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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비좁은 방 두개에 열 식구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순박하고 성실하기 그지없던 조부모,부모님 밑에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처럼 말썽 피우지 않고 무난하게 성장했다.내 형제자매들은 지금과 같은 언감생심 사교육은 생각지도 못하고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가 전부였고 좀 욕심을 낸다면 전과나 문제집을 통해 시험준비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의 기억,국민학교,중학교시절 그리고 조그마한 울타리를 벗어나 도회지로 통학하던 고교시절과 서울로 대학을 다니기 위해 상경을 하고 군생활과 지금의 사회생활까지 삶은 도도하게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생각해 보니 지나간 어린 시절은 이렇다 하게 보잘 것은 없었으나,외상후 트라우마와 같이 장기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들이 새록새록 아니 자주 상념에 잠길 때가 있다.아마 나이가 들어가니 앞으로의 삶을 거창하게 꾸미기보다는 그간의 삶 속에서 겪었던 경험과 체화인지가 내 삶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가를 되새겨보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좋았던 때,후회스러운 때,기쁨과 환희도 넘치던 때,슬픔으로 젖어 있었던 일들이 눈 앞에서 어른거리기도 하고,꿈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어린 시절을 대신해 주기도 한다.
유년시절,청소년 시절은 한국이 새마을운동과 같은 전국민이 하나가 된 적도 있었지만,꽁꽁 얼어 붙었던 정치이념과 사상에 대한 지식과 비판의식이 없었던 탓인지 획일적인 학교교육에 순응하는 것이 최고인 줄로만 알았다.내가 성장하던 곳은 산촌이었기에 전깃불이 늦게 들어오고 문화생활도 쉬이 접할 수가 없어 좀 잘산다는 이웃과 비교가 되어 어린 마음에 괜스레 부모가 원망스럽기도 했다.국민학교 교사(校舍)는 일제가 남긴 목조건물이었다.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는 계속 일제식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복도바닥,교실바닥이 원목으로 되어 있어 늘 쓸고 닦기를 밥먹듯이 되풀이했다.닦을 때에는 양초로 먼저 칠하고 마른걸레로 박박 문지르고 나서 담임이 오케이 하면 종례식을 하면서 귀가를 했다.
집에 오면 계절에 따라 (부모님이 외지로 장사를 나가셨기에)할머니께서 만드신 각종 밑반찬,찌개,전(적),찐감자,찐고구마가 식사이기도 하고 간식이기도 했다.간장,된장,고추장은 발효식품으로서 할머니 솜씨는 최고였다고 자부한다.간장,된장,고추장으로 만든 각종 음식은 간간하면서 칼칼하고 구수한 내음이 코끝을 간질이면서 입맛을 한층 돋구었다.고기는 추석,설이 아니면 쉽게 구경을 할 수가 없었는데,나는 할머니께서 숯불에 구운 재래김이 너무 맛이 있어 어른들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날쌔게 숟가락에 밥을 얹어 구운 재래김을 찍어먹다 가끔 혼이 난 적이 있는데 얌전하게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다간 김 몇 장도 입에 대지 못한 채 숟가락을 내려 놓아야 하기에 일단 구운 재래김이 밥상에 올라오면 무조건 김부터 입에 대는 것이 수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께서는 3대독자이시고 할머니와는 스무세살 때 결혼을 하셨다.할머니와는 아홉 살 차이가 나셨는데 두 분의 성격이 모두 완고하고 고집이 쎘지만 할아버지는 모든 일을 속으로 생각하면서 일단 마음정리가 되면 행동으로 옮기는 반면,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행동에 쫑알쫑알 불만을 드러내시고 잔소리도 참 많이 하셨다.할아버지께서 3대독자이시고 일찍이 증조부모님을 여의셔서 홀로 되시고 (누군가 중매를 섰겠지만)할머니와 혼인을 하면서 서 너번을 이사를 왔다 갔다 하셨던 것으로 안다.남부여대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두 분이 어렵게 사시던 시절이 타임머신을 타고 들여다 보는 것처럼 애잔한 삶이 눈물겹기만 하다.들은 얘기인데 젊은날 집도 절도 없는 두 분이 이모할머니댁에서 더부살이를 하고,가을날 초가지붕을 엮다 발을 헛디뎌 마당으로 낙상을 하셔서 엉덩이를 많이 상하시고,일본이 상수원을 건립한다는 명목하에 하루가 멀다하고 보수없는 강제부역을 하셨다는 할아버지는 단신(短身)이지만 탄탄한 골격에 근육이 넘쳐 나셨다.1900년생으로서 1982년에 작고하셨는데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도 지게질을 하셨던 머슴이셨다.
