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고 1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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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은 제목이 신선하고 멋져서 끌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이렇게 멋지다고 느껴지는 제목은 작가 및 편집자의 의도하에 정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글은 그렇지 않다.글 속의 문장가의 입에서 나온 인상적이고 감탄에 가까운 어조를 빌려 왔다.그래서인지 도서의 제목이 한결 깔끔하고 선명하기만 하다.

 

 이 글은 조선 정조 시대 말년부터 순조 초기에 있었던 이야기를 모아 엮어 냈다.또한 제1회 창비 청소년도서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어서인지 역사 학습 및 문학적 감수성을 자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그렇다면 이 글이 정조 말년에서 순조 초기에 걸치기까지 어떠한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정조는 문체반정이라는 기치를 내걸면서 전통적인 사육문(四六文) 및 고문과 같은 문체에 반하는 잡문 형식을 철저하게 반대했다.정조는 문체에 대해서는 골수분자일 정도로 까칠하기만 했다.지금의 생각과 관점으로보면 정조의 생각은 구닥다리에 불과하겠지만 당시는 모든 영역을 군주 및 대신들이 생각하고 종합하여 판단을 내렸던 시기라서 정신이 사납고 체제를 뒤흔들 정도로 여겨지는 글들은 당사자에겐 커다란 형벌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 중심선상에 있었던 인물이 문장가 이옥(李鈺 1759∼1815)과 김려(金鑢)이다.이 둘은 비록 생과 사를 함께 했을 정도의 동지(同志)는 아니지만 서로가 새로운 문체와 글을 존중하면서 우정을 각별히 여겼던 문우(文友) 사이로 보여진다.

 

 이옥은 문인의 집안이었지만 형이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인의 집안으로 전신하게 된다.이옥은 생원시에 합격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그런데 정조는 그가 쓴 글을 보더니 명말,청초의 패사 소품체(稗史小品體) 즉 격이 떨어지는 야사체 정도로 인식하면서 그에게 전통적인 글을 지어 올려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이옥은 이미 자신의 문체를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결국 정조는 이옥에게 정거(停擧) 및 충군(充軍)의 벌을 내렸다.한편 김려는 이옥과 성균관 동재 출신으로 생원시에 합격한 수재이다.그는 문인이자 천주교인이었던 강이천(姜彛天)의 유언비어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과 경상도 진해로 유배를 가게 된다.부령에서 만났던 부기(府妓) 와의 관계를 글로 쓴 필화(筆禍) 사건으로 진해에 유배가게 된다.이옥과 김려가 똑같은 성균관 동문이고 생원시에 합격한 수재였지만 명말.청초의 패사소품체라고 정조에게 낙인 찍혀 이옥은 사회생활을 못하고 낙향하면서 생을 마감하고,이옥은 두 번의 유배 생활을 거치고 의금부,현감,군수 생활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이 글은 김려가 부령 및 진해라는 유배길에서 만났던 이옥의 아들 유태와의 가공의 대화를 넘어 부령 땅에서 김려를 지극정성으로 뒤바라지해 주었던 부기 연희,그리고 이옥을 그리워하는 김려의 우정 깊은 마음이 깊게 녹아져 있다.이옥과 김려는 사상과 이념이라는 벽에 부딪힌 것보다는 고문신봉자였던 정조의 눈에는 패사소품체가 미운 오리털로 여겨졌던 모양이다.특이한 것은 이옥과 그의 아들 우태가 전기수(傳奇叟:고전소설을 직업적으로 낭송하는 사람) 출신이었다.이옥의 아들 우태는 외밭에서는 갓끈을 고쳐 쓰지 말라는 말을 잊은듯 야밤에 아낙네들을 불러 책을 읽어 준다는 소문이 퍼져 그만 관아로 끌려 가고 말았다.비운의 문장가 이옥이 남긴 멋진 글은 김려가 평생 잊어 본 적 없는 글이었던 모양이다.북한산의 경치 글로 담은 멋진 풍경과 (이옥의)감성은 글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또한 이옥에 대한 변치 않은 김령의 우정이 글의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 보지도 않았을 게야."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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