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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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단편(집)을 멀리하게(?) 됐는데 정말 오랜만에 읽어본 매력적인 단편집이었다. 개별 단편들의 매력뿐만 아니라, 단편들이 모여서 책으로 묶였을 때 갖는 에너지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던 책. 소설의 기저에 깔려 있는 볼라뇨의 소설광적인 면모도 좋았고, 무엇보다 볼라뇨가 소설을 쓰는 이유, 혹은 소설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져서 참 좋았다. 언젠가는 잊혀질지도 모를 사람들 추억들을 잊지 않기 위해, 시간이 지나도 그들을 꼭 붙잡기 위해 이런 소설을 썼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설핏 차가워보일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볼라뇨는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동시에. 전반적으로 다 괜찮았지만 특히 "클라라"와 "조안나 실베스트리"는 그중에서도 돋보인 작품이었다. 머리보다는 가슴에 좀 더 와 닿는 그런 작품이었달까. "조안나 실베스트리"를 보고나서 곧바로 <먼 별>에서 그녀가 언급되는 부분을 뒤적여보기도 했고. 볼라뇨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론 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책이라... 아무튼 두고두고 볼 단편집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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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꺼기
톰 매카시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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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매카시의 소설을 한 달 반 만에 다시 읽었다. 아무리 내 기억력이 형편없어도 한 달 반 전에 읽은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강 기억하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 아주 강렬한 자극을 남긴 소설이었으니 잊을 수가 없었겠지. 주인공이 어떤 인물이고,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어떻게 끝을 맺는지 빤히 알고 있는 소설이었다. 그럼에도 소설을 다시 읽어야지 마음먹고 책을 집는 순간 설레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떤 알 수 없는 사건에 의해 특정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이름 없는) (서른 살!) 남자 주인공. 그 사건 덕에 주인공은 5,6층짜리 건물을 두 채나 사들이고도 남아돌 만큼의 사례금을 받게 된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에게 그렇게 큰 사례금을 지급한 집단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 할 법도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손쉽게 장르 문법에 복무할 것 같았던 이야기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자신이 보거나 겪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재연하게 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재연 그리고 재연 또 다시 재연, 오로지 재연. 이것이 이 소설의 처음이요, 중심이며, 끝이다.


주인공은 도대체 왜 일반 사람으로선 납득하기 힘든 그런 일들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일까. 환자인가? (그럴지도.) 하지만 주인공은 뜻밖에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데이비드 심슨의 파티 이후 내 모든 행동의 목적은 한결같았다. 진짜가 되는 것.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지는 것, 우리를 사건의 근간으로부터 몰아내고 핵심에 닿지 못하게 방해하는 우회로를 끊어버리는 것. 그 우회로는 우리 모두를 아류와 이류로 만들었다.”(299쪽)


물론 이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진짜에 대한 집착. 아류와 이류를 만드는 우회로의 차단. 그러나 중반부 이후 주인공이 자신도 모르는 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됐을 때 그를 진찰하러 온 의사는 그가 트라우마의 전형적인 증상을 보인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흔히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으로 체내에서 자생적으로 오피오이드가 분비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몸이 자체 진통제를 처방하는 겁니다. 아주 강력한 진통제죠. 문제는 그 쾌감에 있습니다. 그 강한 쾌감 때문에 신체가 그것을 더 갈망하게 되는 것이죠. 트라우마가 강할수록 진통제도 강하기 때문에 재분비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해집니다.”(250쪽)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은 처음 재연을 할 때 받은 느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몇 초 동안 무중력 상태를 느꼈다. 무중력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무게감이 달랐다. 가벼우면서도 진한 느낌. 내 몸이 힘 하나 들지 않고 공기를 가르며 스르륵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우아하게, 천천히, 물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처럼. 그 기분이 무척 좋았다.”(166쪽)


