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부 진이
앨랜 브렌너트 지음, 이지혜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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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먹고 살기 위한 생계의 방편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황무지와도 같았던 하와이는 네 개의 섬이 있는데 주로 사탕수수밭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던 것으로 보인다.1902년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발했던 한인 정인수가 최초의 하와이 이민자로 기록되어 있다.가난과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하와이 땅에 밟은 121여 명은 가혹한 루나(십장)는 거칠고 혹독하게 일을 시켰고 월급은 고작 16달러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1905년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하와이로 떠난 사람은 7200여 명이다.하와이 땅에서 노예와 같은 비참한 노동에 시달리지만 근면과 뚝심으로 한인들은 제 삶을 찾아 가면서 정착을 했다.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총각들이 일도 힘들지만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고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들에 대한 추억과 향수,그리움이 아니었을까 한다.게다가 혼기가 찼기에 짝을 찾아야 하는데,당시에는 조선의 처녀들이 찍은 사진을 하와이에 정착한 총각들에게 보여 주면서 마음에 맞는 짝을 골라 서로 혼담이 오고 갔던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글의 제목이 '사진신부'라고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국사회에서 연애결혼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로 마음에 맞아 둘이서 결혼을 정하는 경우는 드물었고,대개는 지인의 소개 및 중매에 의해 맞선을 보고 서로 맞으면 결혼을 한다든지,아니면 부모의 뜻에 따라 혼인이 결정되는 경우도 있었다.하물며 구한말,일제강점기에는 언감생심 연애결혼이라는 것이 있을리 만무였고 있었다고 한다면 부모와 멀어지고 호적을 파가야 했을지도 모른다.유교사상이 깊게 뿌리 박혀 있던 시절이고,그것이 결혼 상대를 정하는 것까지도 당사자의 뜻과 의견대로 되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 글의 주인공 진(珍)이는 보배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여성으로서 비록 봉건적이고 고지식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남자형제만 배우는 데에 불만이 많아서인지 어린시절부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알 때까지 물어서라도 알고자 했던 배움에 대한 열망이 많은 여성이었다.오빠들로부터 한글도 조금씩 깨우치고,이모부의 첩이면서 기생이었던 석란은 다재다능하면서 독립심도 강해 3.1운동에도 참가하는 등 당찬 여성이었다.후일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옥살이 끝에 불우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고 만다.대구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외진 마을 보조개골에서 태어난 진이는 집안에서는 딸이라고 해서 섭섭이라고 불렀지만,중매꾼 김씨 아주머니로부터 하와이 청년 한인과의 주선을 받게 되면서 진이는 노 씨와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물론 집안에서는 부모가 맺어준 상대와 결혼을 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이고 관례였기에 진이의 집안은 발칵 뒤집힌 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배삯을 준비한 진이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건강검사를 받아 아흐레만에 하와이 땅에 도착하여 노 씨와 부둣가에서 혼인식을 간략하게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노 씨는 나이도 많고 무뚝뚝하며 음주,주정,도벽이 심한 사람으로 그가 받는 월급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진이도 조선에서 함께 온 일행과 함께 일을 하지만 노 씨는 아내가 일을 한다고 주위에서 수근거리고 수치심을 유발했다는 자격지심에 진이를 심하게 모욕과 폭행을 일삼는다.

 

진이는 더 이상 노 씨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집을 도망쳐 나와 우연히 사창가에 당도하게 되는데,그곳에서 바느질 솜씨가 수완을 발휘하지만,누군가의 신고에 의해 포주들이 잡혀 가고 진이는 새로운 삶을 찾던 중 통조림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그러던 중 노 씨로부터 부당한 폭행과 모욕,유산을 당했다는 것을 이웃에게 알리면서 진이와 노 씨는 완전 남남이 되고 만다.그런데 노 씨는 이혼 후 허기를 달래려 진이의 식당에 나타나 밥 한끼 얻어 먹고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데,또 다시 식당에 나타나 살기 어린 눈빛으로 진이에게 다가오자 진이는 그만 노 씨에게 칼로 자상을 입히게 되,노 씨는 사법의 잣대보다는 하와이 땅에서 고국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제 버릇 개 주랴'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선 경상도에서 왔던 일행들이 진이에게는 삶의 위안이 되고 이웃들과의 사이도 좋아서 차츰 마음이 안정되어 간다.일행들과는 정례적으로 만나 계모임을 활성화시켜 재테크를 불려 나간다.곧이어 진이는 재선 아저씨와 재혼을 하면서(이해심과 배려가 깊은 남자) 식당 운영을 하면서 조금씩 돈을 모아가고 자식도 셋을 두었는데,모두 착하고 끈기 있는 진이와 재선 아저씨의 DNA를 물려 받았는지 후일 좋은 직업을 갖게 되고,진이의 생활이 안정이 되면서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고국 땅을 찾아 가게 된다.거의 20여 년만에 찾은 고향 땅은 일제에 의해 다소 변화가 있었다.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작고하고 어머니와 오빠,남동생,조카들이 그녀를 맞는다.하와이에 가기 전 민며느리였던 송이를 하와이로 데려와 보다 나은 삶을 살아보자로 약속했건만 송이는 이미 고향에 없다.다행히 송이에게 온 편지에 쓰인 대략적인 주소를 찾아 극적으로 송이와 해후를 하게 된다.짧지만 어린시절의 추억과 회상에 젖은 둘은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상태로 다시 발길을 돌려 가족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하와이로 다시 떠난다.진이는 만 60세가 되어 회갑잔치를 하면서 하와이 땅에서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회갑을 축복해 준다.

