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09.06.09]


줄리언 반스가 쓰고 신재실이 옮겨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내 말 좀 들어봐>를 봤다. 두 번째로 읽는 소설이다. 이전에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은 적이 있고, <101/2장으로 쓴 세계 역사>를 읽다 만 적이 있다. 어쨌거나 줄리언 반스는 소설이라는 서사장르 혹은 이야기형태를 참 잘 알고 대단히 좋아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소설가 김연수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로 줄리언 반스를 한손에(혹은 양손에) 꼽는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고.

아무려나 이 소설은 간단히 줄여 말하면 고품격 연애사랑결혼(심지어 인생) 소설이다. 통속적인 소재(삼각관계)를 사용했지만, 통속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켰으며,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놀라운 결말을 이끌어 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다시금 하게 된 생각.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종은 남자이며,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종은 여자라는 사실. 더불어 여자가 멋있다는 걸 아는 종은 남자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이 글을 쓰며 문득 연애와 사랑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굳이 차이가 있다면 연애는 좀더 관계의 문제에 가깝고 사랑은 좀더 감정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연애는 대체로 어렵고, 사랑은 종종 힘든 것.

인상적인 구절이 많아 발췌해둔 부분도 많고, 그래서 단평으로 끝내기 아쉬운 소설인데 다음에 읽을 책을 위해 이 정도에서 그쳐야겠다. 무엇보다 오늘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 나눈 친구와의 말대로 앞으로 잔뜩 책을 읽어야 하니까. "옮긴이의 말" 부분도 여러 모로 괜찮았는데, 그중에서 오늘의 대화와 관련하여 발췌해두고 싶은 구절. "독자가 기대하는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고, 이상적으로는 진리를 말하는 소설이라야 될 것이다."(347) 역시 뭐랄까, 정답이나 해결책이나 위안이 아니라,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소설이라야 하지 않나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09-06-15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결과(?) 다시금 하게 된 생각.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종은 남자이며,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종은 여자라는 사실. 더불어 여자가 멋있다는 걸 아는 종은 남자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 후훗. 하고 미소지었어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9-06-16 15:06   좋아요 0 | URL
네네 ^^
후훗, 하고 미소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당~
 
연암집 지만지 고전선집 380
박지원 지음, 박수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09.06.04]


내가 박지원이라는 존재를 처음 인식한 건 언제였을까. 그후, 박지원의 글을 읽어봐야겠다 마음 먹은 건 또 언제였을까. 연 암 박지원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다는 <열하일기>를 구입하고도 쉽사리 이 책을 집어들지 못했다. 방대한 분량 탓도 있었겠지만 책을 읽는다고 그 속에 담긴 박지원의 철학이나 사상, 문장 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문학사상 최고의 문장가"(9)라 일컬어지는 박지원. 그는 나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맛보고 싶어도 맛보고 싶어도 맛볼 수 없는 그런.


이런 즈음, 지만지에서 <연암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박지원의 책이 나왔다.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삶에 대한 모든 글들이 담겨 있다"(11)고 할 수 있는 <연암집>. 책 서두에 있는 "편집자 일러두기"에 따르면 이 책은 "1932년 활자본으로 17권 6책으로 간행된 박영철본 <연암집>을 저본"으로 삼았고, "<연암집>에 실린 산문 237편 가운데 39편, <열하일기>에 실린 글 가운데 5편을 골라"(4)서 실었다. 글을 옮긴 박수밀에 의해 분류되고 선별된, 그야말로 박지원 산문의 에센스라고 봐도 무방한 그런 책. 박지원 월드, 그 광활환 우주를 안내해줄 입구의 돌로 제격인 책이었다.


책은 옮긴이에 의해 네 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묶여 있다. 첫 번째 파트의 제목은 "사이에서 생각하기". 어쩌면 박지원 사상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는 '사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치관이라고 봐도 무방한 그의 이 사상은, "참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의 가운데에 있는 것"(33)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옮긴이 역시 박지원의 이런 사상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문장으로 꼽아 책 뒤표지에다 실었다.


