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팔천 - 나도 사람이 되고 싶다
이상각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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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란 근본적으로 인격이 부인되고 타인에게 소유되어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을 말한다. -p5

 

 한국 역사 속에 노예제도가 오랜 세월 지속되어 왔다.현대사회에는 노예제도라는 명칭은 없지만 그와 유사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즉 사람을 부리면서 임금을 주지 않고,인간 이하의 대우를 하고 있다면 노예취급과 별반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사적으로 사람을 다루며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빼앗고 착취하는 입장에 있는 자들이 현대판 노예주는 아닐까.한국사 속에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민초들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있을진대 그것이 바로 양천제도 가운데 천(賤)에 해당하는 노예제도임과 동시에 천한 직업으로 불리웠던 것으로 보인다.조선시대의 최하층 계급으로 수탈과 차별에 저항할 능력을 상실했던 천민들의 삶이 『조선팔천』에 잘 나타나 있다.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는 길을 도주가 유일했다.도주에서 성공하면 자유인이 되지만 실패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는 신세였다.

 

 조선시대는 양천제도와 반상(班常)제도가 있었다.양반과 천민으로 불리던 신분제도가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양반과 상민으로 바뀌었던 셈이다.양반을 제외한 천민과 상민은 사회적으로 출세할 길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특히 서자 출신인 서얼(庶孼)은 아버지는 같되 어머니의 배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신분이 막혔던 것이다.그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을까.16세기경 조선 인구의 30퍼센트에 해당하는 150만여 명이 노비였다고 하니 신분차별이 매우 심했던 동방노예지국이면서 한편으론 (아이러니하게도)동방예의지국이라는 딱지가 붙기도 한다.천민으로 불리던 조선의 노비들은 겉으론 출산 휴가,조상 제사까지 지낼 수 있어 하층민으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것은 민족적 자존심이 개입된 억지 논리에 불과할 뿐이다.노예라는 신분이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해방이 되었지만,아직도 갑의 입장에 있는 일부 몰지각하고 비이성적인 부류들이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노예 이상으로 착취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회적 모순을 고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조선시대는 노비(奴婢)라는 관점에서 하층민을 대하고 있다.노는 남자 종을 일컫고 비는 여자 종을 일컫는다.노비라는 천민을 8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내가 모르고 있었던 신분들이 많아서 어안이 벙벙했다.익히 알고 있었던 노비을 비롯하여 기생,백정(白丁),광대,공장(工匠),무당,승려,상여꾼이 조선팔천에 해당한다.노비 제도는 고조선 시대로 회귀한다.《한서》지리지 고조선의 팔조법금 가운데 노예제도의 기원이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그것은 범죄자에 대한 징벌이었고,일정 벌금을 내면 노예 신분에서 풀려날 수도 있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사목,자속(自贖)하려는 자는 1인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p10

 

 천인에 대한 차별은 양인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양천제를 바탕으로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천인이 있으면 천인으로 삼는다는 일천즉천(一賤卽賤)규정을 강력 시행했다.노비는 8대까지 천류(賤流)에 관계되지 않아야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형벌 조항도 강화되어서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치거나 반항,모욕,모함하는 죄를 저지르면 사형에 처해졌고,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해도 주인을 고발할 수 없었다.예외가 있다면 역모와 그에 해당하는 범죄를 고변할 때뿐이었다.반대로 노비가 공적인 죄를 지었을 때 주인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다만 고려의 노비 가운데 공노비는 60세가 되면 신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사노비는 국가의 허가를 받으면 면천이 가능했다.

 

 고려의 정치체제를 일정 부분 이어받은 조선의 신분제는 양천제를 고수해 나간다.조선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문명생활을 누렸다.시간이 흘러 조선의 신분제도가 지배계급인 양반과 중인,피지배계급인 양인과 천인으로 고정되어 갔다.네 갈로 바뀐 계급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양반은 조선 사회의 최상위층에 있던 현직 관료와 전직 관료 그리고 선대의 관료 경력이 4대를 넘지 않는 자손을 총칭한다.둘째,중인은 하위직인 기술관을 비롯하여 서얼(庶孼),중앙의 녹사와 서리,지방의 서리인 호장,육방과 향리 계층을 통칭한다.셋째,양인은 평민으로서 상인도 포함되지만 거의 모두 농민이었다.양인은 공명첩을 사들이거나 뇌물을 바쳐 양반이 된 양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허울에 불과했다.넷째,천민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지만 주로 공.사노비가 가장 많았다.《경국대전》이 완성된 성종 이후 신분제도가 가오하되면서 다양한 계층의 천민이 양산되었다.즉 사노비.승려.백정.무당.광대.상여꾼.기생.공장 등이 대표적이다.자유인이 되고 싶어 공명첩,납속책이 발행하여 팔자를 고치려 했던 천민과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던 양반에 대한 조소(嘲笑)은 극과 극을 달렸다.

 

 조선팔천이라는 천민 계층 가운데는 흥미를 돋구는 부분도 많다.팔천 가운데 최상위 계급인 공노비와 짐승보다 못한 사노비의 운명은 극대조를 보인다.몸을 팔던 유녀에서 노비의 아내가 되고,노래와 춤을 배워 기생이 되었던 장녹수는 연산군의 사랑을 받아 정3품 소용(昭容)의 지위에 오르고 왕자를 셋이나 낳은 인물이다.조선 사회의 최하층 계급으로 신분을 바꾸는 첩경은 역모에 참여하는 길이었던 백정들은 배타적인 생활을 꾸렸다.유랑 및 별도의 부락을 형성하면서 일반민과는 통혼하지 않았다.백정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반말을 들어야 할 정도로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연산군대 화극으로 잘 알려진 광대 공길(孔吉)은 연산군 앞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다 매질과 유배형에 처하기도 했다.『한복 입은 남자』로 알려진 장영실은 본래 공장(工匠)이다.그는 천민에서 당하관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지만,세종 재위시 어가(御駕)를 부실하게 만들어 탄핵을 받고 죄인의 몸이 되었다.곤장과 함께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신과 교접하여 병든 이를 고치고 액사를 막아주던 무당들은 현대인들의 생로병사와 재수(財數)를 관장한다.고려 말의 개혁 정책에서 불교가 1순위 개혁 대상이었다.이어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의 승려들에 대한 괄시와 천대를 일삼게 되었다.왕조와 사안에 따라 불교를 숭불하기도 했고,억불하기도 했다.그리고 끝으로 초상이 나면 사자의 시신은 화려한 꽃상여를 타고 애절한 상엿소리와 요령(搖鈴) 소리와 함께 이승을 떠나게 되는데,산 자의 집에서 죽은 자의 무덤까지 상여를 운반하는 천대받는 신분이 상여꾼이었다.1886년 신분세습제 폐지와 1894년 신분제 폐지로 인해 이 땅에 천민이 해방되었다.시대와 직업의 귀천의식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과연 현대판 노예제도가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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