아버지는 총 팔남매를 두셨다.내 밑으로 생긴 남동생이 아침에 태어나 해저물 무렵 세상을 떠나고,여덟살 밑인 여동생이 세 살 때 덜 익은 감을 먹고 체해서 그만 세상을 떠났으니,총 육남매가 남은 셈이다.동네 가구수는 삼십호 정도이면서 우리집은 동네 가장 중심에 놓인 명당이었다.그래서인지 일제때 심은 은행나무(수컷)가 아름드리 연리지가 되어 사,얼축 높이가 사오십미터는 되었는데,이장이 우리 은행나무에 마이크를 매달아 마을회관에서 모임이나 공지사항이 있을 때에는 방송을 하기도 했다.그런데 은행나무는 할아버지가 작고하시고 도회지로 이사오면서 누군가에서 팔았다고 한다.아버지는 남아선호가 강해서인지 여자는 시집가면 남의 집 식구가 된다면서 고등교육을 시키지 않았다.위에 누나와 밑에 여동생 둘이 배우고 싶고 포부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완고한 뜻에 부딪히고 반항기인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세 자매가 풍파를 일으킬 줄을 미처 몰랐다.누나는 집을 나가고 밑의 여동생들은 따로 자취를 하겠다고 돈을 요구하는 통에 집안 분위기가 한동안 삼엄하기만 했다.나는 남아선호사상을 밀어 붙이는 아버지를 둔 덕분에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생겼지만 누나,여동생들에게는 미안하기만 할 뿐 어떻게 말을 건넬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폭풍과 같은 시기도 잔잔한 파도로 되돌아 오면서 평정을 되찾았지만 사,오십이 된 누나,여동생들은 은연중에 봉건적이고 남아선호만 내세웠던 아버지를 탓하기도 한다.그렇다면 내가 신분과 명예,경제적 수입이 높아서 누나,동생들을 다독여 줄 여유라도 있다면 사람 노릇 좀 할텐데 그러지를 못해 마음이 울적하기만 하다.다행히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매형,매제를 두어 위안이 된다.
성석제작가의 이번 글을 읽노라니 내 유년시절과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이르기까지의 살아왔던 지난 시절의 편린과 단상들이 너무도 흡사하다는 동질감을 느꼈다고나 할까,그 시절 그 속으로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육남매를 둔 만수의 집안 이야기부터 만수가 사회인이 될 때까지의 여정을 너무도 잘 직조해 냈다.소설이지만 해방직전부터 베이비붐 세대들이 겪었을 법한 집안 이야기,학창시절 이야기,농촌에서 도회지로 돈벌러 나간 아가씨들의 이야기,운동권학생들이 겪었을 후유증 등 직간접적으로 내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과 같은 동질성을 느끼게 한 이야기였다.특히 만수의 집이 산골인 개운리이고 자연과 호흡하면서 살아가던 시절은 감명을 주기에 족했다.만석꾼 집안이면서 일제강점기 고등교육을 받은 만수의 조부가 오지인 개운리로 이사오면서 만수 일가의 사연은 잔잔한 물결이 일기도 하지만,격동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암흑의 터널로 빠지기도 한다.이는 한 가족사의 얘기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현대사의 굴곡과 부조리를 창 넘어 응시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누구나 투명인간이 되어 자신의 가족사를 누군가가 전해주는 것을 귀를 기울인다면 언제 어디서든 들려올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