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똥장수 - 어느 중국인 노동자의 일상과 혁명
신규환 지음 / 푸른역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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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고 사회인이 되기 직전까지 적(籍)을 두었던 산골집은 재래식 화장실에 우물물을 퍼올리던 펌프가 먹고 마시고 배설해 주던 생활의 근간이었다.재래식 화장실은 치간(측간)이라고 했다.태어나기 전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깊게 땅을 파서 만들어 놓은 일명 똥통은 장방형에 위에는 두꺼운 목재를 촘촘하게 배열시키고 뒤를 보는 곳만 약간 틈을 벌여 놓았고,옆에는 뒤엄자리라고 하여 온갖 음식물 찌꺼기 및 밥을 짓고 난 뒤 남은 재를 쌓아 놓았다.소변은 두엄자리에서 보고 변은 목재 사이에서 보게 되는데 배설할 시간이 되면 늘상 가는 곳임에도 변뇨가 뒤섞여 코를 찌르는 냄새를 적응하지 못했다.특히 여름날에는 파리떼,모기,애벌레 등이 들끓기도 했다.날이 풀리고 얼었던 땅이 녹게 되면 할아버지는 머슴과 같이 똥담는 통에 통국자로 퍼올려 양어깨에 지고 밭에 거름으로 쓰기도 했다.오랜 세월 분뇨에 익숙했던 할아버지께서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거름을 주기 위해 묵묵히 고샅을 지나 밭으로 향하던 모습이 선연하기만 하다.

 

 도회지 역시 마찬가지였다.대학을 다니면서 몇 차례 자취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경제적인 관계로 수세식화장실이 딸린 집은 얻지 못하고 고가(古家)를 전전긍긍했다.1980년대 중반 무렵이고 서울의 변두리쪽이어서인지 문화주택이라고 하는 빨간기와집은 으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그런데 재래식 화장실의 변뇨를 퍼가는 차량이 정기적으로 정해진 시간대(주로 아침)에 구역을 도는데,중간고사,기말고사 철이 다가오면 새벽 일찍 도서관 자리를 잡고 아침밥을 먹으러 자취집에 들르는데,분뇨차량이 눈에 들어오면서 고약한 냄새가 풀풀 날리면서 입을 막고 뜀박질을 하곤 했던 시절이 있다.그후 도시개발화가 이루어지고 재래식이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고약스럽고 소름 끼치는 냄새를 맡지 않게 되었다.

 

 지금 그 시절 우물물,펌프질을 해서 퍼올린 물,재래식 화장실 등은 생활수준과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거의 사라져 간 생활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현대는 초국적 종자기업이 만든 농약과 비료,종자를 사용하고 있는  시대이다 보니 분뇨처리는 공공하수도에 의해 수세화되어 종말처리를 한다든지 정화조로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다.위생적이고 환경적인 측면에서 생활의 편리함과 질병의 우려가 없으니 매우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한다.사람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본능행위가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개인이 일일이 손으로 퍼나르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시절이 있었다.자동차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인력거가 사람을 맞이하고 태워다 주기도 하고,깨끗한 물을 원하는 세대에게는 물장사가 새벽잠을 깨우기도 했으며,분뇨차가 없었을 때에는 똥장수들이 찾아와 분뇨를 퍼가면서 수고비를 주기도 했다.

 

 이 글은 20세기 초 중국 베이징의 하층민의 고단한 삶 시기별로 전해주고 있다.베이징의 똥장수는 그 자체가 삶을 지탱해 주는 생계거리이기에 똥을 집하처리하는 똥공장(분창)과 일정구역의 똥장수를 관리하는 분도 그리고 가가호호 돌아다니면서 똥을 푸는 똥장수가 마치 피라미드와 같이 이권과 생존권이 얽혀져 있다.시대가 바뀌면서 사람의 의식구조도 바뀌지만 직종도 명멸하기 마련이다.인구 14억에 가까운 중국은 오랜 기간 봉건적이고 사회주의의 틀에서 깨어난지 불과 30여 년 밖에는 되지 않았다.그러한 까닭에 중국인민이 먹고 사는 문제가 급선무이었기에 위생관념,환경오염과 같은 선진문화의 도입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공장노동자,인력거꾼,똥장수,물장수들은 시민들을 상대로 돈을 뜯기도 하고 물주로부터 부당한 노동조건을 당하게 되면 태업(怠業)도 불사했다.비록 똥장수이지만 조직망이 갖춰져 있어 혹시라도 농한기(農閑期)를 이용하여 외지에서 떠돌이 똥장수 기존의 똥장수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밥줄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여 똥장수들은 피터지도록 싸우기도 했다.똥장수는 위에 분도주(糞道主)가 있고 그 위에는 기업형 분창주(糞廠主)가 있었다.특히 분창주는 이권과 관련하여 시정부와 긴밀한 결탁관계를 맺었기에,분창주는 막강한 분벌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부녀자 납치,강간 그외 축재도 어마어마하기만 했다.베이징 시정부는 분벌악패를 근절한다는 명목하에 위더순과 순싱구이 등을 법정에 내세운다.사안의 경중에 따라 사형,징역,교화노동 등에 처하게 된다.

 

 중국 하층민의 직업인 물장수부터 똥장수,인력거꾼,접대부 등에 대한 기원은 명대부터 시작하여 청조,그리고 민국시기,난징정부시기,일본점령기,베이징정부시기 등으로 나뉘어 똥장수들의 삶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또한 똥장수들의 대부분이 산동성 출신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며 이들은 베이징에서 동향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지연을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20세기 초 중국은 위생시설이 극히 열악한 시절이어서인지 똥장수들은 기생충병,하지정맥류,결핵,위장병 등을 주로 앓았다.일종의 직업병이다.일본이 중국 정부를 삼키면서 도시계획에 들어가고 분변개혁을 하게 되면서 똥장수들은 그들의 생계가 위협을 받고 퇴출될 불안감에 폭동을 일으키기도 한다.위생처리가 안된 물로 빨래를 하고 밥을 짓는 등 당시 중국의 환경오염은 일반인들에게 각종 질병을 안겨 주었다.이질,두창,티푸스,성홍열,콜레라 등이다.똥장수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똥장수들은 윗선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많지 않은 급료로 식구를 부양해 나가야 했다.1950년대 초 분벌악패(糞閥惡覇)의 주동자들을 체포.처벌하면서 위생개혁,환경문제로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이 글을 읽으면서 지난 한국사회의 물장수,똥장수,인력거꾼,접대부(기생) 등과 관련한 그들의 애환을 음미해 보는 소중한 역사학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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