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4 - 고국원왕, 사유와 무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고구려 시리즈가 중반을 넘어 후반부로 넘어가고 있다.을불이 태왕 미천왕(美川王)으로 국사를 관장하고 그의 주변세력을 공고히 한다.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듯 전왕(前王) 봉상왕(烽上王)은 왕권강화를 위해 자신의 혈족인 왕족들을 억압하고 제거했던 것은 비정한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방약무인과 같은 전권행위는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고구려의 고토(故土) 낙랑(樂浪)을 축출한 을불은 두 자식인 사유와 무에게 권력을 넘어 주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면서 그의 머리 속은 누구를 차기왕으로 내세워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뇌에 빠지게 된다.

 

 당시 4세기 초.중반의 상황은 선비족인 모용외가 아들 모용황에게 국방과 권력을 넘겨 주던 시기이고,아래로는 백제가 고구려를 넘보던 시기였기에 을불의 부하들은 당연 용맹성과 왕재를 겸비한 무(武)가 을불의 뒤를 잇는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반면 장자인 사유는 성정이 착하고 유약하기만 하다.그러한 가운데 을불은 무가 태자로 옹립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사유를 태자로 결정하는 용단을 내리게 된다.고구려가 남녀균분상속제도이었던 시대라 장자가 반드시 태자로 되는 것은 아니었던 만큼 무가 태자로 되었더라면 고구려의 역사,문화 등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라는 의문을 갖어 본다.을불은 사유를 태자로 결정하면서 '열(熱)에 들떠 있던 분위기'가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한 상황으로 바뀌고 만다.이제 사유가 을불의 뒤를 잇는 태자로서 장차 막중한 국사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가 없다.

 

 미천왕 14년 낙랑이 고구려의 품으로 돌아오면서,고구려는 기세등등하기만 했다.'낙랑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는 말처럼 그간 낙랑은 거대 교역도시로서 주변국들과의 왕성한 물자교역과 세력이 커져 있던 만큼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다 보니 부풀대로 부푼 풍선이 '푹' 꺼지고 마는 것과 흡사했으리라.우선 을불은 친정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유가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과 왕재로서의 자격을 조금씩 익혀 나간다.을불이 사유를 태자로 결정한 이면에는 그가 봉상왕 시절 종조부 안국군의 격려와 유지에 따라 낙랑,숙신 등을 떠돌면서 고구려에서 흘러 온 유민(流民)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국정을 책임지던 국왕의 학정 등을 보고 겪으면서 국가의 존재와 가치관을 몸과 마음으로 삭히고 터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지금으로 따진다면 소수계층이 다수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사회제도를 모두가 상생하는 살맛나는 세상을 꿈꾸었기에 을불은 무의 정권이 아닌 문의 정권을 꿈꾸었으리라.

 

 한편 전연(前燕)의 기초를 닦은 모용외는 여인 주아영과 예상치 않은 정사로 인해 태어난 자식이 모용황이다.모용황은 아버지 모용외 이상으로 남자답지만 폭악성과 용맹성이 모용외 이상이었다.사유가 태자로 결정되면서 미천왕의 비(妃)인 아영은 사유의 태자비까지 결정하게 되는데,그가 아달휼 대장군의 부인인 선빈을 엮어 주었듯,이번에는 아달휼의 딸 정효를 태자비로 앉힌다.아영은 고구려가 평정을 되찾으면서 경연,동맹제를 개최하는 등 국가의 면모를 정비해 나간다.아영은 성격상 유유자적하게 유한족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미모와 지략을 한껏 발휘하는 당찬 여성이다.아달휼 대장군을 필두로 한,선비와의 전쟁이 벌어지고,을불도 직접 전장(戰場)에서 진두지휘하는 모습도 엿보인다.한편 무는 태자가 되리라는 기대와 격려 속에서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사라지면서 행방불명이 되고 마는데 이는 아영이 시킨 것이었다.국사는 사유에게 맡기되 국방과 관련해서는 무가 전적(戰積)과 공훈을 쌓으면서 무의 미래를 격려했던 것으로 보인다.낙랑의 최비는 이제 신체적,정신적으로 쇠약해지면서 을불의 위로를 받으면서 회한을 나누고 유대를 맺어 가고,모용외는 모용부에게 패배하면서 모용부는 나라를 세우는데 국호는 연(燕)이다.

 

 고구려는 이웃 모용부와의 지리한 전쟁이 이어지면서 국상 창조리,여노 장군이 전장의 중심부에 있고 을불은 진두진휘를 한다. 다가오고,사유는 선비와의 화해 차원에서 모용외를 직접 만나 사신으로서 모용외를 찾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여기에 고구려 백성만을 위해 온 게 아니라 선비(鮮琵)의 백성을 위함은 바로 모용 대선우를 위한 것입니다.","전쟁이 없어 백성이 평안하면 군주가 기쁜 법 아니겠습니까?" -P234

 

 모용외는 사신 사유를 우습게 보면서 자식 모용황을 처단하려 했던 자세를 바꿔 고구려에 선전포고의 전권을 주는데,그의 뇌리에는 아영이라는 여인과의 관계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전쟁마저 승패가 보이지 않자 그렇게 내뱉었을 것이다.사유가 모용부 군사에게 화살을 맞지만 을불의 사기진작에 고구려는 전열을 가다듬는다.모용외도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생을 마감하고,을불은 모용부와의 전쟁의 최후를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고구려 제15대 태왕 미천왕 : AD300~331년)

 

 을불은 폭군 봉상왕을 몰아내고 태왕의 자리에 오른 뒤 서쪽으로는 한사군을 되찾았으며 북쪽으로는 선비족을 꺾은 불세출의 영웅.밖으로는 숙신을 품에 안고 안으로는 민생을 깊이 살피어 만백성의 사랑을 깊이 받은 성군.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고 단 한 번의 반란도 겪지 않은 위대한 군주.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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