 

 벽안(碧眼)의 시선으로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관습 및 결혼관 등을 객관적인 시선과 견해로 잘 풀어 나가고 있는 점이 매우 인상이 깊었다.20세기 초 하와이는 본래 하와이 왕국이 있었고 여왕이 국정 주도권을 갖고 있었지만,미국 본토에 의해 강제 합병되고 만다.앨런 브랜너트작가 20세기의 역사적 주요 사건까지 중간 중간 소개하고 있어 학습적 효과도 있었다.앨런 브랜너트작가는 진이가 1897년 닭띠 해에 태어나 1957년 회갑까지의 고단하지만 삶은 그래도 살만하다 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 주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주어진 운명을 순응할 것인가,아니면 더 나은 삶을 위해 진이와 같이 포부와 용기를 갖고 깨어 있는 인간으로 살 것인가도 생각하게 하는 멋진 글이었다.워싱턴 포스트 선정 『올해 최고의 소설』이면서 ELLE(그녀) 매거진 그랑프리 최우수상을 받을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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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8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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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권에 이어 2권에서도 인간이 광기와 폭력,혼돈을 일으켜 파국으로 치달을 때 느끼는 비통하고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도 합니다.이러한 현상은 미국이 갖고 있는 우월성,영웅주의가 파멸로 전락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와 시대의 흐름까지 관조할 수 있어 냉철하게 읽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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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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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작가는 울분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1940,50년대 작가가 보고 듣고 겪었던 단상을 잘 직조해서인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이번 작품에서는 시대를 뒤흔든 광기와 폭력,혼돈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케 합니다.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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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4 - 고국원왕, 사유와 무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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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시리즈가 중반을 넘어 후반부로 넘어가고 있다.을불이 태왕 미천왕(美川王)으로 국사를 관장하고 그의 주변세력을 공고히 한다.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듯 전왕(前王) 봉상왕(烽上王)은 왕권강화를 위해 자신의 혈족인 왕족들을 억압하고 제거했던 것은 비정한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방약무인과 같은 전권행위는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고구려의 고토(故土) 낙랑(樂浪)을 축출한 을불은 두 자식인 사유와 무에게 권력을 넘어 주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면서 그의 머리 속은 누구를 차기왕으로 내세워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뇌에 빠지게 된다.

 

 당시 4세기 초.중반의 상황은 선비족인 모용외가 아들 모용황에게 국방과 권력을 넘겨 주던 시기이고,아래로는 백제가 고구려를 넘보던 시기였기에 을불의 부하들은 당연 용맹성과 왕재를 겸비한 무(武)가 을불의 뒤를 잇는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반면 장자인 사유는 성정이 착하고 유약하기만 하다.그러한 가운데 을불은 무가 태자로 옹립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사유를 태자로 결정하는 용단을 내리게 된다.고구려가 남녀균분상속제도이었던 시대라 장자가 반드시 태자로 되는 것은 아니었던 만큼 무가 태자로 되었더라면 고구려의 역사,문화 등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라는 의문을 갖어 본다.을불은 사유를 태자로 결정하면서 '열(熱)에 들떠 있던 분위기'가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한 상황으로 바뀌고 만다.이제 사유가 을불의 뒤를 잇는 태자로서 장차 막중한 국사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가 없다.

