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1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09.04.02]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아동의 발견"과 히구치 이치요의 <해질무렵 무라사키> 중 "키재기"를 읽었다.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을 함께 읽기로 한 이유는 "아동의 발견" 말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변에서 아이를 위해 씌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표현된 훌륭한 작품을 찾아볼 수가 있다.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이다. 그녀가 쓴 것은 이른바 청년기가 아니라 아이가 그 상태대로 작은 어른인 것 같은 세계에 침투하는 하나의 균열, 즉 얼마 안 가 과도기로 현재화(顯在化)할 청년기의 징후였다. 히구치 이치요야 말로 아이 시대에 대해 쓰면서도 <유년기>나 <동심>이라는 전도를 벗어난 유일한 작가였다."(177)

 "아동의 발견"에서 말하고자 하는 골자는 아동이라는 존재가 개념으로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고진은 그런 발견(혹은 왜곡)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어떤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저 발견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아동 문학사가들은 일본에서 <진정한 근대 아동 문학>이 탄생한 것은 오가와 미메이 무렵이라는 데 거의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151)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그러나 곧 오가와 미메이의 아동이 "<현실의 어린이> 쪽에서 보면 전도된 관념일 뿐"이라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런 주장들이 아동의 전도성을 비판하기만 할 뿐 그 전도의 성질을 밝혀주지 않는다며, 역설적이지만 그런 주장들이 오히려 아동의 전도성을 은폐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현실의 어린이> 또는 <진정한 어린이>라는 개념이 실제 아이들과는 무관하게 만들어져버린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는 어른으로부터 (개념상) 분리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분리가 가능하게 된 이유는 청춘기라는 개념과 함께 성숙이라는 관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어른은 그냥 단순히 한 쪽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게 구조적으로 연관되어"(168)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숙이라는 문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어른으로부터 격리된 유년기가 성숙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성숙을 지향하기 때문에 미성숙한 것"(171)이라고 고진은 말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들 가지고 있는 성숙이라는 관념은, 그러나 실은 판타지에 가까운 것이다.

 성장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도, 실제로 그 소설들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성장(혹은 성숙)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기에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성장소설 속 아이들은 어떤 사건 사고들을 거치면서 문득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것들을 정말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성장을 위해서 미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성장이라는 개념 없이 성장해버린 (성장)소설처럼 보여 흥미롭다.)

 우리는 아동을 알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아동 심리학이나 아동 문학을 공부하지만 그런 것들이 <진정한 아이>에 대해 밝혀주지는 않는다.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분리된 것으로서의 <아이>야말로 아동 심리학이나 아동 문학의 비밀을 쥐고 있는 것이다."(171) 그건 비교하자면 푸코가 말하는 광인과 심리학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다. "17세기 후반 광인이 <광인>으로 격리된 이후에 비로소 심리학(정신 병리학)이 존재했으니 심리학이 <광기>를 해명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광인이야말로 그러한 존재 방식을 통해 심리학의 비밀을 쥐고 있다"(170)는 얘기가 된다. 사실 아동 문학으로 읽히는 동화나 옛날 이야기가 실제로 아이를 위해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다시 씌여진다고 한들 그런 것들 속에서는 여전히 잔혹함이나 부조리가 남아 있는 것이다.

 고진은 아동의 기원, 즉 아동이 발견되면서(혹은 발견되기 위해) 은폐된 것들에 대해 따져보다가 결국 두 가지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까 "학제 반포"와 "징병령 반포"가 그것이다. "공장은 <학교>이고, 군대도 <학교>이며, 거꾸로 말하면 근대적 학교제도 그 자체가 그러한 <공장>이다. (...) 근대 국가는 그 자체가 <인간을 다시 만들어내는 하나의 교육 장치>인 것이다. (...) 양심적이고 휴머니스틱한 교육자, 아동 문학인들은 메이지 이래의 교육 내용을 비판하고 <진정한 아이>, <진정한 인간>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근대 국가 제도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175,176)이라고 말하고 있다.

 근대문학이 일본에서 정착되기 이전에 씌어진 소설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히구치 이치요의 <키재기>에는 "아동의 발견"에서 말하는 그런 "발견된 아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저 "작은 어른"들만이 등장할 뿐이다. 아동과 어른이라는 개념의 분리가 자명한 사실처럼 우리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이 소설의 해설에는 "천진한 아이의 경계를 넘는 것조차 모른 채 어른이 되간다"(195)는 식으로 아이와 어른을 굳이 경계지어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경계를 넘는 것조차 모른"다는 말은 사실 그 경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더불어 <키재기>에서는 고진이 밝히고 있는 '발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풍경이라든지, 내면 또는 고백과 같은 그런 것들. 심지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구성력에 대해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상"이나 "이야기" 같은 것들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게 때문에, 아니 그러거나 말거나, 이 소설은 참 좋다. 대단히 추상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뭔가 흐르는 물 같으면서도 단단한 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참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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