//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친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도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리는 것이다. 어찌 그 눈에서만 판정할 따름이랴? 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미리 판정해버린다. (36)// 박지원은, 세상사에 오로지 하나만의 정답은 없으니 그 사이에서 혹은 차이를 통해 진리에 다가가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파트의 제목은 "문장가의 마음"이다. 그 스스로가 대단히 뛰어난 문장가였던 박지원은 과연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떤 문장을 쓰는 작가를 좋은 문장가라고 생각했을까. 이를테면 박지원은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군사를 잘 쓰는 장수에겐 버릴 군사가 없고, 글을 잘 쓰는 자에게는 따로 가려 쓸 글자가 없"(77)고 말한다. 사소한 일상생활이나 자잘한 습관을 통해서도 글쓰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이 책을 보는 사람이 기와 조각이나 벽돌도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의 번지는 먹에서 흉악한 도둑의 뻗친 수염을 얻게 될 것이다. 남의 귀 울음은 듣지 못해도 내 코고는 소리를 개닫는다면 작가의 뜻에 가까우리라."(82) 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말은 다음 한 문장이면 족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몰두해야 이룬다"(104)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몰두해야만 성취할 수 있다고. 글쓰기는 두말 할 나위 없거니와.


세 번째 파트의 제목은 "생활의 발견"이다. 앞의 두 파트에 비하자면, 내밀한 일기 혹은 아주 사적인 에세이의 느낌이 많이 나는 글들이 모여 있다. 친구를 잃은 슬픔이라든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감상, 혹은 어떤 사람에 대한 추억, 여행길에서의 단상들을 담담하게 적어두고 있다. 대단히 사소한 기록이지만, 그런 것들을 기록함으로써 그야말로 생활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비유에선 그저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개구리 소리는 마치 멍청한 원님 앞에 사나운 백성들이 몰려와 소송을 제기하는 것 같고, 매미소리는 공부를 엄격하게 시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이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는 것 같고, 닭 울음소리는 올곧은 한 선비가 자기 임무로 여기고 바른말 하는 것 같았다."(135) 자연에서 나는 소리를 통해, 참신하면서도 적확하게 일상생활과 비교하고 있다.


네 번째 파트는, 범박하게 말해 현실(사회)참여적인 글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제목 또한 "현실과 사회". 꼭 참여적이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생각들이 많이 담긴 것이, 요샛말로 신문 칼럼이나 사설과 같은 글들이라고 보면 적절할 듯하다. 친구나 벗에 대한 생각들, '열녀'라는 사회제도에 대한 관점, 오랑캐를 보는 시선, 학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비롯하여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한 주관을 가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리뷰를 쓰기 위해(응?) 두 차례로 나누어 책을 완독하기는 했으나, 음, 글쎄, 박지원의 <연암집>은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찾아내기 힘들 것 같다. 뭐랄까, 아침에 일어나서 천천히 차를 한잔 마실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책을 펼쳐 손길이 닿는 곳에 있는 글을 한두 개씩 꼭꼭 씹어가며 음미해야 아마 이 책을 제대로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입구의 돌을 열어제쳤으니, 이제 박지원의 세계를 여유롭게 (혹은 치열하게) 유영할 일만 남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9.05.17]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의 차이는 전자가 먼저 씌었고 후자가 나중에 씌었다는 점이다. 그게 전부고 또한 결정적이다. 무슨 말장난 같지만 그 외의 다른 차이점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1973년의 핀볼>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건 단지 전자가 먼저 씌었다는 이유뿐이다.

예전부터 하루키의 작품 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최고로 꼽아 왔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그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예전과 지금의 이유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아무려나 지금의 이유는, 이 소설이 아무도 보지 못한 새로운 소설의 지형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20세기 중반의 일본 작가들이 근대문학의 최첨단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사소설이라는 형태의 소설을 완전히 끝까지 밀고 가버렸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소설따위 누가 못 쓰냐"는 얘기를 들을 만큼 끝까지. 하지만 결국 하루키가 만약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다면, 아무도 쓰지 않았던 "이런 소설따위"를 그가 가장 먼저 써버렸기 때문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콜럼버스의 달걀이 된 셈이다.

