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난, 마오로드 - 신이 된 마오쩌둥 나남신서 1795
서명수 지음 / 나남출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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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현대사의 정치 거목 마오저뚱의 고향은 후난성 샤오산(韶山)이다.후난성 성도인 창사(長沙)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마오저뚱이 태어날(1895년) 당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 오지이었다고 한다.그러한 한촌(寒村)이 마오 탄생 120주년(2015년)을 맞이하여 성대한 행사를 치를 예정인데,후난성 성도인 창사를 가로지르는 창장 쥐즈저우(橘子舟) 모래톱에 조성된 마오의 두상은 (인위적인)마오 신을 숭상하는 중국인의 집단 심리가 잘 반영된 것이라 할 수가 있다.마오의 두상은 높이 32m,길이 83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중국인에겐 신중국을 창립한 국부의 상징으로 비춰지고 있는 셈이다.후난성 창사는 인천 공항에서 직항편이 있다고 하니 마오의 고거(故居) 및 주위의 풍광 이를테면 둥팅호를 비롯하여 장자졔,봉황고성,마오가 즐겨 먹었다고 하는 후난 요리(홍샤오러우 등) 등을 즐기고 음미해 보는 것도 삶의 의미를 더해 주리라 기대한다.

 

 

 

 마오저뚱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살아 있는 신(神)이 아닐까 한다.중국 베이징의 심장 톈안먼 광장에 걸려 있는 마오의 초상화부터 중국 인민의 각 가정 벽에 걸어 놓은 초상화 그리고 마오의 탄생 기념을 경축하고 그를 기리기 위해 주조한 특별 동전과 지폐(1위엔부터 100위엔까지)에 이르기까지 현대 중국 사회는 마오에 대한 숭배사상이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물론 중국 인민 모두가 그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산당원 및 농민,노동자 계층일수록 그를 기리는 마음은 신중국을 탄생시키면서 그가 제창한 현대 중국의 이념과 강령이 그들에게 맞아 떨어졌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그를 유일신 및 재물신으로 떠 받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오는 부패한 청말 태어나 창사 제1사범학교를 다니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심취하고 징강산,준이회의를 통해 본격적인 정치 인생이 시작된다.흔히 국공합작이라고 하는 장졔스의 국민당과 마오의 공산당은 여러 차례 합작이 결렬되지만,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당으로서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는다.반면 국민당은 수장과 부하간의 마찰과 잡음으로 분열하면서 중국은 공산당에 의한 신중국이 1949년 탄생하면서 마오가 사망하던 1976년까지 굴곡과 얼룩으로 가득했던 양대사건(대약진 운동과 문혁)을 치르게 된다.마오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현안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만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자연 대재해와 기근,수많은 아사자 발생을 빚은 대약진 운동과 하이루이바관(海瑞罷官)이 마오의 정치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대지주,자본가,지식인 등 반동분자들을 대거 숙청,하방운동에 내몰리게 했다.대약진 운동의 정치적 실패는 당시 정치 2인자 덩샤오핑과 류사오치에게 정치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10여 년의 대동란(大動亂)를 치르고 막을 내렸던 것이다.마오의 네 번째 부인 장칭느 권력욕에 눈이 먼 나머지 문혁 당시 권력 실세였던 덩샤오핑,류사오치,영부인 양광메이를 숙청하기 위해 갖은 모략과 모욕을 주면서 감옥에 갇히게 했다.덩샤오핑은 다행히 좌천되어 훗날 영광의 재기를 했지만 류샤오치는 옥사하고 부인 양광메이는 12년 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정치는 비정하다 못해 피를 볼 때까지 싸우는 것인가 보다.그래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마오 스스로 말했던가.

 

 

 

 마오의 정치 인생은 숱한 굴곡이 있었지만 가장 하류층인 농민과 노동자를 업고 정치를 행사했기에 그나마 오랜 견뎌냈을지도 모른다.국.공합작을 이뤄내기 위해 대장정에 나섰던 마오는 다섯 차례 회의를 갖게 되면서 5대 성지로 꼽히고 있다.대장정의 주역들이 후난 출신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마오를 비롯하여 펑더화이(한국 전쟁시 북한군 지원),주더,류샤오치,화궈펑 등이 후난성 출신이다 한때는 한솥밥을 먹던 의기투합의 정객이었지만 이념,사상이 어긋나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돌아서는 것이 정치의 속성인가 보다.특히 류샤오치는 아내 양광메이와 함께 대약진 운동의 피폐를 딛고 자본주의 길을 몇 십년 앞당길 수도 있었지만 마오의 권력욕과 퍼스트 레이디였던 양광메이에 대한 장칭의 날서린 질투심이 문혁의 동란을 걷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장칭은 문혁의 4인방으로서 반동분자들을 일소하여 마오 사후의 권력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였지만 말로는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장칭은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제 후난 창사를 비롯하여 마오의 고향 샤오산 그리고 류사오치의 고향 화밍러우의 거리는 관광객들로 들썩 거리고 있다.그곳 주위는 홍색성지로 지정되면서 마오를 그리워하고 숭배하는 이들에겐 명소이다.마오가 생전 좋아했던 갖가지 음식도 군침을 돌게 한다.바로 홍샤오러우이다.돼지 삽겹살 및 비계살을 걸쭉하게 만든 요리이다.중국 출장 시절 먹어 본 적이 있는데 부드럽고 쫄깃하며 단백한 맛이 그만이다.게다가 후난성 위쪽은 쓰촨성 아래는 구이저우성이 붙어 있는데 그 지역의 요리가 매운 고추로 만든 요리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마오의 고추사랑은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한다.대장정 시절 고추요리를 먹어야 건강과 활력을 찾았던 것 같다.

 

 

 

 그외 후난성에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크고 넓은 둥팅호와 장쟈졔라는 명산,시간이 멈춰 버린 펑황고성이 예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다.둥팅호는 마오 생전 넓은 강을 횡으로 유영을 했을 정도로 수영을 좋아했다고 하며,장쟈졔는 금강산 1만2천봉과 같이 기암괴석의 연속일 정도로 관객들의 찬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둥팅호 부근에는 위엔양러우가 있다.시인 묵객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시(詩)성지가 아닐까 한다.이태백,두보,굴원 등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오는 곳이다.게다가 산,물,노래,사람이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펑황고성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기에 족한 멋진 곳이다.높게 굽이치는 창랑과 태풍이 지나간 뒤의 모습과 같이 정치적 동지이면서 숙적이었던 마오와 류는 사후 미망인 양광메이에 의해 마오가와 류가가 한자리에 모여 화해와 상생의 길을 마련했다고 한다.양광메이는 부군 류샤오치와 마오저둥 간의 파란 많았던 정치 역정을 내려 놓고 편안하게 삶을 마감하고자 했던 모양이다.중국 정치 현대사의 1세대 주역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2,3세들이 지탱해 나가고 있다.놀라운 경제 성장과 높은 소득 수준을 보이면서 중국인의 삶도 풍요로워졌다.이러한 삶을 살게 된 연유를 마오저뚱에게 돌리려 하는게 중국인의 집단 심리가 아닐까 한다.마오를 유일신이고 재물신으로 여기는 데에는 마오가 현대 중국사에 끼친 정치적,정신적 파워와 영향력이 중국인의 내면에 깊게 각인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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