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집 지만지 고전선집 380
박지원 지음, 박수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09.06.04]


내가 박지원이라는 존재를 처음 인식한 건 언제였을까. 그후, 박지원의 글을 읽어봐야겠다 마음 먹은 건 또 언제였을까. 연 암 박지원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다는 <열하일기>를 구입하고도 쉽사리 이 책을 집어들지 못했다. 방대한 분량 탓도 있었겠지만 책을 읽는다고 그 속에 담긴 박지원의 철학이나 사상, 문장 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문학사상 최고의 문장가"(9)라 일컬어지는 박지원. 그는 나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맛보고 싶어도 맛보고 싶어도 맛볼 수 없는 그런.


이런 즈음, 지만지에서 <연암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박지원의 책이 나왔다.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삶에 대한 모든 글들이 담겨 있다"(11)고 할 수 있는 <연암집>. 책 서두에 있는 "편집자 일러두기"에 따르면 이 책은 "1932년 활자본으로 17권 6책으로 간행된 박영철본 <연암집>을 저본"으로 삼았고, "<연암집>에 실린 산문 237편 가운데 39편, <열하일기>에 실린 글 가운데 5편을 골라"(4)서 실었다. 글을 옮긴 박수밀에 의해 분류되고 선별된, 그야말로 박지원 산문의 에센스라고 봐도 무방한 그런 책. 박지원 월드, 그 광활환 우주를 안내해줄 입구의 돌로 제격인 책이었다.


책은 옮긴이에 의해 네 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묶여 있다. 첫 번째 파트의 제목은 "사이에서 생각하기". 어쩌면 박지원 사상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는 '사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치관이라고 봐도 무방한 그의 이 사상은, "참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의 가운데에 있는 것"(33)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옮긴이 역시 박지원의 이런 사상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문장으로 꼽아 책 뒤표지에다 실었다.


//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친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도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리는 것이다. 어찌 그 눈에서만 판정할 따름이랴? 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미리 판정해버린다. (36)// 박지원은, 세상사에 오로지 하나만의 정답은 없으니 그 사이에서 혹은 차이를 통해 진리에 다가가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파트의 제목은 "문장가의 마음"이다. 그 스스로가 대단히 뛰어난 문장가였던 박지원은 과연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떤 문장을 쓰는 작가를 좋은 문장가라고 생각했을까. 이를테면 박지원은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군사를 잘 쓰는 장수에겐 버릴 군사가 없고, 글을 잘 쓰는 자에게는 따로 가려 쓸 글자가 없"(77)고 말한다. 사소한 일상생활이나 자잘한 습관을 통해서도 글쓰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이 책을 보는 사람이 기와 조각이나 벽돌도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의 번지는 먹에서 흉악한 도둑의 뻗친 수염을 얻게 될 것이다. 남의 귀 울음은 듣지 못해도 내 코고는 소리를 개닫는다면 작가의 뜻에 가까우리라."(82) 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말은 다음 한 문장이면 족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몰두해야 이룬다"(104)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몰두해야만 성취할 수 있다고. 글쓰기는 두말 할 나위 없거니와.


세 번째 파트의 제목은 "생활의 발견"이다. 앞의 두 파트에 비하자면, 내밀한 일기 혹은 아주 사적인 에세이의 느낌이 많이 나는 글들이 모여 있다. 친구를 잃은 슬픔이라든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감상, 혹은 어떤 사람에 대한 추억, 여행길에서의 단상들을 담담하게 적어두고 있다. 대단히 사소한 기록이지만, 그런 것들을 기록함으로써 그야말로 생활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비유에선 그저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개구리 소리는 마치 멍청한 원님 앞에 사나운 백성들이 몰려와 소송을 제기하는 것 같고, 매미소리는 공부를 엄격하게 시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이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는 것 같고, 닭 울음소리는 올곧은 한 선비가 자기 임무로 여기고 바른말 하는 것 같았다."(135) 자연에서 나는 소리를 통해, 참신하면서도 적확하게 일상생활과 비교하고 있다.


네 번째 파트는, 범박하게 말해 현실(사회)참여적인 글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제목 또한 "현실과 사회". 꼭 참여적이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생각들이 많이 담긴 것이, 요샛말로 신문 칼럼이나 사설과 같은 글들이라고 보면 적절할 듯하다. 친구나 벗에 대한 생각들, '열녀'라는 사회제도에 대한 관점, 오랑캐를 보는 시선, 학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비롯하여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한 주관을 가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리뷰를 쓰기 위해(응?) 두 차례로 나누어 책을 완독하기는 했으나, 음, 글쎄, 박지원의 <연암집>은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찾아내기 힘들 것 같다. 뭐랄까, 아침에 일어나서 천천히 차를 한잔 마실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책을 펼쳐 손길이 닿는 곳에 있는 글을 한두 개씩 꼭꼭 씹어가며 음미해야 아마 이 책을 제대로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입구의 돌을 열어제쳤으니, 이제 박지원의 세계를 여유롭게 (혹은 치열하게) 유영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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