 서사적 필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480) 작가 이보 안드리치가 노벨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스웨덴 한림원의 저 평가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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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 54
에프라임 키숀 지음, 이용숙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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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05]


 에프라임 키숀이 쓰고 이용숙이 옮겨 마음산책에서 출간된 <행운아 54>를 보았다. 제목에 소설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54살 먹은 약간은 찌질한 보통의 중년 남자가 우연한 기회에, 번역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괴한 방식으로" 대박(행운)을 맞는 사건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 이 소설의 전반부를 볼 때만 해도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키득키득 웃겨서 이런 유머가 끝까지 유지된다면 동네방네 이 책을 추천하고 다닐 테야, 즐거운 마음으로 상상했으나 오늘 본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머의 세기가 약해서 아쉬웠다. 그리하여 소설가 김종광이 책 뒤표지에 쓴 추천글, "그대가 일상에 지쳐 잠시나마 꿈꿔보던 바로 그것! 의뭉스러운 작가가 큰 웃음판을 벌여놓고 대중심리와 미디어산업을 강력히 풍자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스트레스를 확 풀어줄 한바탕 해소였으니까. 주의 사항! 이 소설을 공공장소에서 읽지 말라. 배꼽빠진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조금 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 에프라임 키숀이 구사하는 유머는 언어유희라기보다는 대체로 어떤 상황에 대한 역설적인 장난이다. 그러므로 재미있는 부분을 발췌해봤자 소설 맥락을 모르고 보면 단순히 진지한 이야기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게, 유머는 설명하는 순간 사라져버리니까. 이 소설을 보며 떠오른 다른 소설은 하진의 단편 "호랑이 싸움꾼은 찾기 힘들다"이고, 떠오른 다른 작가는 커트 보네거트. 자, 어쨌거나 이제 에프라임 키숀을 맛봤으니 그의 다른 책들을 찾아 봐야지.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번역되지 않은 그의 다른 책들도 꾸준히 출간해줬으면 좋겠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별로 두꺼운 책도 아니고 그닥 꼼꼼히 보지도 않았는데 오탈자가 좀(서너 개 정도?) 눈에 띄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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