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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반복 ㅣ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09.05.13]
가라타니 고진는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 특히 <만엔원년의 풋볼>에 대해 말하면서 우선 그의 소설에는 고유명이 없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엄밀히 말해서 고유명이 없다기 보다는 등장인물이 어떤 타입명을 가진다는 얘기. 그러니까 형인 미쓰(密)는 내향적이고 비행동적인 타입의 이름이고 동생인 다카(鷹)는 폭력적이고 행동적인 타입의 이름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작품인 <죽은 자의 사치>에도 타입명이 나오는데, 그건 사르트르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조금은 심각하면서도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자는 대자존재이고 죽은 자는 즉자존재(사물)이다. 대자존재는 항상 무엇인 바로 그것이 아니라, 무엇이 아닌 바로 그것인 존재형태"이며 그러므로 대자존재란 본래 이름이 없고 이름은 그저 "타자에 의해 강제로 대자존재를 사물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107) 결국 고유명을 가진다는 말은 대자존재인 사람을 사물화한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흔한 이름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근대문학의 특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타입명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소설 이전에는 일반적이었다. 18세기 영국소설을 중심으로 <소설의 발생>을 얘기한 이안 와트는 그것을 유명론적 경향과 결부시키고 있다. "유명론(nominalism)이란 보편 또는 개념이 실체라는 실재론(realism)에 대해, 개물(개체)만이 실체이고 개념은 그로부터 추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고"이고 그것은 결국 "문학에서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것(*유명론)은 철학상의 리얼리즘(*실재론)을 부정함으로써 태어난 것"(107)이라고 할 수 있다.
"흔한 고유명은 개체individual를 보여준다."(109) 근대리얼리즘에 있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개(個)가 항상 어떤 일반성(보편성)을 상징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가라타니 고진에게 있어서 근대문학 전반의 구조를 의미한다. "근대문학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을 '상징'한다고 하는 하나의 신념인 것이다."(110) 이러한 사실은 발터 벤야민이 <독일비극의 기원>에서 괴테가 한 다음의 말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이 보편적인 것을 위해 특수한 것을 구하는가, 혹은 특수한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보는가는 대단히 다르다. 전자로부터는 우의(알레고리)가 생겨나고, 그 경우 특수한 것은 보편적인 것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후자 쪽은 본래 문학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거나 지시하는 것 없이 특수한 것을 표현한다. 이 특수한 것을 생상하게 파악한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ㅡ또는 나중에야 비로소 아는 것이지만ㅡ보편적인 것을 동시에 손에 넣는 것이다."(109-110)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인지) 근대에서는 알레고리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다. 말하자면 "'보편을 생각하고 지시하고 있는' 타입의 작품"(110), 즉 우의적인 작품은 문학 비평에서 평판이 나쁠 수밖에 없고 타입명을 사용하여 이미 그 속에 보편을 담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오에 겐자부로 역시 비평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 위 글을 인용하며 <독일비극의 기원>에서 주목한 점은 근대에 폄하되어온 알레고리의 의의이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의 관심은 "상징적 사고의 자명성이 확립한 후(*일본근대문학의 시기)에만 출현하는 알레고리적 작가(*오에 겐자부로)에 있다."(111)
상징적 소설에서, 특수한 것이 일반적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소설에서의 고유명이란 그것 자체의 고유한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전에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개(個)에 붙여진 임의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근대 리얼리즘은 "고유명을 이용하면서도 실은 고유명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111) 이런 고유명은 역사적인 사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왜냐하면 "사실로서의 개체로 이루어진 역사라는 사고에는 그것이 일반성과 연결된다는 암묵적인 신념이 전제"(113)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112)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역사가도, 근대소설가도, 거기에서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미 그 사건 속에서는 "일반성으로 해소되는 것을 거부하는 단독성(특이성)singularity이 결여되어 있다."(113) 그것은 이미 그 속에 어떤 알레고리적 의미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일회적인 사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113)
모든 역사 속에는 고유명(사건)이 존재한다. 이런 사실에서 알레고리적인 작가가 집착하는 것은 상징적인 사고를 통해 일반화(또는 반복)되지 않는 그 사건의 일회성+특이성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보편적인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이런 일회성+특이성으로 인해 그 작품은 되려 비역사적으로 보이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인 다니엘 디포는 화자에 지명이나 특정 연호를 부여함으로써 그 작품을 더욱 리얼하게 만들고 있다. "디포는 이런 '세부'의 집적이 리얼리티를 낳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113)고 그것은 곧 "신은 세부에 머문다"는 사고, 즉 명확히 상징적인 사고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고유명은 지시작용 이외에 다른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본 하이쿠 작가인 마츠오 바쇼의 사실성은 근대리얼리즘에서의 사실성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그는 어떤 개물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다른 풍경이나 역사나 그밖의 것들을 연결하고 있다. 어떤 것을 말하며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실성은 알레고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상징적인 사고에서는 어떤 표현이 끊임없이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부정"(114)되며 그 고유명은 단지 어떤 개물을 지시하는 기호로 간주될 뿐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거부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고유명이다.
