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절 - 당신도 가끔 내 생각하시나요?
신철 글.그림 / 초록비책공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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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게는 잊지 못할 학예회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초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으로 돌아간다.남학생은 토끼와 같이 깡총깡총 뛰놀던 시절이었고,여학생은 나비와 같이 나폴나폴 날 듯한 잘닥말하면서 고사리와 같은 체구로 담임선생님의 인솔하에 학예회를 떠났다.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두 달 남짓 되었던 시기로 기억한다.포장이 되지 않은 신작로는 겨우 시내버스 한 대가 다닐 정도의 좁은 길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사람의 발길이라도 스치면 잔돌,먼지가 휘 일어나곤 했다.학교에서 학예회 장소까지의 거리는 대략 3키로 정도이고,무대는 히말라야시다가 소풍온 손님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반겨주던 우거진 잔디밭이었다.

 

 숫기가 없어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나는 어떻게 학예회 대상으로 뽑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짝은 같은 동네 여학생이었다.교감,교사,부모가 모인 자리에서 산토끼 반주에 맞춰 산토끼처럼 연기를 했다.경쾌한 풍금 소리에 맞춰 왼쪽,오른쪽으로 산토끼 뛰는 흉내를 내면서 짝인 여학생의 눈빛을 보는데 살짝 얼굴에 피어 오르는 미소가 수수하기만 했다.어린마음이었지만 내 짝에 대한 예쁜 얼굴과 순수함이 그대로 내 마음 속으로 번져 오는 듯 가슴이 눈이 녹고 땅이 풀리는 봄날의 햇살과 같이 따뜻하기만 했다.당시 짝의 집은 마을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길가에 있었고,하꼬방이라는 간이 가게를 하고 있었다.나무로 된 미닫이 문을 열고 독과자,츄잉껌(초승달과 펭귄이 그려진 껌)를 산다든지 막걸리 심부름을 갈 때엔 으례 짝의 집으로 갔는데,가게는 짝의 할머니께서 보셨다.지금 생각하니 짝의 할머니는 배움이 많아서인지 세상 돌아가는 얘기부터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식했다.막걸리를 술독 항아리에서 조롱박으로 퍼올려 양은 주전자에 담아 주시곤 했는데 가끔 내 짝은 내가 온 것을 눈치 채고 방문을 빼곰히 열고 살짝 웃으면서 나를 쳐다 보면서 "잘 가"라고 인사를 먼저 건네기도 했다.좁은 논 옆의 샛길과 탱자나무 과수원 울타리를 끼고 집으로 오는 날은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다.

 

 사실 학예회에서 내 짝이 되었던 같은 마을 친구는 붙어 다닐 정도로 친밀하지는 않았다.초.중학교가 남.녀공학이었기에 등교길에서 만난다든지 버스안에서 만났을 때 안부 인사와 신변 잡기와 같은 간단한 대화만 나누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예회에서 여자라는 이성과의 첫만남은 내게는 잊을 수가 없는 추억이다.굳이 짝을 만나려고 그 집을 기웃거리고 안달복달하지는 않았지만 수수한 단발머리와 절제할 줄 아는 말씨 그리고 살짝 미소를 전해 주는 그 모습이 내게는 봄날 산과 들에 피어나는 진달래,개나리 이상으로 화사하고 밝기만 하다.고등학교부터 면단위에서 도회지로 통학을 하게 되면서 자주 만나지를 못하고 짝의 할머니께서 작고하면서 짝은 어디론가 이사를 했다고 들었을 뿐이다.나 또한 잊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가끔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게 되면 중년이 되어 나타난 남자,여자 동창생들 속에서 그녀만은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그녀의 부모,오빠,언니,남동생 모두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성장해서인지 어린시절의 순수함과 온기 가득찬 이웃간의 나눔과 정이 그립기만 하다.어느 날인가 양복 입은 그녀의 아버지와 양산을 쓰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정하게 길을 걷다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밝고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대해 준 그녀의 부모님의 인상이 그녀에게도 전해졌으리라.다음 동창회 때에는 여자 동창생을 통해서 연락처를 알아 보리라.

 

 시간과 세월의 무게 만큼 삶의 무게도 단단해져 가는 이 시절,순수의 시절을 떠올리다 보니 아련한 흑백사진 속을 들여다 보는 것과 같이 학예회에서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짝과 부모형제들은 모두 다 무사했으면 좋겠다.격의 없이 살았던 그 시절,엊그제와 같이 기억은 생생한데 우연히라도 길을 가다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내겐 그만한 행운은 없으리라.시와 같이 길지 않은 문장이면서도 알록달록한 다양한 삽화와 함께 하는 추억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내내 즐거운 상상과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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