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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 한국과 일본, 라면에 사활을 건 두 남자 이야기
무라야마 도시오 지음, 김윤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라면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내게 라면에 대한 급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일본 유튜브에 방영된 『RTG 라면 마구 먹기 여자』를 시청하면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3인 1조가 되어 도쿄에서 가고시마에 이르기까지 하루 세 끼의 라면을 소개하는데,흔히 생각하는 인스턴트 라면이 아닌 수타면에 잘 고와낸 국물이 배합된 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니 라면에 대한 생각과 인식이 급상승했던 것이다.다종다양의 라면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지만 소개된 라면들은 건강과 행복이 물씬 배어나오는 것을 간접 체험했다.정령 일본은 라면 천국인가보다.
라면에 대한 추억은 1970년대 초반으로 동네 하꼬방에서 사온 삼양라면을 양은 냄비에 끓여 스프와 면발이 잘 배합된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형제자매가 많다 보니 한 두개 가지고 여러 명이 먹기에는 부족했다.사이좋게 나누어 먹는다는 생각으로 N분의 1로 나누었지만 감질맛 나는 부족한 양으로 늘 욕구불만이었다.쫄깃하고 은근 중독성을 가미한 스프의 맛이 라면에 대한 첫인상이었던 셈이다.그리고 잊고 있었던 라면은 대학 초년시절 자취하면서 내내 라면으로 속을 채우려 들다보니 식염과 염화수소나트륨으로 가득찬 스프는 위를 깎아 내려 라면을 자주 먹지 않게 되었다.어쩌다 먹는다 해도 면발과 약간의 국물로 끝이다.'후루룩 후루룩' 개눈 감추듯 비워 내는 라면 한 그릇은 식량난으로 어려웠던 시절엔 주식 대용으로,요즘에는 간식과 술국 대용으로 라면을 찾는 것 같다.(Tip : 라면의 칼로리를 줄이는 법 ->끓는 물에 면을 한 번 데친 후 물을 버리고 면을 다시 끓인다.지방이 3분의 1로 줄고 열량은 100kcal 이상 줄어든다.국물은 되도록 남기고 면만 건져 먹는다.열량,지방,나트륨을 줄일 수 있다.)
한국 라면의 역사는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故)전중윤 삼양라면 회장이 서울 하월곡동에 제면공장을 설립하면서 부족한 식량난을 채워 주었다.쌀이 떨어질 무렵 으례 춘곤기와 함께 보리고개의 시절이 있었다.한국 전쟁 이후 국가 재건과 부족한 식량 생산으로 우리 부모세대들은 힘든 삶을 꾸려 가야 했다.게다가 미군이 먹고 남긴 음식을 재탕하는 꿀꿀이 죽 대신 주린 배를 채우면서 영양면에서도 부족하지 않은 라면을 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있듯 전중윤씨 혼자서 라면을 개발할 수가 없었다.내막은 한.일관계가 정상화되기 전 라면의 선두국이었던 일본,그 가운데 묘조식품(明星食品)과 연결되어 전중윤씨는 제면 연수와 극적인 스프 배합표를 얻어낼 수가 있었다.그것은 전중윤씨의 성실함과 근면성,신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1963년 9월 삼양라면의 소매가 10원에서 2015년 현재 소매가 760원을 나타내고 있다.제면업계 초창기는 삼양라면이 독과점 형태를 띠었지만 그 후 여러 제면업계가 출현하면서 복합상권을 형성하고 있다.치열한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기 위해 봉지라면에서 다양한 컵라면에 소비자의 니즈를 가미한 모던 스타일의 퓨전 라면도 출시되고 있다.물론 유탕면(油湯麵)으로 즉석식이다.면을 손으로 뽑아내고 육수물을 잘 배합한 만들어 내는 라면은 비싸기는 해도 질적으로,건강상으로 유익하지 않을까 한다.일본이 라면 천국이라고 했지만 한국에서도 라면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식당이 생기고 홍보하고 손님이 자주 찾아 간다면 인스턴트 라면에서 보다 질높고 건강을 챙기는 라면을 찾지 않을까 한다.한국 전중윤씨와 일본 오쿠이기묘스미씨의 라면에 얽힌 에피소드와 1950,1960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