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120년 만에 밝혀지는 일본 군부 개입의 진상
이종각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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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은 구한말 명성황후 서거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교과서,매체,소문 등을 통해 명성황후가 누구의 손에 살해되었는가는 안개 속과 같다.게다가 이 문제를 파고 들려는 역사 연구가가 많지 않은 것도 안타깝기만 하다.다행히 이종각 저자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관련하여 다방면의 사료를 수집하여 얻은 결과가 이 도서인데,읽어 가다 보니 당연 통한으로 남는 것은 강한 국가,강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명성황후가 시해되던 1895년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은 형국이었다.동학혁명,청.일전쟁은 강대국에게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국내에선 민란이 끊이질 않았고,대외적으로 개방의 압력을 받았던 조선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정책 실행보다는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던 못난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과 불평등 조약(강화도 조약)을 맺었던 조선은 을미사변,을사늑약,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불행의 연속이었다.동학혁명이 거세어지면서 조선 조정은 청국에게 군 요청을 하게 되고,일본은 이에 질세라 청과 일전을 불사른다.결국 이것이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일본은 승리를 거머쥐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는다.랴오뚱 반도를 할양 받으려 했던 일본은 독.프.러 3국 간섭으로 랴오뚱 반도를 할양 받지 않는 대신 청국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다.이 시기 조선 조정은 친일파와 친러파로 분류되는데 친러파의 핵심인 명성황후였다.일본 정부는 명성황후가 눈에 가시,미운 오리새끼였기에 폐제(廢除)하려 치밀한 음모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청.일전쟁의 공신으로 인정 받았던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는 조선에 러시아를 불러 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명성황후를 제거해야 조선에서 일본이 당당하게 세력을 팽창시키면셔 조선을 병탄할 수 있겠다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대신 후임으로 조선에 공사로 온 사람은 바로 미우라 고로였다.거사 전날 군부대신 안경수는 미우라 공사에게 훈련대 해산 예정을 통보하게 되니 미우라 공사 입장에서는 차질없이 거사 성공만 남은 셈이었다.그는 육군 보병 중장출신으로 명성황후 살해를 실행하기 위해 휘하 군부 요인들을 내세워 조선의 심장부를 난입했다.또한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쿠데타로 위장했다.

 

 

 

 명성황후 시해 당일 경복궁 담을 넘어 명성황후 침전이 있는 건청궁까지 난입했던 자객(刺客)들은 명성황후의 거처를 수소문하면서 궁녀들을 시퍼런 칼날로 인정 사정없이 살육한다.이 자리에 궁내부대신을 먼저 발포하고 명성황후를 가장 먼저 칼로 찌른 장본인이 바로 미야모토 다케타로우 소위다.미야모토는 생경한 인물인데 명성황후 살해 직후 우치다 사다쓰치 일본 영사는 명성왕후 살해 사건에 대한 뒷처리를 했던 인물이다.그는 당시 살해 사건에 대한 객관성과 신빙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일등 신민국가인 일본제국이 이웃 나라 왕후를 살해하려 했던 음모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명성황후는 건청궁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시신은 옥호루 뒷쪽 녹산(鹿山)에서 통나무에 기름을 부어 화장하고 유해를 연못에 버렸지만 후환이 두려워 다시 수습하여 녹산에 묻었다고 한다.이후 청량리 홍릉에 이장하고 고종이 승하하면서 남양주 홍유릉(후비포함)에 합장했다.그렇다면 미야모토 소위는 누구일까?

 

 

 

 

 미야모토 소위는 일본 야마구치현 평민 출신으로 동학혁명 정토(征討)에 참여했고,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연루된 소위 네 명 가운데 미야모토가 끼여 있다.일본 정부,대본영은 미야모토와 같이 계급이 낮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하수인으로 내세우고 거사가 끝나면 없었던 걸로 하려고 했던 흔적,심산이 강렬하게 다가온다.미야모토가 거사를 마치고 바로 퇴한(退韓)한 뒤 일본에 머물게 되면 그가 훗날 심경의 변화가 있어 을미사변에 관여했다고 이실직고할지도 모르기에 일본 정부는 미야모토를 타이완 헌병대로 차출시키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크다.미야모토 중위(1858∼1897)는 짧은 삶을 살았다.명성황후 거사 직후 일본 정부에 보낸 제1타전에서 일본 군부가 살해했다는 내용,그리고 우치다 영사가 올린 정식보고서,비밀사신(私信)에서 '육군소위','육군사관'을 왕후 살해범으로 단정하고 있다.그런데 일본 정부는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의미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명단에 미야모토 다케타로우라는 인물은 없다.일본 정부 최고위층,대본영 수뇌부가 조직적.계획적으로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은폐,왜곡,증거 인멸을 획책하고 있다.명성왕후 살해 사건의 주범이 이제야 밝혀져 다행이다.일본 정부는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리발을 내밀 것이낙.역사를 은폐,왜곡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암울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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