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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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의 긴장감과 설레임을 품고 까칠하게 자란 수염을 면도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아마 결혼식이나 중요한 이벤트, 드물게 만날 법한 사람과의 면담을 앞두고 면도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하얀 와이셔츠에 양복,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의 묘한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수염이 많지 않은 타입이라 촉감으로 까칠다 싶으면 바로 전기 면도로 손질해 주면 그만이다. 매우 심플하다. 기대와 설렘, 긴장이 섞인 의례적인 면도식이라고 하면 거창한 표현일까. 이제 오십을 넘은 인생길이지만 기대, 설렘, 흥분, 긴장을 더 품을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럴려면 덜 스트레스 받고 부풀어 오르는 소소한 세로토닌이 몸 안에 퍼져 갔으면 더 좋겠다.

 

 잡지 안안(Anan)에 실린 50여 편의 연재물을 단행본으로 엮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는 무라카미 작가다운 풍모가 선명하게 연상된다. 어디에 구속받지 않은 작가만의 자유분방함과 모던함이 어우러진 일상의 풍경을 담백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무미건조하게 재미없게 살아 온 내게는 이 50여 편의 글들이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기도 하고 약간의 샘이 나기도 한다. 그만큼 세속의 기준에 내 자신을 까워 넣어 살아 왔던 것이 몹시 후회가 된다. 이왕지사 다 잊고 지금부터는 더 멋진 내일을 향해 질주해 나갈 것을 스스로 다짐해 본다.

 

 나이 오십이 넘으면 어느 정도 인생의 강판 두께가 두툼해질 뻔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족과 함께 맛난 음식 기행도 하고, 중국 칭장 열차를 타고 산업화에 때묻지 않은 청정지를 온몸에 담아 내고 싶다. 수도없이  마음으로만 갔다 오는 곳들은 마치 몇 번이라도 다녀온 듯한 착각과 친근감을 안겨 준다. 무라카미 작가는 여행과 음악, 케쥬얼한 차림으로 여러 곳을 주유(周遊)했던 체험이 글 속에 고스란히 녹아내려져 있다. 또한 그가 쓴 원서(原書)를 보면 군더더기 없는 현대 일본 표준어가 특색이다. 재즈와 클래식에 심취했던 무라카미 작가는 이러한 장르의 에피소드를 늘 싣고 있다. 누구나 음악을 싫어할 리는 없겠지만 무라카미 작가만큼 음악의 독보적 애호가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세상은 중고 레코드 가게이기도 하다"라고 한 멋진 대목은 연륜과 경험치가 깊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재킷을 만져 보고 냄새를 맡아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시기에 발매된 것인지 대충 안다. 무게와 종이 감촉만으로도 '이건 오리지널이군' '이건 재발매로군'하고 순식간에 구분한다. -p83

 

소소한 일상의 소재들을 한 편의 글로 실어 낸 이 글을 읽다 보니, 작가란 많은 곳들을 유랑자가 되어 듣고 쓰고 렌즈에 담아 내는 정신적 노동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러한 행위들이 누적되어 창작의 모티브가 되고 수많은 독자들과의 교신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 글은 무라카미 작가의 사고방식과 느낌과 취향가 표현방법과 다양한 요소들이 골고루 배여 있다. 그가 쓴 다른 글을 읽는데에도 그의 생각과 취향,사고방식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명곡 윌슨의 〈캐롤라인 노〉를 들어 보련다. 인생과 시간의 합주를 고요히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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