 

 미천왕 14년 낙랑이 고구려의 품으로 돌아오면서,고구려는 기세등등하기만 했다.'낙랑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는 말처럼 그간 낙랑은 거대 교역도시로서 주변국들과의 왕성한 물자교역과 세력이 커져 있던 만큼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다 보니 부풀대로 부푼 풍선이 '푹' 꺼지고 마는 것과 흡사했으리라.우선 을불은 친정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유가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과 왕재로서의 자격을 조금씩 익혀 나간다.을불이 사유를 태자로 결정한 이면에는 그가 봉상왕 시절 종조부 안국군의 격려와 유지에 따라 낙랑,숙신 등을 떠돌면서 고구려에서 흘러 온 유민(流民)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국정을 책임지던 국왕의 학정 등을 보고 겪으면서 국가의 존재와 가치관을 몸과 마음으로 삭히고 터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지금으로 따진다면 소수계층이 다수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사회제도를 모두가 상생하는 살맛나는 세상을 꿈꾸었기에 을불은 무의 정권이 아닌 문의 정권을 꿈꾸었으리라.

 

 한편 전연(前燕)의 기초를 닦은 모용외는 여인 주아영과 예상치 않은 정사로 인해 태어난 자식이 모용황이다.모용황은 아버지 모용외 이상으로 남자답지만 폭악성과 용맹성이 모용외 이상이었다.사유가 태자로 결정되면서 미천왕의 비(妃)인 아영은 사유의 태자비까지 결정하게 되는데,그가 아달휼 대장군의 부인인 선빈을 엮어 주었듯,이번에는 아달휼의 딸 정효를 태자비로 앉힌다.아영은 고구려가 평정을 되찾으면서 경연,동맹제를 개최하는 등 국가의 면모를 정비해 나간다.아영은 성격상 유유자적하게 유한족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미모와 지략을 한껏 발휘하는 당찬 여성이다.아달휼 대장군을 필두로 한,선비와의 전쟁이 벌어지고,을불도 직접 전장(戰場)에서 진두지휘하는 모습도 엿보인다.한편 무는 태자가 되리라는 기대와 격려 속에서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사라지면서 행방불명이 되고 마는데 이는 아영이 시킨 것이었다.국사는 사유에게 맡기되 국방과 관련해서는 무가 전적(戰積)과 공훈을 쌓으면서 무의 미래를 격려했던 것으로 보인다.낙랑의 최비는 이제 신체적,정신적으로 쇠약해지면서 을불의 위로를 받으면서 회한을 나누고 유대를 맺어 가고,모용외는 모용부에게 패배하면서 모용부는 나라를 세우는데 국호는 연(燕)이다.

 

 고구려는 이웃 모용부와의 지리한 전쟁이 이어지면서 국상 창조리,여노 장군이 전장의 중심부에 있고 을불은 진두진휘를 한다. 다가오고,사유는 선비와의 화해 차원에서 모용외를 직접 만나 사신으로서 모용외를 찾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여기에 고구려 백성만을 위해 온 게 아니라 선비(鮮琵)의 백성을 위함은 바로 모용 대선우를 위한 것입니다.","전쟁이 없어 백성이 평안하면 군주가 기쁜 법 아니겠습니까?" -P234

 

 모용외는 사신 사유를 우습게 보면서 자식 모용황을 처단하려 했던 자세를 바꿔 고구려에 선전포고의 전권을 주는데,그의 뇌리에는 아영이라는 여인과의 관계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전쟁마저 승패가 보이지 않자 그렇게 내뱉었을 것이다.사유가 모용부 군사에게 화살을 맞지만 을불의 사기진작에 고구려는 전열을 가다듬는다.모용외도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생을 마감하고,을불은 모용부와의 전쟁의 최후를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고구려 제15대 태왕 미천왕 : AD300~331년)

 

 을불은 폭군 봉상왕을 몰아내고 태왕의 자리에 오른 뒤 서쪽으로는 한사군을 되찾았으며 북쪽으로는 선비족을 꺾은 불세출의 영웅.밖으로는 숙신을 품에 안고 안으로는 민생을 깊이 살피어 만백성의 사랑을 깊이 받은 성군.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고 단 한 번의 반란도 겪지 않은 위대한 군주.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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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1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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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학이 발달한 현대사회는 죽음이 의문으로 남게 되는 경우에는 보호자의 동의 내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부검을 실시하여 사인(死因)을 규명하여 유족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범죄사건 해결을 위한 단초가 된다.대중들의 관심을 모으는 법의학에 의한 부검 실시를 떠나 개인 해부교실 운영을 소재로 일어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다룬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는 제목이 말해주듯 시신을 눈 앞에 두고 경건한 마음으로 내뱉은 말일 것이다.개인 해부교실과 관련하여 의문의 살인 사건과 주변 인물들의 행각 그리고 이를 조사하고 판단을 내리는 치안판사 등 다양한 등장인물이 소개되어 있다.특이한 것은 다수의 등장인물과 역할마저 다양하기에 등장인물의 이름과 역할을 세심하게 소개해 주고 있어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이야기의 이해,몰입,전개에 따른 흥미유발 및 추리의 재미가 쏠쏠하기만 했다.

