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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09/02/03]

다음은 <야만을 기다리며>의 말미(273-274)에 있는 "옮긴이의 말"의 일부다.

ㅡ 그렇다면 왜, 치안판사(*소설 주인공)나 쿳시(*작가)는 그들에게 득이 될 것이 없는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쿳시 자신의 말로 옮겨보면 이렇다. "사람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서려고 하는가?" "나는 왜 진실이 내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데 내 자신에 대한 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전자는 죨 대령(*치안판사와 대립하는 인물)의 편에 서서 자신이 늘 해온 직무를 수행하면 여생을 편히 살 텐데, 그걸 마다하고 온갖 고초를 자진해서 겪은 후 자기고백적인, 아니 자기고백적이어서 자신에게 더욱 득이 될 것이 없는 얘기를 하는 치안판사를 향해 쿳시가 던지는 질문이고, 후자는 톨스토이, 루소, 도스또엡스키에 관한 에세이에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백에 관한 문제를 반추하고 또 반추하는 자신을 향해 쿳시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에 따르면, 전자에 대한 답은 "우리가 정의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고, 후자에 대한 답은 "우리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두 질문에 대한 쿳시의 '플라토닉한' 답변은 왜, 쿳시의 소설의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때로는 자멸에 가까운 고백을 하는지, 그리고 왜, 쿳시가 그러한 내러티브에 매달리면서 자신의 고뇌를 투영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정의나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쿳시의 말은 궁극적으로 글쓰기가 윤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음을 잘 말해준다.

부커상 수상작인 <추락>을 심사했던 보이드 톤킨(Boyd Tonkin)은 <추락>에 대해 "아이스 피켈(ice-axe)로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었다"라고 표현했다. 과연, 나는 아이스 피켈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몰랐으나 <추락>을 읽고나서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느낌만 가지고 비교해 봤을 때,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조금 그 세기가 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초반부만 해도 대단히 유사한 느낌이었으나 중반으로 갈수록 그 느낌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틈을 타고 대단히 오묘한 느낌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유머였다. 하지만 단순히 유머라고 표현해버리면 내 느낌이 왜곡되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풍자나 아이러니나 조소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색과 광기가 공존하는 유머랄까. 다음은 그것이 절정을 발하는 부분이다.

ㅡ 이번에는 다음 것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봅시다. 아, 단어 하나만이 달랑 쓰여 있구먼, 야만인들의 말로 전쟁이라는 말이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다른 의미들도 있소. 그건 복수를 의미하기도 하고, 이렇게 위아래를 뒤집어 읽으면 정의라는 말이 되기도 하오. 어느 것을 의미했는지 알 길은 없소. 그게 야만인들이 교활한 이유요. 그건 다른 나뭇조각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오. (190)

소설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사실 이런 발췌 구절은 아무런 힘이 없다. 이 부분이 어떻게 절정이 될 수 있는지는 소설을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많지 않은 분량의 소설임에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 글의 초반에 발췌한, 소설에서 보여지는 '윤리(혹은 진실이나 정의)'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우리네 심연을 밝혀주기 (밝혀보려 애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자신만의 에티카(윤리학)를 말하며 문학이 종언하지 않았음을(종언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지만, 실은 윤리라는 것은 몰락했건 아니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어떤 소설이 문학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 망각했거나 자연스럽게 모른 척했던 어떤 '윤리(윤리 시간에 배우는 윤리 말고)'를, 고스라니 드러내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한 번쯤 해봄직한 질문.