"<만엔원년의 풋볼>에서 구체적인 지명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114) 고작해야, 지방도시라든지 시코쿠(四國)이라는 공간적 특징 정도. "이러한 지명의 배제는 작품을 알레고리적인 것으로 만"(115)드는데, 즉 '골짜기마을'이 지명 그 자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의 우주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현재의 시점과 백 년 전의 시점이 겹쳐지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특정한 시점을 넘어서는 초역사적인 구조가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얼핏 이런 구조는 "마이크로코스모스와 매크로코스모스 사이에 동심원적 조응이 존재하는 것처럼"(115,116) 보이게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만엔원년의 풋볼>이 알레고적이라고 한 이유는 골짜기마을(마이크로코스모스)와 우주(매크로코스모스) 사이의 어긋남, 혹은 현재와 백 년 전 사이의 불일치 때문이다. 그런 어긋남 혹은 불일치를 통해, 즉 일회성+특수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만엔원년의 풋볼>은 무엇보다도 '역사'를 포착하려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에 겐자부로가 '1960년 6월의 정치행동'이라는 특정한 사건을 알레고리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에는 특정한 시점을 지시하는 기호로서의 고유명을 배제함으로써 시공(時空)의 특정성에서 벗어나 있기도 하지만("'1960'년이라는 특정 시점은 '만엔원년(1860년)과 겹치고, 또 '1945년'과 겹침으로 그 특정성(고유성)을 박탈당한다"(118)) 동시에 그것을 고집한기도 한다. 이런 양의성을 통해 오에 겐자부로가 고유명을 진정으로 집착하는 동시에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가라타니 고진이 "그를 알레고리적인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이다."(118)
본 글에 앞서 가라타니 고진은 서력과 연호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서력으로 '1960년'이라고 말하면, 이 해는 세계적인 신좌익 운동의 발단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지만, '쇼와 35년'이라고 하면 메이지 이래의 모든 문제를 집약하는 결절점(結節点)으로 드러나게"(119)되는 것이다. '1960년 6월'에서 출발한 다카시가 아메리카에서 시코쿠 골짜기마을로 귀환하며 '만엔'과 메이지'라는 연호의 세계를 살아가기 시작하는 건 그러므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만엔원년'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백 년 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945년'이나 '1960년'이라는 단어가 지정하는 담론공간('피폭'이나 '신좌익'으로 '상징'되는 공간)이 배제해온 공간, 그러나 여전히 존속하는 공간(이를테면 '쇼와 20년' 혹은 '쇼와 35년'의 공간)에 사람을 이행시키는 기능을 한다."(119,120) 오에 겐자부로는 고유명을 사용함으로써 동시에 고유명(이 전제적으로 상징하는 것)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오에 겐자부로가 '나'라는 화자를 사용한고 그것이 오에에게 고유명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만엔원년의 풋볼>에서 '나'는 작품 기저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감' 그 자체이다. 작가 자신에 가까우면서 동시에 "시대의 풍속을 체현하는 화자"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나'가 "특정한 개체이면서 끝없이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처럼 어긋나며 중층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나'라고 쓰든 '그'라고 쓰든 그것으로 자동적으로 일반성과 연결되어버리는 근대소설의 구조와는 이질적"(121)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