이후에도 이런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걸 보면, 의사의 말처럼 주인공이 재연을 통해 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게 왜 하필 재연이라는 방식이었을까. 쾌감이야 다른 방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건데, 이를테면 1위 팀 SK에게 5대 1로 지고 있다가 8회 말에 다섯 점을 뽑아 6대 5로 역전해버리는 롯데의 야구를 본다든지... (아직 가시지 않은 어젯밤의 쾌감. 혹시나 아직 못 보신 분들을 위해 클릭)


사실 주인공은 사고로 인해 “오른쪽 몸의 운동 기능을 관장하는 두뇌 부분에 손상을”(24쪽) 입었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동작을 실행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동작의 “속도를 올릴 수도 있게 되었다. (...) 하지만 여전히 각각의 동작들을 생각해야 했고 이해해야 했다. 이해 없이는 행동도 없었다. 사고는 영원한 우회로를 내게 유산으로 남겼다.”(28쪽)


그러던 그는 퇴원 후 <비열한 거리Mean Streets>라는 영화를 보게 되고, 거기서 로버트 드 니로가 얼마나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이 행동하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내 말은 그가 느긋하고 유연하다는 거야. 가장 기본적인 행동도 물 흐르듯 움직이잖아. (...) 먼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어. 자기 자신과 그것들이 하나니까 그것들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지. 완벽해. 진짜야. 내 동작은 모두 가짜야. 아류亞流라고.” 그것은 주인공에게 “멋있고 자시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존재에 관한 문제”(30쪽)였다. 가짜나 아류에 대한 거부, 우회로의 차단, 진짜에 대한 집착. 그와 동시에 발생한 재연에 대한 욕구. 그가 재연을 시도하게 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어떤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역추론(?)을 통해 주인공의 사고나 행동을 도대체 얼마만큼 납득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소리. 그렇다고 굳이 그런 이상한 재연을 할 필요까지는 없는 거잖아.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주인공의 생각이나 행동에 공감할 수 있을까. 설마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는 거라곤 그 어떤 합리를 들이대 봤자 인간이란 존재는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존재, 라는 명백한 사실뿐인가. 그런 점에서 책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말”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저런 이론과 학문을 끌고 와서 소설 속의 주인공을 이해하고자 애쓰지만 결국 깨닫게 되는 건 인간이란 이해할 수 없다는 서글픈 사실뿐이니까. (그럼 도대체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직 리뷰는 끝나지 않았다. 소설 제목에 대한 언급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제목이 ‘찌꺼기’다. 원제는 ‘remainder’. 소설의 내용과 결부시킨다면 (찌꺼기보다는) ‘잉여’나 ‘잔여’의 느낌에 더 가깝지만 출판사 입장에선 소설 제목을 ‘잉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이 백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잉여잉여 열매’(참고 자료 링크)를 먹은 것도 아니니...)


소설의 제목은 소설 속에 일관성 있게 굵은 글자로 표시된 ‘물질’이라는 단어와 연관이 깊다. (소설에선 모든 ‘물질’이라는 단어를 진하게 표시했다.) 다음은 ‘물질’과 관련한 주인공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구절들이다.


“나는 오늘까지 그때 중앙홀에 서서 얼룩이 진 소매를, 그 기름때를 바라보는 내 모습을 사진을 보듯 선명하게 기억한다. 제 주제도 모르고 백만장자에게 경의를 표할 줄도 모르는 너저분하고 성가신 물질. 나를 파멸시키는 주범, 물질.”(23쪽)

“물리의 법칙에 위배되는 기적, 흔들리는 그네를 멈추고 냉장고 문이 걸리고 하늘에 떠 있는 큰 물체를 밑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법칙에 반하는 기적. 그런 기적, 물질을 정복하는 승리가 일어난 줄 알았는데, 그게 전혀 아니었다. 완전한 실패.”(200쪽)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일이 어그러졌다는 것이다. 이건 아니었다. 그렇게나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위장을 한다 술책을 부린다 난리를 쳤건만 물질은 한 수 위였다.”(319쪽)