하루키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많은 작가들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공허한 정취나 의도적으로 수집된 무의미한 디테일(개인적 취향)을 주로 패러디(모방,모사)했다. 하지만 아무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보여지는 구조를 베끼지는 못했다/않았다. 사소설이라는 일본 문단 특유의 양적 질적 토양이 부족하기도 했겠거니와, 사실은 그의 소설이 (근대)소설(양식)이 끝났다는 걸 얘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1973년의 핀볼>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패러디 혹은 아류 혹은 속편이다. 패러디 작품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특정 한 작품에 대한 패러디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어떤 총체적인 집단(부류,시대)에 대한 패러디가 시도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돈 키호테>나 <마담 보바리>와 같이. 하지만 패러디 작품임에도 <1973년의 핀볼>이 살아남은 이유는 이 작품 속에서 20세기 하루키 월드를 이루어낸 작품들ㅡ이를테면 <양을 쫓는 모험>이라든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갑는 새>,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ㅡ의 씨앗이 발아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러디 작품이 결국 모태가 되어버린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7.07.05]


  다카노 가즈아키가 쓰고 전새롬이 옮겨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13계단>을 보았다. 결말이 없었다면 끝없이 두근거리며 볼 수 있었을 텐데. 이 소설은 마치 깊은 곳에서 울려퍼지는 낮은 베이스음과 같은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수록 그 베이스음은 시나브로 빨라진다. 도저히 손에서 책을 뗄 수 없는, 말하자면 그 정도로 몰입도가 강한 소설이었다. 소설을 통해 그리고자 했던 분위기도 잘 살려냈고, 작가의 자의식도 적절하게 보여졌다 생각한다. 유일한 결점은 역시 결말. 소설에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나는 소설을 다 읽고 너무도 의아한 결말에 범인이 2년 동안 했던 생각들과 행동들을 상상해보았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실한 결말이 그 엄청난 이야기를 지탱하고 있는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상누각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굳이 그런 식의 사건을 취하고자 했으면 중간에 한번쯤은 은근슬쩍 범인의 행동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드러내보였어야 한다. 헌데 만약 그렇게 했다면 중반 이후에 소설이 그런 분위기를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에잇, 이러나 저러나 아쉽긴 마찬가지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목탄
나카가미 겐지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9.05.22]


 나카가미 겐지가 쓰고 허호가 옮겨 문학동네에서 나온 <고목탄>을 읽었다. 이 소설에는 단숨에 읽어내려갈 만한 흡인력은 찾아볼려야 찾아볼 수 없지만, 도저히 중간에 놓지 못하도록 만드는 뜨거움만은 가득하다. 소설 전반에 걸쳐, 그것은 마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건 주인공인 아키유키 속에서 묵히고 삭힌 친아버지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겠고, 기어이 어떤 사건이 터지고야 말 것이라는 데 대한 은은한 암시일 수도 있겠다. "거미줄처럼 죄어오는 뒤틀린 피의 계보"라는 책 뒤표지 카피처럼, 초반엔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조금 복잡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뿌리 깊은 곳에까지 자리하고 있는 유교 문화적 관점에서 그것은 좀 충격적일지도.) 그러나 책 서두에 잘 정리해둔 가계도를 참고해가면서 보다 보면 어느새 캐릭터들이 각자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에토 준은 이 소설에 대해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은 70년 만에 드디어 그 이상을 실현했다"는 표현을 썼다. 번역자인 허호는 "이 작품이야말로 일본 문학의 최고 걸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고 말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이들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자면, 20세기 일본 사소설과 19세기 근대소설을 한데 묶어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버린 그런 소설이 아닌가 싶다. 이런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내 편협한 취향 따위는 좀 우스워진다. 그냥 압도되어버린다. (단평이라기보다는 이건 뭐 그냥 극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09-05-27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극찬이라면 얼른 보관함에. :)

닉네임을뭐라하지 2009-06-01 12:12   좋아요 0 | URL
더군다나 언제 절판될지 모를 책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