 

 18세기 영국 런던을 공간배경으로 전개되는 개인 해부교실에는 운영자 대니얼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해부교실 경영자 그리고 살인사건과 연계되는 주식 중개인,저널 사장,치안판사,사체 도굴꾼 등이 등장하고 있다.사체 도굴꾼과 연계되어 사체를 운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해부 교실과는 무관한 시인을 꿈꾸는 소년도 있다.시인이면서 해부교실 제자들과 얼굴을 트면서 친밀해지기도 하고 남작 영애(令愛)와의 관계,재산증식 및 부채탕감 등을 미끼로 주식 중개인과 은행 관계자 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스토리의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치안판사인 존 필딩은 맹인(盲人)으로서 조카를 조수로 두면서 사건조사를 진행해 나가고 있다.사건수사를 1차적으로 경찰이 맡는 것이 수순인데 이 글에서는 치안판사가 거의 전과정을 맡고 있는 점이 특색이며,주변 인물들의 탐문 및 증언과 당시의 상황을 추리해 내어 판결을 내리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18세기 당시 영국에서는 교회 무덤으로 가려면 타살로 인정 받아야 했던 것 같다.자살은 기독교 윤리관점에서 허용이 되지 않기에,비록 자살일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손목을 그어 비소를 탄 물에 손목을 넣어 치사에 이르게 한다든지,고의로 타박상을 입힌다든지 사지 절단을 한다든지 하여 자살을 타살로 위장하여 교회 무덤에 묻히기를 바랐던 것이 당시의 인습인 것 같다.그런데 개인 해부교실 난롯가에서 발견된 몇 구의 시체들이 의문점으로 남으면서 치안판사에 의해 수사가 진행된다.해부교실 운영자들에 의해 살해가 밝혀지는 날에는 해부교실은 공중분해가 되기에 어떻게든 이 사건으로부터 회피하려 하지만 흩어져 있던 수수께끼가 하나 둘씩 풀리면서 치안판사는 관대한 판결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반전은 고시(古詩)가 위작(僞作)으로 판명되어 누군가에 의해 자살을 타살로 꾸며 죽었다고 여겼던 시인 네이선이 살아 돌아오는 모습에서 깜짝 쇼를 연상하게 하기도 하고,은행직원,주식 중개인,저널 사장 들이 금전과 유착하여 벌인 기괴한 살인사건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해부교실도 그렇지만,돈 문제는 어느 시대에서든 인간의 그릇된 욕망과 관련 당사자 간의 이해관계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인 귀결인가에 대해 생각하니 씁쓸하기 짝이 없다.돈과 물질이 인간의 삶과 사고를 지배하는 세태에서 개인은 어떠한 삶의 자세와 처신을 해야 할 것인가까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개인 해부교실을 운영하면서 사체 부검을 마치고 필요한 부위를 표본조사를 하는 등 인체의 신비,사체에 대한 해부 등에 대해 자연스레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었다.18세기에는 의학과 과학,법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를 감안하면 개인 해부교실은 분명 현대 해부학의 기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또한 시체를 훔친다든지 해부교실 제자와 도굴꾼 간의 시체 매매,그리고 해부교실 운영을 위해 필수적인 자금문제를 놓고 주식 중개인,저널 사장들이 혐의를 받으면서 자승자박의 수형생활을 하기도 한다.냉동시설,첨단장비가 미비했으리라 생각되는 당시의 해부사정은 열악하고 조잡했을 것이지만,해부교실 소재 자체가 참신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또한 18세기 영국에서는 민간인의 고소가 있어야 재판이 가능했다.일단 고소를 하게 되면 범인 체포,재판 비용 모두를 고소자가 지불해야 했기에,돈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억울한 사정을 당했어도 '벙어리 냉가슴'으로 끙끙 앓아야만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이 글이 2012년 본격 미스터리문학대상을 수상했으며,작가 미나가와 히로코 2013년 추리소설 발전에 공헌한 작가에게 주는 일본 미스터리문학대상의 제16회 수상자가 되었던 만큼 미스터리대상으로 손색이 없는 걸작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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