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플레
애슬리 페커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결혼 생활 30여 년을 보내고 자식들은 장성하여 출가해 딸랑 부부만 남은 집에는 어떠한 그림들이 그려질까.지난 온 삶의 여정 속에서 부부라는 원칙을 잊지 않고 살아 왔다고 해도 삶의 종착역이 멀지 않은 노년에겐 또 다른 무늬의 풍파가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만큼 인생의 갈래갈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그래서 순간 순간 서로에게 어깃장 놓지 않고,모나지 않게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기나 긴 인생 가운데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날들은 핑크빛보다는 짙은 회색과 암청색이 드리운 대기(大氣)가 더 많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나도 어느덧 중년을 훌쩍 넘어 장년으로 가는 언덕에 서 있다.언덕 위에서 바라 본 지난 온 삶의 이력은 좋았던 일보다는 후회와 미련,죄책감,미욱함을 더 느끼곤 한다.인생이란 사고팔고(四苦八苦)의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하는 나라,터키의 문학을 오랜만에 접하게 되었다.특히 글감이 삶의 고단함을 치유하는 것이어서 더욱 마음이 끌리고 말았다.내 삶의 여정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울퉁불퉁하고 비 온 뒤 진흙탕길과 같은 모습이다.결혼 생활 20여 년이 좀 넘은 이 시기에 건강하고 경제적 수입이 안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역주행하고 있는 것과 같아 아내의 심산도 그리 밝지만은 않다.결혼 전에는 서로의 세세한 기질과 성격이 알게 되고,궂이 말을 하지 않더라고 가족과 부부라는 명제를 잊지 않으려 힘을 쓰지만 대개는 외부적인 환경의 요인에 의해 생각과 감정에 변화가 생기곤 한다.나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지만 아내는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싶어한다.생각과 감정의 표현도 마찬가지다.그래서인지 어느 순간 서로가 갖고 있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 분란이 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째째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명절 무렵 금전 지출 면에서 본가와 처가로 나가는 돈의 규모에 대해 아내는 매우 민감하게 느낀다.형편이 좋을 때엔 하자는 대로 따라가지만 그렇지 못할 때엔 할 도리만 하는 게 내 신조인데 아내는 내 입장과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동등하게 해 주어야 한다면서 순간 얼굴을 붉히고 큰소리를 칠 때가 있다.내 자신이 자정(自淨)하여 돈 문제,부부 간의 화기(和氣)에 금이 가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다.

 

 이 글은 세 부부의 얘기가 나온다.사는 곳,하는 일,처해 있는 입장과 형편 등이 각양각색이다.공통점은 등장인물이 초로의 부부이면서 알콩달콩 사는 모습이 아닌 길을 걷가 한 쪽 다리를 접지른 느낌과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부부라는 관계가 원활하게 돌아가야 하지만  이 글에선 내내 혈관이 좁아지고 막혀 버린 상황과 흡사할 정도로 마음의 통증이 느껴진다.세 부부는 바로 릴리아,마크,페르다 부부를 가리킨다.필리핀 태생으로 미국 생활 37년 된 릴리아와 아니 부부는 결혼 생활의 지겨움 또는 갱년기를 맞이한 탓일까.서로에게 최소한의 애정만을 표하면서 각방을 쓰는 부부다.그런데 남편 아니에게 뇌 혈전증이 찾아오면서 릴리아는 하숙생들을 두면서 마음의 변화를 보이는 듯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또한 그들에겐 베트남 출생의 두 아이를 입양해서 양육하지만 그들이 성장하여 '기른 정'을 잊은 듯 배은망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두 번째 부부는 만화 화랑을 운영하는 마크라는 남자는 아내 클라라의 우울증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방황하는 마음을 다독이고 치유하고자 요리 공부에 전념한다.

 

 끝으로 세 번째는 페르다 부부다.페르다 부부 얘기는 '부부'의 얘기를 늘어 놓기보다는 페르다의 친정 엄마 네시베 부인 및 딸 오이쿠의 얘기를 주로 노출하고 있다.치매에 걸린 친정 엄마 네시베 부인의 예측불허의 언동으로 가족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역력하기만 한데,페르다는 이것을 내색하지 않고 이겨 나간다.네시베 부인은 먼저 떠난 페르다의 언니 이름을 자주 들먹이면서 과거에 집착한다.자주 기절하고 항우울제를 장기 복용하면서 알콜 도수가 높은 양주도 빠지지 않은 그녀의 친구였으니 뇌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런지.이렇게 세 부부가 처해 있는 입장과 형편이 음울하다 보니 뭔가 마음의 치유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애슬리 패커 작가는 수플레(달걀 흰자 위에 우유를 섞어 구운 요리)를 소개하면서 릴리아,마크,페르다가 겪는 음울하고 고단한 삶에 치유의 힘을 불어 넣고 활력을 되찾아 가고 있다.특히 아내 클라라를 먼저 앞세운 마크는 요리의 전도사로 자처할 만큼 수플레 요리에 적극적이다.《엄마의 부엌》을 앞에 두고 열심히 요리 공부하는 마크는 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클라라를 그리워한다.

 

 부엌은 엄마의 가슴이고,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며,우주의 중심이다. -p145

 

 각종 도구를 이용하여 계란 흰자,우유,밀가루,설탕 등을 잘 배합하여 원하는 모양과 빛깔을 만들어 낸 후 엄마의 넓은 가슴,사랑의 의미,인간의 삶이 무엇인가 등을 체현해 갈 것이다.수플레 종류도 다양하기만 하다.새우.치즈.랍스터.치즈와 베이컨.캐러멜.아이스크림.호박.복숭아.모카.시금치.커피.무화과 수플레 등인데 나는 아직 이것을 입에 대보지를 못했다.과연 어떤 맛이 나고,고단한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을까를 머리 속에 그려 본다.수플레를 만들면서 이에 집중하고 완성된 수플레 작품을 보면서 마음 든든함과 상처난 영혼을 아물게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인생의 선물이 어디에 있을까.하나의 음식을 만들어 가면서 느끼는 기쁨과 환희,치유의 힘을 얻어 간다면 또 다른 세상을 얻은 것과 별반 다를게 없을 것이다.또한 잠시나마 좋지 않은 일,생각하기 싫은 것들을 잊어 본다면 세상은 그래도 살아 갈 가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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