ㅡ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교양이나 오락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겪을 수 있는 경험은 한정되어 있고, 더군다나 극한적인 상황을 경험하는 일은 더욱 드물 것이다. 소설은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 예고 없이 침입하는 일종의 이물(異物)이다. 그것을 그냥 배제해버리고 말 것인지 아니면 잘 다듬어서 진짜와 같은 하나의 경험으로 만들 것인지는 독자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中)

내가 만약 치안판사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내 성정에, 그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새삼, "한 나라가 위대한 작가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정부를 갖는 것과 같다"는 러시아 작가 솔제니찐의 말이 와 닿는다. 우리나라엔 언제쯤 위대한 작가가 탄생할까. (결론이 뭐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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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철의 시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추락>,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포>,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이어 <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쿳시는 한 번도 내 기대를 배반한 적이 없다. 그가 소설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주제들은 큰 범주에서 보면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어떤 주제를 조금 더 부각시키고 조금 덜 부각시킬지를 선정하는 예민한 감각이나, 읽으면 읽을수록 몰입하게 만드는 구성(혹은 스타일), 매번 새롭고 실험적인 서사방식까지 실망할 틈이 없다. 


그렇다면 이 소설 <철의 시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옮긴이의 글"에 나온 내용을 발췌하여 손쉽게 알아보면,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다가 퇴직한 교수인 엘리자베스 커런이 화자로" 나와, "정권에 저항하는 진보(자유)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권에 의해서 운영되는 교육제도 하에서 학생들에게 서구의 고전문학을 가르치면서 좋든 싫든, 그 체제를 영속화시키는 데 자신도 공모하고 일조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화자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263)고 있는 소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소설은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커런이 "'삶 자체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으로 되어"(267) 있다. 소설을 읽기 전에 간단하게나마 알아둘 정보는 이 정도로 충분할까, 아니면 부족할까.


아주 거칠게 요약한 소설의 내용과 형식만 봐서는 이 소설의 제목이 쉽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책 내부에서 군데군데 힌트를 주고 있지만 아마 다음의 발췌 구절이 제목의 의미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는 이는 화자인 나, 엘리자베스다.


"이제 그 아이는 묻혔고, 우리는 그 애를 밟고 지나가요. 나는 이 땅 위를 걸을 때, 남아프리카의 땅 위를 걸을 때, 흑인들의 얼굴을 밟고 지나간다는 느낌을 점점 더 강하게 받아요. 그들은 죽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영혼은 그들의 몸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땅 속에 무겁고 완강하게 누워서 내 발이 통과하기를 기다리고,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다시 들어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선철銑鐵로 된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표 아래에서 떠다니는 거죠. 철의 시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죠."(165) 화자가 흑인들을 '선철'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사람들은 잘 타지 않을 거예요. 무쇠나 납으로 된 사람을 태우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윤곽과 생김새는 잃게 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불길이 사그라들어도 전보다 더 무거운 상태로 거기에 남아 있을 거예요. 그들을 거기에 놔두며 1밀리미터씩, 1밀리미터씩 가라앉다가 결국 흙에 덮여버릴 거예요."(163,164) 그러므로 제목인 "철의 시대"는 흑인들이 땅에 묻혀 죽어가는 시대라는 의미가 담긴, 대단히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남아프리카의 백인 정부가 남아프리카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시기"(266)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흑인들을 인권의 사각지대로 몰아넣는 아파르트헤이트 이데올로기와 그것에 대한 저항 이데올로기 혹은 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지금, 그리고 이곳을 환기하게 해준다. 이 소설은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참여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도 아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더불어 문학의 힘이란 과연 무엇인지, 다음의 조금 긴 발췌 구절을 통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충분히 보셨나요?"
타바니 씨의 목소리가 전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그래요, 충분히 봤어요. 나는 구경을 하러 온 게 아니에요. 베키를 데리러 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그래요, 난 집에 가고 싶어요. 나는 몸이 아픈 상태라오. 난 기진맥진해 있어요."
그는 몸을 돌리고 걸어갔다. 나는 절뚝거리며 뒤를 따랐다. 그때, 그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당신은 집에 가고 싶어하죠. 하지만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죠? 집에 가고 싶을 때, 그들이 가야 하는 곳은 이곳이에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죠?"
우리는 길 한가운데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빗속에 서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내 일이 자기들의 일이라는 듯, 모든 사람의 일이라는 듯.
"난 할 말 없어요. 끔찍하군요."
"그저 끔찍한 게 아닙니다. 이건 범죄행위입니다. 눈앞에서 범죄가 일어날 경우 당신은 무슨 말을 하죠? '충분히 봤다. 나는 구경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이젠 집에 가고 싶다.' 이렇게 말하나요?"
나는 고통스러워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겠죠. 그렇게 하지는 않겠죠. 그건 맞아요. 그러면 뭐라고 얘기할 거죠? 당신이 본 건 어떤 범죄인가요? 그것의 이름은 무엇이죠?"
(...)
나는 빙 둘러서 있는 구경꾼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한테 적의를 품고 있을까? 나는 아무런 적의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타바니 씨, 물론 나는 많은 것들을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정말로 내 가슴 속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거예요. 사람이 강제로 얘기를 할 때는, 당신도 그건 알겠지만, 진실을 말하는 법이 거의 없어요."
그가 대꾸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제지했다.
"기다려요. 잠시만 나한테 시간을 줘요. 질문을 피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나름의 방식으로 말해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봅시다!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사람들은 그게 맞는 말이라며 중얼거렸다.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건 끔찍한 광경입니다. 비난받아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어 그것들을 비난할 수는 없어요. 나는 내 자신에게서, 내 자신의 말을 찾아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예요."
"이 여자는 염병할 소리를 하고 있군." // (128, 129)


