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디 때문에 아시아 문학선 12
류전윈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풍요로움 속에 빈곤'이라는 말이 있듯 겉으로는 눈부신 발전이 거듭 나아가는 가운데 그늘진 곳에서 고통과 시련을 안고 살아 가는 계층들이 많다.또한 빈곤은 개인의 자력갱생의 여하,사회 구조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부(富)로 나아갈 수도 있고 그대로 빈곤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비단 빈곤이 물질의 결핍 뿐만 아닌 정신적,심리적 결핍,위축에 의해 기인되는 경우도 많다.빈곤에서 탈피하기 위해 몸부림 치면서 극복해 나가려 해도 늘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는 붙박이 인생과 같다.그래서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하고 늘 방황하는 삶을 그린 글을 접하노라면 마음 한켠 애처롭게 다가온다.

 

 이 세상은 늘 빛과 그늘로 나뉘어져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구조인가 보다.이렇게 세상이 극명하게 다른 것을 보면 같은 것도 발견할 수도 있는 법이다.이러한 삶의 구조를 잘 해부하는 작품을 접하노라면 내 깊은 폐부를 헤집으면서 내면이 요동치고 만다.류전윈(劉震雲) 작가는 중국의 주류 계층이 아닌 하류 계층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더 나아가지도 못하는,속칭 비전이 없는 삶의 연속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게다가 그는 내향적이면서 착한 심성의 소유자이다.더 나아가지도 않고 더 올라가지도 않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처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양바이순(楊百順)은 이름도 세 번씩이나 바꾸었다.두부 장수,냉면 장수의 아들이었던 양바이순은 3형제 중 두 번째로 아버지 라오양(老楊)에게 믿음을 사지 못한 탓인지 아버지,형제로부터 유리되어 살아 간다.

 

 류전윈 작가는 고향 허난성 옌진(延津)을 공간 배경으로 다양한 인생살이를 소개하고 있다.개방.개혁의 물결이 덜 미치는 지방 소도시(현청)급의 공간이 배경이지만 삶은 이전투구를 보여주는 듯 각박하고 치열하게 흘러 가고 있다.양바이순이 십대 초반에서 이십대 초반에 이르는 거의 10여 년 간의 정체된 삶을 사실에 부합하게 그리고 있다.두부 장사를 하는 아버지를 돕는 것이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양바이순은 막내 양바이리와 옌진신학 진학을 놓고 제비 뽑기를 하지만 아버지는 양바이순을 옌진 신학에 보내지 않는 것으로 내정하고 막내 양바이리를 보내게 된다.양바이리가 옌진신학에서 착실하게 신학 공부를 하지도 않고 도중에 '펀콩'이라는 이야기 놀이에 심취하게 된다.

 

 십대 초반 양바이순에게는 네이멍구에서 온 라오페이 친구가 전부였고 마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은 식초 제조업자이면서 장례식 사회를 보는 뤄창리(羅長禮)였을 정도로 교제 범위는 극히 협소하기만 했다.양바이순은 잠깐 아버지와 두부 장사를 하다 그만두고 도축,염색공방,신부 라오잔(채마밭 가꾸기),죽업사(대나무 쪼개기) 라오루의 도제가 된다.그 사이 현장(懸長)도 네 명이나 교체된다.인상에 남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온 천주교 신부 라오잔의 운명이다.중국 땅을 밟고 선교생활을 한 지 40여 년이 흘렀건만 신도수는 고작 8명이다.자신을 가장 믿는 사람도 유일무이하게 그 자신 뿐이다.양바이순은 신부 라오 잔과 엮이게 되면서 이름도 양모세로 바꾼다.양모세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된 계기가 찾아 왔다.그것은 만터우 가게를 하던 우샹샹의 남편이 죽으면서 양모세는 우샹샹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고 성(姓)마저 아내 성을 따르게 된다.우모세였던 것이다.우샹샹은 여장부 기질로 남편 우모세에게 수틀리면 손지검까지 한다.만터우를 만들고 팔아 가면서 인생 역전을 꿈꾸기도 하지만 우샹샹은 한지붕 아래서 동상이몽을 품는다.아내 아닌 아내 우샹샹은 은장식 가게를 하던 이웃집 라오 가오와 통간을 하다 결국 옌진을 뛰쳐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제 남은 사람은 우모세와 양녀 챠오 링이다.다섯 살 밖에 되지 않지만 챠오 링은 영악하기만 하다.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아저씨라고 부른다.우모세는 처가의 따가운 시선,(자신의)체면에 압도되어 우샹샹을 찾아 나서는 척 한다.가게를 나와 열흘 간 예정으로 차오 링과 여인숙에 체류하던 우모세는 역전에서 쥐약 파는 라오 요우를 만나면서 얼굴을 트게 된다.엎친 데 덮친 격이었던가.우모세가 바람 쐬러 잠깐 바깥에 나갔다 온 사이 라오 요우는 딸 차오 링을 데리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파란만장한 우모세의 삶에 무거운 더깨를 씌울 줄이야.우모세는 라오 요우의 고향 카이펑을 향해 걷고 또 걸으면서 그들의 행방을 수소문하지만 허탕을 치고 만다.허기와 탈진 속에서 허난의 성도 정저우 역에서 들려 온 목소리는 동상이몽이었던 우샹샹이었다.세면용 더운물을 파는 우샹샹,역앞 귀퉁이에서 구두 닦기를 하는 라오 가오는 염라대왕에게 천형(天刑)을 받았나 보다.우모세의 내심은 분노와 살의가 솟아 나지만 그것으로 끝난다.지난 모든 응어리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우모세는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난다.집시와 같이 정처없는 떠돌이 삶,세 번씩이나 이름을 바꿔야 했던 우모세는 한낱 부평초와 다를 게 무엇이 있겠는가.그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허(虛)을 쫓았던 존재는 아니었을까.빛나지 않고 두드러지도 않는 중국 민초의 고단한 삶을 음미하게 되어 값진 시간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