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보다.자꾸만 옛 시절이 생각이 난다.조부모,부모,형제자매 열식구가 좁디 좁은 초가집에 옹색하게 살았던 시절이 엊그제만 같다.제대로 된 공부방도 없고 도서관도 흔치 않은 시절이었지만 산과 들,사계의 변화를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성장하던 시절은 시간도 더디게 흘러갔다.함께 놀던 고향의 친구들과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산산조각난 파편처럼 바람과 공기의 힘에 의해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 것과 같이 쓸쓸하기만 하다.조부모,아버지 모두 고인(故人)이 되어 어쩌다 꿈 속에서나 마주칠 뿐이다.명절이 찾아오면 고향에 내려가지만 개발도 인해 산천도 변하고 사람도 옛 사람이 아니다.타관에서 흘러 들어온 낯선 사람이 수두룩하다.옹색하고 불편했던 시골 생활이었지만 어린 시절 내게 꿈과 희망을 안겨 주었던 고향과 가족은 무언의 보물이고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에쿠니 가오리 작가 최신작 《포옹 또는 라이스에는 소금을》은 3대에 걸친 가족사를 그린 글이다.『냉정과 열정 사이』가 남.녀 간의 로맨스라는 좁은 범주를 그렸다면,이번 작품은 시간적,서사적으로 장중한 파노라마 성격을 띠고 있다.가족사가 홈 드라마와 같이 한지붕 아래에서 발생하는 정적인 면이 다분하지만,시간과 공간이 역동적이고 다수의 등장인물을 배치하여 지그재그식으로 스토리를 엮고 있는 점이 이번 작품의 특색이 아닐까 한다.러시아 혁명,(일본의)종전(終戰) 그후 후세들의 삶의 방식이 오밀조밀하게 묘사되고 있다.중년에 들어선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삶의 풍부한 경험과 이력이 3대에 걸친 가족사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가족을 소재로 글을 쓴 이유를 에쿠니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어,학교라든지 가족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보내는 아이들의 시간을 어른들은 알지 못합니다.마찬가지로 어른들이 살아 온 시간을 아이들은 모릅니다.아주 가까이에 있는 한 가족임에도 서로 평생 알지 못하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그 점이 재미있게 다가왔고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이렇듯 패치워크 형식으로 써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p582 

 

 세대간의 갈등과 다툼,위화감도 서로의 삶을 진지하고 진실되게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법이다.윗세대는 아랫세대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아랫세대는 윗세대의 삶의 이력을 이해하면서 소통.대화하면서 가족이라는 혈육의 정,보살핌,사랑,희생,존경의 뜻을 조금씩 쌓아 나가야 한다.그러한 의미에서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은 3대 간의 미처 몰랐던 삶의 이력과 삶의 방식을 윗세대에서 아랫세대로 내려가는 순차적 방식이 아닌 가족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화자가 되는 교차식으로 그려 냈다.시간도 예스러움이 묻어나는 1960년대부터 포스트 모더니즘이 짙은 2006년대까지 스케치하고 있다.

 

 야나기시마 일가의 이야기는 1930년대 영국 유학중이던 할아버지 다케지로는 피로 얼룩진 러시아 혁명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 온 할머니 기누를 만나 하나가 된다.일본이 종전을 맞이할 때까지 큰 딸 기쿠노,둘째 딸 유리 그리고 외동 아들 기리노스케를 낳는다.큰 딸 기쿠노는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워 노조미를 낳고,둘째 유리는 결혼을 하지만 병약하여 친정으로 쫓겨나다시피 했다.막내인 기리노스케는 노총각으로 남는다.큰 딸 기쿠노는 여행지에서 도요히코를 만나 결합을 하지만 도요히코 역시 아사미라는 여인과 관계를 갖고 우즈키를 낳는다.결국 기쿠노와 도요히코 사이에서 제대로 낳은 자식은 고이치와 리쿠코이다.문학상을 수상하고 역사소설을 준비하는 리쿠코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점이 눈에 띈다.무역상으로 시작한 다케지로 할아버지는 비단도매상을 승계하고 증조부가 남긴 서양식 대저택에 3대가 알콩달콩  살아가는 식이다.또한 야나기시마 일가는 3대라는 시간적 길이도 꽤 길고 가계(家係)가 꽤 복잡하다는 점이다.넋 놓고 대충 읽는다면 등장인물이 가족 구성원 가운데 어느 위치이고 어떠한 사람인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야나기시마 일가의 교육관은 공교육을 시키지 않고 실력과 신의가 있는 가정 교사를 채용하여 전인 교육을 시켜 나간다.짧은 기간 공교육에 발을 들여 놓지만 부적응 상태에서 밀착된 가정 교육을 받는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노조미는 베이징에 한의학을 전공하여 홍콩에 자리를 잡고,만년 노총각이었던 삼촌이 암으로 세상으로 떠난다.손자,손녀들이 모두 넓은 세상으로 떠나가고 대저택에는 할머니,기쿠노 어머니,유리 이모만이 남게 된다.북적북적한 가운데 사람 사는 재미와 힘겨운 시절이 있었던지 가족의 애환을 이렇게 늘어 놓는다.

 

 공기에 든 흰쌀밥 자체로 맛있어 보이지만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왠지 소금을 치고 싶어진다는 의미에서 "라이스에는 소금을!"이라 했고 등장인물간에 통용되는 '자유 만세!'이다. -본문-

 

 영원할 것 같았던 식구들과의 삶,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산천초목과의 호흡은 시.공간이 바뀌기를 반복하면서 그 옛날의 고향의 모습과 식구들은 바람과 구름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무정하고 아려한 기억과 추억 뿐이다.이 작품 속에는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러시아 혁명,2차 세계대전이라는 서사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인간의 삶도 이러한 영향권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3대가 가고 나면 또 다시 4,5세대가 이어져 무궁무진한 민초의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마음으로 되뇌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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