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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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다. 현대판 계급 사회가 횡행하면서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 득실거리고, 그렇지 못한 부류는 아침 이슬과 같은 존재인 것 같이 무상하기만 하다. 힘깨나 있는 자들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자들은 늘 소외되고 없신여김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세상이치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절대 다수인 힘없는 계층이 없다고 한다면 힘깨나 쓰는 사람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사람만 좇고 우러러 볼 것이 아니고 우리 주위에 흔히 있을 법한 범부들의 인생 얘기를 들어보는 것도 삶의 의미를 더욱 가치있게 수놓는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가끔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되뇌인다. 연령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오는데 오십대인 요즘엔 뭔가를 펼치는 것보다는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면서 타인에게 나눠 줄 것은 주려고 한다. 평정심에서 우러나오는 작지만 의미있는 삶의 가치, 지혜, 경험 등을 현재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려고 한다. 그러한 것들이 사소하고 볼품이 없을지라도 타인의 마음에 전달되고 스며들어 각박한 세상이 조금씩 따스하고 살맛 나는 세상으로 변해져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작고 볼품없는 것들을 줄 수 있다면, 거꾸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 소중하고 의미있는 타인의 삶의 지혜, 가치, 경험담 등을 귀담아 들으면서 '인생이란 다채로운 것이다'라는 것을 내 가슴에 품으며 이해의 폭을 넓혀 가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잘못 살아온 시간들을 성찰하면서 더 큰 존재로 거듭나고자 한다.

 

 김훈 작가의 작품을 오랜만에 접했다. 위에서 살짝 얘기했듯 우리 주위에 있을 법한 한 가족의 얘기를 마치 얘기 늘어 놓기를 좋아하는 할머니의 얘기를 귀를 쫑긋하고 듣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삶의 길이는 사람에 따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겠지만 흔히 말하는 그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모나지도 않고 특기할 만한 것도 없는 것 같지만 개인의 생애에는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세월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극복하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가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게 되면 질곡과 같은 세월을 감당해야만 한다. 나는 마동수 일가(一家)의 삶을 접하면서 가족이란 이렇게 처연스러울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해방 후 박정희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마동수 가장(家長)과 아내 이도순 그리고 두 아들인 마장세, 마차세 등의 삶의 면면이 꽃길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걷고 또 걸으며 살아갔던 흔적이 역력하다. 마동수 일가의 삶 자체가 어쩌면 나와는 거리가 있을지라도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흔히 밥벌이를 위해 모든 존심을 버리고 억척같이 살아야만 하는 지난한 삶 자체를 작가는 쉽지만 가슴 절절한 심정으로 그려내고 있다.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기억은 바래어져서 아무런 현실감이 없었지만, 임박한 죽음보다 더 절박하게 마동수를 옥죄었다. (중략) 세상은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p65

 

 마동수 형인 마남수가 일제 강점기시 조선에 들어온 미국 국회의원 행렬을 구경하러 갔다가 일본군에게 불령선인으로 오인받아 매 맞고 비명횡사할 뻔한 마동수 형이 풀려나 형의 허기를 채워주던 날의 기억을 되살린 것인데, 당시의 상황과 선연한 기억이 마동수의 마음을 크게 옥죄었을 것이다. 마동수의 젊은 날의 삶의 무늬 역시 차창에 서린 뿌연 김과 같이 앞길이 밝지 않았다. 학업에 진전이 없어 퇴학을 당하고 중국에서 하춘파의 하숙방을 거점으로 구릿내 나는 일들을 하면서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남태평양 괌에서 폐철 사업을 하는 첫째 마장세, 그리고 한국 철 물류 회사에서 일하는 둘째 마차세 역시 얼굴을 맞대며 형제의 우애를 나눌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 특히 첫째 마장세는 아들로서 부모의 장례식에 와야함에도 시간과 거리를 핑계 삼아 이국에서 발이 묶이고 만다. 부모 장례 처리는 둘째인 마차세 몫이 되고 만다. 마차세는 결혼을 하여 따뜻한 가정을 갖게 되고, 마장세 역시 괌에서 만난 여인과 동거를 하게 되지만 가정을 이루지는 못한다. 괌에서 진행하던 폐철 무수히 바다 속에 집어 넣어 괌 당국에 적발되면서 마차세 회사까지 영향이 가게 된다. 이렇게 마동수 집안은 잘나지도 않고 드러낼 수도 없는 집안으로 풍비박산이 되는 형국으로 끝나고 만다.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는 지우고 싶어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인상이 많을 것이다. 이것이 은연 중에 자신의 삶에, 의식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개인이든 다수든)와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으며 더 좋은 때와 시간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나은 존재들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세속의 인간일진대, 김훈 작가는 왜 곡절 많고 냉기가 가득한 마동수 일가의 삶을 조명했을까. 인간의 삶과 생애는 저울로 잴 수도 없고 잣대로 잴 수도 없는 사소한 것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시사하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았을까. 나 또한 이 글을 읽고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삶에 대한 시각을 보다 현실적이고 냉철한 각도로 접근하려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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