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한빛문고 1
이문열 지음 / 다림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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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호랑이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는 의미다. 예나 지금이나 크고 작은 집단 속에는 호랑이는 못되지만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의 행세를 톡톡이 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다. 게다가 인간의 속성상 알찬 내면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개개인을 평가하고 행세하려 든다. 그러한 행세를 하는 사람을 일종의 힘께나 쓰는 권력자라고 여긴다면 과연 그것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까. 그러한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속편하게 따라가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사람들도 알고보면 속은 새까맣게 타들고 만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힘깨나 쓰는 사람들의 수명도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이 진리다.

 

 누구나 추억이 서린 학창 시절이 있을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보다는 누군가의 두터운 배경을 뒤로 삼은 위압적인 존재감을 갖은 자가 있을 것이다. 같은 또래이지만 몸집, 목소리 톤, 위압감 등으로 주위를 지배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만다. 나도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 몸집도 크고 공부도 잘하며 선생님들의 신임을 듬뿍 받던 동창이 있었다. 나는 몸집도 크지도 않고 싸움을 잘하지도 못해 그가 내겐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약간 껄렁껄렁하는 아이들과는 보이지 않는 갈등과 알력으로 가득찼다. 앞서도 말했듯 그는 놀기도 잘하지만 언제 시험공부를 했는지 성적 결과는 최상위권이었다. 거북이의 걸음으로 쉼없이 걷고 움직이는 나는 시험결과는 그보다 뒤떨어져 열등의식에 사로 잡히기도 했다. 다만 나는 쉼없이 노력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선생님들에게 인정받아 격려와 칭찬이 힘이 되었다.

 

 이문열 작가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주인공이 학창시절을 회고하는 형식의 이야기를 스케치하고 있다. 학창시절은 바로 엊그제 일처럼 선연하게 다가오는데, 학창시절의 갖가지 에피소드가 마치 한 사회의 단면을 압축해 놓은 파일과 같다. 서열, 위계의식, 권력 등으로 똘똘 뭉쳐진 급우 집단 속에서 불세출과 같은 하나의 영웅이 나이가 들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가지만, 예상외로 그 영웅은 학창 시절의 기억 속에서만 영웅이었지 성장하여 사회인이 되었을 땐 물거품과 같은 초라한 행려자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앞선다. 주인공은 바로 엄석대이고 이 글의 전반을 이끌어 가는 자는 서울에서 남쪽 바다 미포가 있는 곳으로 전학 온 한병태이다.

 

 또래보다 두 서너살이 많았던 엄석대는 공부도 잘하고 담임 선생님의 신임도 두터웠던 모범생 중의 모범생이었다. 그런데 읽어가다 보니 엄석대에겐 담임의 힘을 빌어 급우들을 짓밟는 뭔가가 다분하다는 생각이 하나 둘씩 들게 되었다. 엄석대는 반의 보스 역할을 자처하고 반 아이들은 그를 따르는 호위무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무원인 신분의 아버지를 따라 전학 온 한병태는 엄석대의 꼬락서니가 맘에 들지 않아 담임께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러 바치려다 되레 본전도 찾지도 못하고 교무실에서 쫓겨 나고 만다. 한병태는 합리적 사고와 자유가 몸에 배여서인지 엄석대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행위들이 영 맘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간이 흘러 담임도 바뀌고 엄석대를 위한 대리시험 행위가 발각되면서 엄석대의 영웅은 산산조각이 되고 만다. 게다가 반장 선거에서 엄석대는 선출되지 않는다. 그의 자존감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는 교실을 뛰쳐 나가 영영 한병태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26여 년이 흐른 뒤 경찰에게 잡혀 가는 엄석대의 일그러진 영웅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내게 국민학교 시절의 영웅은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했던 친구가 있다. 나이는 같은데 몸집도 크고 공부, 운동, 싸움 모두가 만능이다. 그러나 엄석대와 같이 누군가의 힘을 빌려 행세를 했던 친구는 없다. 나는 꾸준하게 공부를 하는 스타일이고 그 친구는 공부하는 방법과 포인트를 잘 파악하는 학생이었다. 시험이 닥쳐오면 3당4락이라는 마음자세로 시험준비에 돌입한다. 시험결과는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그 때는 그것이 최고였는지 모르지만 어른이 되고 자식을 기르고 노후가 가까워지면서 내 마음 속의 영웅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을 제쳐 놓고 마음 편하게 행복한 시간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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