“그도 배워야 했다. 물질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걸. 그것은 조각들의 흐름, 상처가 난 생체 조직, 세상 최초로 일어난 재난의 흔적이자 그것의 종말을 보증하는 약속어음이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타파하려고 노력하라.”(345쪽)


너저분하며 성가시고 나를 파괴시키지만 결국 한 수 위의 물질을 주인공은 정복하지 못한다. 특히 마지막에 발췌한 구절은 인상적이다.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물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타파하려 노력하라는 지독한 역설.


소설 속에 나오는 모든 물질 ㅡ 이를테면 오토바이 엔진 아래의 땅에 묻은 기름 얼룩이라든지, 파란색 와이퍼 액이라든지, 쓸데 없는 짐이나, 쓰레기, 심지어는 돈마저 ㅡ 은 결국 사라진다. 물질은 그 자체는 진짜일 수 없다. 그것은 가짜다. 하지만 그런 물질이라 하더라도 사라짐으로써 진짜가 될 수 있다. 다음의 구절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방금 눈앞에서 기적을 목격한 것 같았다. 이 2리터의 액체라는 물질이 잉여 물질이나 너저분한 쓰레기가 아니라 물질이 아닌 것, 즉 순수하고 형체가 없는 푸르름으로 변한 것이다. 변질.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랗고 끝이 없었다. 다시 소년을 쳐다봤다. 소년이 더러움을 묻혔기 때문에 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성스러운 상처를 입은 채 널부러진 기독교 순교자 같았다. 나는 사기가 올랐다. 사기가 충천한 데다 영감이 떠올랐다.”(197쪽) (이 구절은 주인공의 운명과 소설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복선이 된다. 소설을 다시 보며 놀라웠던 점은, 소설의 시작 부분부터 복선이 깔려 있다는 점이었다. 짤막한 단어, 사소한 문장, 지나가는 에피소드 등이 모두 이후에 나올 다른 사건에 복선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계획적인 이야기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연적으로 발생한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결국 물질에 대한 주인공의 분노/집착/선망은 앞서 언급했던 진짜에 대한 집착과 맞닿게 된다. 물질의 사라짐 ㅡ 찌꺼기(잉여)에서의 탈피 ㅡ 진짜가 됨. 그리고 진짜가 되기 위해 그가 채택한 방식이 재연이라는 행위였던 것이다. 쓰고 보니 참 간단한 이야기라 아니 할 수 아니 할 수 아니할 수 아니할 수... 


진짜가 되고 싶어 하는 주인공. 주인공은 찌꺼기(잉여)에서 벗어나 진짜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끝내 주인공이 진짜가 되는 것을 볼 수 없다. 진짜가 될 수도 있을 법한 상황만을 제시한 채 소설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인셉션>에서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쏭달쏭한 상황에서 끝나는 것처럼.


소설의 결말처럼, 그래서 이 리뷰도 이 정도에서 끝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이 소설이 도대체 뭐가 매력적이란 건데? (그러게.) 왜 이 정도밖에 못 쓰는 건데? 그건 능력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 리뷰의 목표는 마치 이 소설을 다 읽어본 것처럼 개운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이 소설을 안 읽으면 안 되는 것처럼 찝찝하게 만드는 데 있으니까.



다음은 덧붙이는 글/잉여적임/결국엔 찌꺼기/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를

 소설이 근대를 거치는 동안 문학과 결합하면서 (이후 문학의 대표 주자가 되면서) 발생한 특징. 단순히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만을 담아내는 장르에서 벗어났다. 그러면서 차츰 학문의 영역에서 연구되기 시작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사실만을 두고 보면 그렇다. 그러던 소설이 "근대문학의 종언" 운운하는 틈을 타 다시 학문의 영역에서 발을 빼 이야기의 특성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요 근래 벌어진/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대표적인 예가 불과 2,3년 전만 해도 엄청나게 인기를 끌어 모았던, 오쿠다 히데오를 필두로 한 일본 소설. (그 후유증(?)이 현재 한국 소설계에 나타나는 것 같아 개인적으론 좀...)

