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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사랑은 우연히 찾아 오는 것일까.아니면 자신에게 적합한 대상을 찾기 위해 이리 저리 알아보면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나의 지난 청춘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학교 동창(남녀공학) 커플이 나를 위해 지금의 아내를 소개해 주었다.둘 다 결혼 적령기를 넘긴 상태라 제대로 몇 번 데이트로 못한 상태에서 날짜를 잡아 식을 올리는 바람에 살면서 맞지 않은 성격과 생활방식,사고방식 등으로 티격태격한 적도 있었다.아이들이 커가면서 경제적인 문제,집안문제 등으로 보이지 않은 갈등과 생각의 차이를 극복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내가 가장으로서 왠만하면 참고 양보하는 편이다.이것은 나이가 들어 가다 보니 집안문제 외에도 신경쓰고 고민할 일이 참으로 많기에 모든 것을 참견하고 내 위주로 하다가는 신체적,정신적 질병 및 불화가 쌓일 우려가 있기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참고 기다리는 방식을 택하니 몸도 마음도 예전같지 않게 편안한 상태로 돌아오게 되었다.이것은 나이가 들면서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하나의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성을 만나서 눈에 콩깍지가 씌워질 정도의 연분이라면 죽어서도 둘의 영혼은 썩지 않고 살아 다시 만나 현세에서 못나눈 애정과 사랑을 다시 나누어 나가리라 생각한다.지구촌 어딘가에서 파편처럼 살아가다 자석에 이끌린 것과 같이 남과 여가 하나가 되어 깊은 사랑을 나누어 가는 삶의 모습은 경이롭기만 하다.인생은 어느 한 곳에 붙박이처럼 고정되어 있는게 아니다.탄생의 순간부터 성장,결혼,사회생활,노년,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각과정은 이리 저리 옮겨 가는 이동이라고 생각한다.누군가는 전생에 인연이 현세에 나타나 만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금슬이 좋은 관계로 부부가 백년해로를 유지해 갈 수만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하면 값진 일이겠는가.
박범신작가는 《소소한 풍경》으로 독자들 앞에 다가섰다.등장인물도 많지 않다.딱 세 명으로서 ㄱ,ㄴ,ㄷ의 기호로 나뉘어져 독특하기만 하다.스승이면서 '나'의 제자인 ㄱ은 쓰라린 이혼의 상처를 안고 소소마을에 나타나고,ㄴ은 광주민주화 운동에 의해 아버지,형을 읽고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긴 채 더블백만 짊어지고 소소마을에 나타난다.그리고 마지막 ㄷ은 탈북여성으로서 조선족으로 가장(假裝)하여 어렵게 살아가는 처녀이다.박범신작가는 ㄱ,ㄴ,ㄷ 세 명을 원초적 사랑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일반인의 시각으로는 다소 괴리감과 비정상적으로 비쳐지고 있는데 남자 ㄴ과 여자 ㄱ,ㄷ 세 명이 하나가 되어 칡넝쿨과 같이 몸을 섞는 불가능한 가능한 형태의 애욕이 연출되는데,박범신작가는 왜 이러한 소재를 삼으려 했을까.
생성과 죽음과 몽상과 은유와 접합과 원시성의 물.그것은 다채로운 감응을 준다.물의 감응이 없다면 우리가 덩어리를 이루는 것도 애당초 불가능했을지 모른다.-P306
제자인 ㄱ,ㄴ,ㄷ 모두 정신적,심리적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제가 ㄱ이 스승에게 꺼낸 첫마디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였는데 읽어 가면서 알게 된 것은 ㄱ이 ㄴ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모양이다.ㄴ은 오갈 데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더플백만 메고 ㄱ 앞에 나타나 물구나무 서기를 보여 주면서 자신의 살아 온 과정을 담담하지만 쓸쓸하고 무기력에 가까운 이야기를 전한다.아버지보다 형과의 관계가 좋았던 어린시절을 회고하지만 형은 이미 세상에 없는 상태에서 ㄴ은 ㄱ을 위해 우물을 우공이산의 자세로 파게 된다.이러한 상황에서 ㄷ이 ㄱ,ㄴ과 합류하게 되고 셋은 ㄴ을 가운데 놓고 애욕을 불사른다.그런데 이들이 펼치는 비정상적인 성행위에 대해 미래를 설계하는 것과 같은 구속력은 없는 그야말로 자유스러운 행위일 뿐이다.잠깐 동안의 행위였지만 ㄱ과 ㄴ이 정사를 펼치는 가운데 그 행위에 배제된 ㄷ은 뒤란에서 자위행위를 하기도 한다.ㄷ은 이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다운 사랑을 받지 못해 스스로 희열을 느껴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셋으로 삼각형을 이룬 게 아니었어요.셋으로부터 확장되어 우리가 마침내 하나의 원을 이루었다고 나는 생각해요.역동적이고 다정한 강강술래 같은 거요.둘이선 절대로 원형을 만들 수 없잖아요.셋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원형(덩어리)이지요. -P209
ㄱ,ㄴ,ㄷ 모두는 아픈 기억을 안고 불완전하게 살아 가는 존재이다.ㄱ이 관상식물로 키우는 선인장은 가시가 날카롭게 나 있는데 대부분 바깥 쪽을 향해 나 있기 마련이지만 게중에는 선인장 몸통 쪽으로 나 있는 경우도 있다.바깥 쪽으로 나 있는 가시는 상처와 고통을 누군가를 향해 원망과 복수가 서린 방어막이고,자신을 향해 나 있는 가시는 자신의 고통과 상처,슬픔이 된다.셋은 정신적,심리적으로 불완전한 결핍의 상태에 놓여 있는 가운데 불완전한 영혼을 알몸을 뒤섞으면서 경이로운 경험을 맛보고 그 행위를 통해 고통과 상처를 조금이나마 내려 놓으려 하지 않았는가 싶다.박범신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특이하게도 시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함축적인 문구로서 때로는 마음이 정갈해지고 정화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ㄴ은 우물을 다 판 상태에서 누군가에 의해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 죽게 된다.진범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찰의 수사는 종결되고 ㄴ의 유골의 유분은 호숫가에 뿌려지게 된다.ㄱ은 ㄴ에게 진심으로 사랑하고 ㄴ의 영혼을 달래고 기념으로 삼고자 ㄱ이 쓴 《우물》이라는 책자와 목걸이를 땅속에 묻으며 그 자리를 ㄴ과 함께 했던 자리로 기억하고자 하며,ㄷ은 소소마을을 떠나 동해 쪽으로 티켓다방을 전전하게 된다.ㄴ은 사랑의 본능을 곡선,공,굽어 돌아들기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사랑이 있다면,그래요.사랑이 있다면요,그것은 출발-종말이 접합된 완벽한 원형일 거예요.P163
지구촌의 각기 다른 별나라에서 온 ㄱ,ㄴ,ㄷ은 모두 육친과의 이별을 내면에 안고 있는 결핍된 존재들이다.소소마을에 ㄱ,ㄴ,ㄷ이 우연찮게 만나 불가능한 가능한 사랑을 나눈 짧은 기간이었지만 심장을 후려치는 인연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다시 모래알과 같이 유목민과 같이 셋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지만 물,불,흙,공기와 같은 태초의 자연으로 돌아가 원초적인 영혼의 모습을 보여 주려 한 것은 아닐까 한다.비록 현실 속에서의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극히 금기시되는 행위이지만 올데갈데 없는 이들의 기구하고 아픈 사연들을 털어 놓을 수가 있고,원초적 본능인 육욕을 채우려는 욕망을 엿볼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