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09.05.17]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의 차이는 전자가 먼저 씌었고 후자가 나중에 씌었다는 점이다. 그게 전부고 또한 결정적이다. 무슨 말장난 같지만 그 외의 다른 차이점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1973년의 핀볼>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건 단지 전자가 먼저 씌었다는 이유뿐이다.

예전부터 하루키의 작품 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최고로 꼽아 왔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그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예전과 지금의 이유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아무려나 지금의 이유는, 이 소설이 아무도 보지 못한 새로운 소설의 지형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20세기 중반의 일본 작가들이 근대문학의 최첨단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사소설이라는 형태의 소설을 완전히 끝까지 밀고 가버렸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소설따위 누가 못 쓰냐"는 얘기를 들을 만큼 끝까지. 하지만 결국 하루키가 만약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다면, 아무도 쓰지 않았던 "이런 소설따위"를 그가 가장 먼저 써버렸기 때문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콜럼버스의 달걀이 된 셈이다.

하루키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많은 작가들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공허한 정취나 의도적으로 수집된 무의미한 디테일(개인적 취향)을 주로 패러디(모방,모사)했다. 하지만 아무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보여지는 구조를 베끼지는 못했다/않았다. 사소설이라는 일본 문단 특유의 양적 질적 토양이 부족하기도 했겠거니와, 사실은 그의 소설이 (근대)소설(양식)이 끝났다는 걸 얘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1973년의 핀볼>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패러디 혹은 아류 혹은 속편이다. 패러디 작품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특정 한 작품에 대한 패러디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어떤 총체적인 집단(부류,시대)에 대한 패러디가 시도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돈 키호테>나 <마담 보바리>와 같이. 하지만 패러디 작품임에도 <1973년의 핀볼>이 살아남은 이유는 이 작품 속에서 20세기 하루키 월드를 이루어낸 작품들ㅡ이를테면 <양을 쫓는 모험>이라든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갑는 새>,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ㅡ의 씨앗이 발아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러디 작품이 결국 모태가 되어버린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