 톰 매카시의 <찌꺼기>는 소설이 근대문학의 영역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과거로 회기하지 않고(이야기화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21세기에도 자신만의 특성을 잘 나타내며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 한 예를 제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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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맨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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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10]


 쿳시의 <슬로우 맨>을 다룬 "책읽는밤"을 다시 보았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대체로 '공감'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공감하거나, 예비적으로 체험하거나. 인물과 그 인물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고,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에 공감하고.

 그러나 쿳시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공감할 수 없음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니, 공감하지 못하도록 작가가 끊임없이 이런저런 장치를 만들어 낸다. 쿳시의 거의 모든 소설에서 다뤄지는 주제가 '사랑'이다. 남녀 간의 사랑일 수도 있겠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일 수도 있겠고. 하지만 작가가 사랑에 대해 쓰는 이유는 독자들이 공감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행하고 있는 사랑이 정말 사랑인지, 진정한 사랑인지 생각하게끔 하기 위해서이다. 

 <슬로우 맨>도 얼핏 보면 다리가 잘린 노인과 그를 돌봐주는 간호사 사이의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감할 준비는 되어 있어!) 결국 노인은 그 여자에게 고백을 하지만 그 와중에 무수한 생각과 고민들이 존재한다. 자신이 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맞는지, 단순한 욕망인지, 사랑과 욕망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도대체 이게 뭔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이와 연관시켜 던진 질문이 '노인'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 내지는 편견에 대해서 균열을 주고자 애를 쓴다. 코스텔로의 도움으로 한 여자와 섹스를 하기도 하고(노인도 섹스가 필요해!) 무려 육십이나 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삶에 대해, 여자에 대해, 그밖의 각종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실제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독자들은 장애를 가진 노인을 보며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상실' 내지는 '노년'에 대해 공감하는 차원에서 머무르고 마는 듯 보인다. 소설을 보고 공감하는 건 독자의 자유이고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건 어쩌면 작가가 제일 바라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식하고 등장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등장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소설에서 활기가 샘솟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자신의 분신 같은 존재를 작품에 아무런 개연성 없이 등장시킨 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어쩌면 기존의 작품에서처럼 의도를 모호하게 만들고 일반적 관념에 의문을 부여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 굉장히 재미있게 읽혔다. 사랑, 노년, 상실과 관련하여 지지부진하게 전개됐을지도 모를 소설이 코스텔로 덕분에 살아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작품 속에서 코스텔로를 비난(?)하는 부분도 재미있었다. (어쨌거나 그럼 결국 작가가 작품을 살렸다는 얘기...?)

 규칙에 어긋나는 쌍따옴표의 사용법도 인상적이었다. 일반적인 말에서도 쌍따옴표를 사용하고, 자신이 했던 생각들에도 쌍따옴표를 사용한다. 말하려고 했으나 실제로는 말하지 않았던 그런 생각들을 둘러싼 쌍따옴표. 그리고 그 뒤에 곧바로 등장하는, 원래 생각과는 상반되는 실제의 말을 둘러싼 쌍따옴표.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런 점과 관련하여 콘래드의 <비밀요원>이 떠올랐다. (조금 다른 문제인가, 기억이 잘...;)

 어쨌거나 강영숙이 말한 것처럼 쿳시의 다른 소설에 비해 굉장히 말랑말랑한 소설인 것은 분명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화자의 어조가 <야만인을 기다리며>와 그나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긴 했으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스토리 탓도 있겠고, 소설의 지역적 배경 탓도 있을 터이며, 작가의 나이...는 탓하지 말하야지 

 비록 한국에서는 인기가 없...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인지도도 없는 편이지만 쿳시는 충분히 행복한 작가다. 한 준수한 번역가가 자신의 모든 작품을 번역해주고 있으니. 번역가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번역가가 구사하는 언어의 스펙트럼에 따라 같은 작가라도 얼마나 다르게 읽힐 수 있는가. 최소한 쿳시의 작품에서 그런 염려는 없다.


