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 - 내 이름은 르네 타르디 슈탈라크ⅡB 수용소의 전쟁 포로였다
자크 타르디 지음, 박홍진 옮김 / 길찾기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전쟁은 개인에게 무엇을 남길까.두말할 나위없이 외상후 심한 트라우마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전쟁의 명목이 다양하지만 대개는 국가 지도자의 영웅심과 민족의 우월성 그리고 배타적 종교관을 넘어 자원전쟁과 같은 것이 군사적,경제적 우월성을 앞세워 약세국에게 총탄의 세례를 안길 것이다.청년층은 국토 방위를 위해 의무적으로 전쟁에 나가야 한다.전쟁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는 예측불허가 될 수도 있으며 전쟁 상황에 따라서는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면서 물적,인적 피해는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것이다.이것은 전쟁 역사를 통해 얻은 값진 교훈이다.그렇다면 전쟁으로 인해 과연 승전국은 어느 나라이고 패전국은 어느 나라인가 라는 원초적인 물음도 있겠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해당 국가 모두가 상처와 후유증을 앓게 마련이다.상처와 후유증은 전장(戰場)의 중심부에서 총부리와 총탄의 세례를 간신히 피해 가면서 운좋게 살아 남은 자라고 생각이 든다.

 

 

 20세기 세계는 양차(兩次)대전을 겪으면서 두 축의 이념을 형성하고 경제회복이라는 대과제와 경제중심축의 이동을 들 수가 있다.양차대전에서 독일은 전쟁의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가 사라예보에 전쟁을 선언하면서 독일,이탈리아가 동맹국으로 참전하게 되고,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이 폴란드를 침공하고,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난징 대학살)을 일으키면서 2차 세계대전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특히 독일은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고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 및 유대인 말살을 기화로 독일,소비에트 연방 대(對) 영국,미국,프랑스와 같은 나라가 연합국이 되어 한치의 양보도 없이 피말리는 싸움이 이어져 갔다.히틀러가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 자행했던 게슈타포 수용소를 시작으로 유대인의 씨말리기 작전은 쥐불놀이와 같이 번져만 갔다.참으로 골 깊은 상처와 후유증을 안긴 희대의 만행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프랑스 군인이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4년 8개월)에서 직접 체험했던 굶주림과 학대,불명예의 시간을 망각되기 전에 아들에게 구술 및 회고담으로 남긴 《포로수용소》는 그래픽노블의 전형(典型)으로 삼을 만하다.타르디 저자는 할아버지의 1차 세계대전의 경험담,그리고 아버지의 포로수용소의 생생한 경험담을 바탕으로 사실에 가깝도록 포로수용소의 실상을 재현하고 있다.군복무를 한 나는 이렇게 피말리는 생존의 한계를 경험하지 못해 그저 마음으로만 공감할 뿐이다.잿빛을 띤 어스름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포로수용소의 거리는 획일적인 바둑판 모양의 천막과 파놉티콘을 연상케 하는 감시탑,철조망,감시병은 포로병사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었던 천형이었다.르네 타르디는 포로수용소 생활의 산증인이면서 전쟁이란 무엇이고 국가란 무엇인가를 냉엄하게 시사하고 있다.

 

 

 당시 독일은 주변 동유럽 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모아 세를 불려 나갔다.독일에 패한 프랑스 병사들을 강제 집결시켜 독일 트리에로 간 다음,발트해 연안의 포메라이아의 수용소에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독일 제국은 포로수용소를 일반병과 장교,임시수용소로 분리하여 차별대우했는데,그 실상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이다.모포가 없어 짚더미에서 잠을 청해야 하고,몇 백 명의 음식을 여우 몇 마리를 잡아 떼우기도 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노역은 죽도록 시키면서 먹는 것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은 판국이었으니,꾀를 낸 병사들은 화장실에서 취사용 도구와 식재료를 구해 허기를 채웠다고도 한다.더욱 황당한 것은 포로병들에게 커피를 제공하는 척 하면서 떡갈나무 잎이나 도토리를 끓여 내었다는 것으로 생색은 낼대로 낸 셈이다.감자캐기 한 바구니 당 담배 한 개피를 얻는데 이것이라도 받을려고 포로병들은 감자캐기 속도를 내었던 것이다.과연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르네 타르디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 철조망 아래를 파내려는 계획도 세웠지만 철통같은 감시망에 그저 상상으로만 끝나고 만다.동료 샤르도네는 '탈출을 시려하려던 자"라는 이어령비어령식의 보고로 숙소에서 무참히 사살당한다.다행히도 전황(戰況)은 연합국의 편이었는지 1945년 1월 29일 수용소를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지긋지긋한 수용소를 뒤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포로수용병들에 대한 프랑스 정부가 독일 제국에 보인 무능력과 안주는 포로수용병들이 국가에 대한 신뢰와 떨어뜨렸을 것이다.르네 타르디는 패전국의 포로수용병으로서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강인한 자세가 가상스러웠다.『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가 말한 비극적 낙관주의로서 고통,죄책감,죽음에 직면했을 때 닥치는 모든 상황을 최대한 이용할 줄 아는 능력도 르네 타르디에게서 엿볼 수가 있다.르네 타르디는 작가인 아들에게 전쟁의 참상과 포로수용소에서 겪었던 실상을 후세들에게 남겨 전쟁이 주는 교훈을 잊지 않기를 원했을 것이다.개인이 전쟁을 겪은 뒤 안고 살아가야 할 트라우마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국가가 치료하고 보상해야 할 사안이다.이 글을 통해 국가와 전쟁이 갖는 의미와 후유증을 곰곰히 새겨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