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 박하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아무 조건없는 풋풋하고 순수가 넘치던 사랑은 시간과 세월이 흘러도 장기기억으로 남게 마련이다.서로가 좋아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땅에 발을 내딛고 사는 한 달콤한 사랑은 변치 않을 것 같지만,삶의 과정은 개인의 의지를 방해하는 요인이 있기 마련이기에 원치 않은 시공간 속으로 갈라져 만나지를 못한 채 그리움과 추억을 삭히며 살아 가는 것도 인생이 아닐까 한다.생에 처음 만나 심장이 뛰고 거친 물결과 같은 성애도 시간이 흐르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데,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마음을 도려내는 천형(天刑)에 가까울 것이다.

 

 유부남이 첫사랑과 헤어지고 이끼가 켜켜이 낀 바위틈과 같이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풋풋하고 순수함이 물씬 배여 나던 시절과 둘이서 나누었던 달콤하기 이를데 없는 연인을 못잊어 집을 나간 한 남자가 있었으니 이를 두고 세인들은 어떻게 평가를 할 것인가.초로인 남자는 미국 동부 유수의 대학을 나오고 변호사로서 경제적,신분적인 면에서 부족할 것이 없건만,그의 내면은 첫사랑과의 언약과 피치 못할 사연으로 헤어진 것이 내내 그의 정신과 심리세계를 휘감아 돌고 있었다.그 주인공은 바로 틴 윈이고 그리움으로 몇 십년 세월이 흘렀어도 그 뒤를 그림자와 같이 따라 다니던 여인은 미밍이다.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은 미얀마 깔로와 양곤을 오고 간다.시대적 배경은 20세기 중반 경이다.19세기말 영국의 식민지하에 놓여 있던 미얀마는 1948년 해방이 된다.주인공 틴 윈은 해방 전에 태어났는데,당시 미얀마는 과학 및 의학수준이 저조하면서 질병 및 미래에 대한 예언 등은 민간요법이나 점쟁이(점성술사)를 믿는 풍조가 강했던 것으로 보여진다.틴 윈의 출생이 4,8,11월 토요일이라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했는데 그는 불길하지만 운명적인 토요일에 태어나고 말았다.또한 그는 앞을 못보는 시력장애를 안고 태어났다.아버지가 날아오는 골프공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아 불여귀가 되고, 어머니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틴 윈은 수치라는 보모에게 맡겨지지만 친부모 이상으로 그를 잘 키워준다.미얀마는 전통적으로 소승불교국답게 사원(寺院)내지 수도원이 산재해 있는 곳이기에,수치는 틴 윈은 수도원에 데리고 가기도 한다.우 메이라는 스님은 틴 윈에게 삶의 도움이 될 조언을 많이 들려 주기도 한다.

 

 틴윈이 우연히 만난 미밍은 그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남을 배려하고 챙겨주는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이다.미밍 역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신체장애를 안고 있다.둘이 만나는 풍경과 분위기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과 평화로움으로 가득차 있다.앞을 못보는 틴 윈은 사물의 움직임과 소리,모양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미밍은 그런 틴 윈을 연민과 동정,사랑으로 포근하게 감싸준다.미얀마가 아열대 기후대에 속하다 보니 이국적인 식물과 풍경들의 묘사도 싱그럽기만 하다.집,마당,근처의 들판이 주무대인 틴 윈은 어느덧 미밍과 가까워지면서 뜨거운 성애관계도 갖게 된다.틴 윈은 곁에 미밍이 있어 주기만 하면 그 자체로 행복에 겨워한다.그녀의 손,목소리,웃음소리,체취는 그의 가슴 속에 세로토닌 호르몬을 차곡차곡 채워 준다.다리가 불편한 미밍은 틴 윈의 등에 기대어 가고 싶은 곳을 맘껏 소풍을 다니기도 한다.

 

 두 번,세 번 만나면서 심장 소리로 상대를 알아맞히는 일은 틴 윈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물론 심장 소리는 결코 한결같지 않았다.몸과 영혼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냈고,시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바뀌기도 했다.심장 소리는 젊거나 노쇠하게 들리기도 하고,지루함을 표출하기도 했고 소리 자체가 지루하게 들릴 때도 있었고,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을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확연히 짐작가게도 들렸다.

-P220

 

 당시 틴 윈에게는 양곤에 거부인 고모부가 살고 있었다.일가친척없는 고립무원으로 사는 처조카가 시력에 장애가 있음을 알고 치료를 해준다.백내장이었다.심장박동과 소리,움직임,느낌으로만 세상과 소통하던 틴 윈은 대명천지를 눈 앞에 두고 다시 태어난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그의 미래는 고모부에 의해 조종되었다.칼로에 두고 온 미밍 생각에 마음이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학업과 미래를 위해 미얀마를 떠나 영국으로 유학을 가고,다시 변호사를 목표로 미국으로 갔던 것이다.그곳에서 미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결혼후 20여 년을 한지붕에서의 낭만과 즐거움보다는 미적지근한 부부관계로 일관해서인지 아내는 남편이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어도 찾으려 하는 부부의 정은 거의 찾을 수가 없다.다락에서 찾아낸 틴 윈의 쓰다 만 편지 속에 미얀마의 미밍의 주소를 발견하고 딸인 줄리아는 미얀마로 향한다.아버지가 그토록 못잊고 사랑했던 여자가 과연 누구인지를 찾아 내고자 했던 것이다.그런데 아버지와 미밍의 소식을 알고 있던 우 바라는 남자로부터 둘의 생사확인을 듣게 된다.미밍과 틴 윈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만났지만 미밍은 병색이 완연한 상태이고 틴 윈도 심장마비가 가까울 무렵이었다.둘은 죽음의 순간에 만나 긴 회포를 풀지는 못했지만 사랑의 미로에 빠져 들었던 젊은 날의 기억과 추억은 화장(火葬)후 푸른 하늘로 치솟았던 재스민 꽃과 같은 연기 기둥이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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