+  조금 다른 얘기기는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60대를 '노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친구가 했던 얘기인데, 요새 한국의 60대는 충분히 정정하다, 술 마시면 싸움도 잘 하고, 그래서 경찰서에도 붙들려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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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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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21]


이언 매큐언이 쓰고 우달임이 옮겨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체실 비치에서>를 보았다. 이언 매큐언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소설 전반부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점이다. 추리소설에 비하면 흥미진진한 스토리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터질지 모를 그 무언가 읽는 맛을 더해준다. 물론 이 <체실 비치에서>도 마찬가지.

누군가 훌륭한 문학작품은 웬만한 실용서에 못지 않게 실용적이라고 했던가. 사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실용성에 있다. 20세기 중반 영국, 서로에게 첫사랑인 남자와 여자의 신혼여행, 그리고 '첫날밤'. 그리하여 얄궂은 섹스 테크닉이라든지 친절하게 체위를 설명해주는 동영상을 보며 밤을 지새는 것보다는 이 소설을 읽는 게 백 번은 나을 만큼 이 소설은 실용적이다. 적어도 이 소설에는 '잠짜리'에 이르는 과정에서 남자와 여자의 머릿속을 오고가는 수많은 생각들이 보여지고 있고, 그런 생각들과 실제 말이나 행동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또한 나타나 있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나로서는 대단히 실용적이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의외로 중반이 지나자마자 나타난다. 그리고 사건은 쉽게 짐작하기 힘든 방향으로 전개되어 끝이 난다. 출판사 측에선 "당신이 가지 않았던 길 그 끝에, 사랑이 있었습니다"라든지, "단 한 번 사랑하고 평생을 그리워한 젊은 연인들의 슬픈 운명"(뒤표지)라며 소설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값싼 홍보문구를 동원하여 꽤나 감상적으로 소설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인 이유는 그런 의외의 슬픈 결말이 눈물샘을 자극하여 싸구려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엔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게 사랑이든 인간이든, 보다 보편적인 것에 대해 탐구하고자 할 뿐이다. 물론 인물들의 배경도,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 또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특수한 상황일 수 있겠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어떤 보편을 이끌어낼 수 있는 소설이다. 비록 소설 말미, "그리고 설령 에드워드가 이 리뷰를 읽었다 해도, 객석에 불이 켜지고 빛 때문에 눈이 부셨던 젊은 연주자들이 열광적인 박수갈채에 화답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제1바이올린 주자가 저절로 세번째 줄 중앙의 9C 좌석으로 향하는 그녀(*자신)의 시선을 어찌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알 수 없었으리라, 플로렌스 외에는, 아무도."(193)와 같은 구절에선 어쩔 수 없이 울컥하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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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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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20] 


테드 창이 쓰고 김상훈이 번역하여 행복한책읽기 출판사에서 출간된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보았다. 이 책은 "단 8편의 중단편으로 '21세기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라는 칭호를 얻은 테드 창의 걸작 중단편집"(뒤표지)이다. 테드 창의 소설은, SF 매니아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소설 독자들에게도 많은 호응을 얻어냈다고 한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정재승 교수에 따르면 이 소설은 "과학자가 읽어도 과학적 오류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SF소설"이다. 소설을 읽을 때 보통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에 대해서 상상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조금 달랐다.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책 말미에 실린 많은 독자들의 찬사에 아무런 거부감도 느낄 수 없었다. 직접 읽어보지 않는다면 숱한 말들은 그저 부질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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