이 구절과 관계된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백인 정부(공권력)에 저항하던 흑인들이 난사당하고 불에 타버린 참화의 현장에서 떠나고 싶어 한다. 더군다가 그렇게 죽은 흑인들 중에는 자기 집 가정부의 아들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 한다. 그녀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말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말은 진실일 수 없기에, 애써보지만 결국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결국 그녀는 "이 여자는 염병할 소리를 하고 있군"이라는 주위의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모여 있던 다른 흑인(구경꾼)들처럼 독자들마저 그녀에게 염병할 소리를 하고 있다며 매도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눈에 보인 것들에 대해,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염병할 소리를 하고 있다며 욕을 먹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아무런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은 채, 그저 알 수 없는 진실에 허무해하는 사람이 아닐까.


이 장면은 어렵지 않게, 얼마전 벌어진 용산사태를 떠오르게 한다. 그들의 대결이, 경찰(용역) 측에 저항했던 철거민들과 이들을 몰아내려다 결국 그들을 죽여버린 정부(공권력)와의 대결구도로 치환되어 읽히는 건 단지 내가 대단히 시사문제에 관심이 많고 동시에 검찰측의 수사결과에 무척이나 불만이 많기 때문인 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상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사소한 욕구만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윤리에 대한 (불편한) 감각을 일깨워주는 일이 문학작품이 지니는 최대한의 덕목이 아닐까. 독자들의 감성(감정)에 호소하여 흥행에 성공한 작품들, 그러니까 베스트셀러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덕목.


최근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의 단점 혹은 가치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간단한 이유인데, 이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물과 감동의 도가니였다는 식의 숱한 독자평들을 봐서도 앞으로도 별로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뜬금없이 <엄마를 부탁해>를 언급한 건, 이 소설이 '엄마'를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고 "'삶 자체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267)의 <철의 시대> 역시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엄마를 다루는데 왜 어떤 소설은 베스트 셀러가 되고 어떤 소설은 별로 읽히지도 않은 채 품절 위기에 놓이는 걸까. 남자 작가라서 엄마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닌 것 같고, 잘 모르겠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추측은 가능할 것 같다. 우리가 엄마를 떠올렸을 때 가슴 속에서 발생하는 뭉클뭉글한 그럼 감정, 그 감정에 기대어 이야기를 전개시키면 인기만발의 일일 드라마처럼 독자에게 호감을 살 가망성이 크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엄마들이 가지고 있는 자식에 대한 애증,집착,선망 등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여 풀어쓴다면 아마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당연한 소리지만 나는 후자 쪽에 훨씬 더 큰 가치를 두는 편이다. 더 말해 무엇하겠냐만, <철의 시대>는 정확히 후자 쪽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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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2-15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보관함에 들어갑니다 ~

닉네임을뭐라하지 2009-02-16 12:58   좋아요 0 | URL
네, 이 책도 조만간 품절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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