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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울지 못한 당신을 위하여 - 이별과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가는 법
안 앙설렝 슈창베르제 & 에블린 비손 죄프루아 지음, 허봉금 옮김 / 민음인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자아가 어느 정도 발달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유와 무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단지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 허무하고 상실감이 깊게 오래도록 간 적도 있었다.쉽게 얘기하여 살아 있다는 것은 숨을 쉬고 움직이는 극히 실존적인 행위인데 어떠한 사유로든 현세를 떠난다는 것은 함께 살았던 이들과의 인연과 관계를 영영 끊는다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매여져 오고 슬픔을 누군가와 나눌 길이 없어 마음의 상처가 오래 가기도 했다.세월이 흘러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문상을 다녀 오기도 하면서 죽음이라는 문제는 삶이 다했기에 자연의 순환,섭리에 맞춰 이루어지는 인간의 의식(儀式)이라고 덤덤하게 맞이하려고 한다.
한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았던 친족이 생을 마감하는 것을 몇 번 지켜 보게 되었다.태어나 죽음을 처음 접했던 때는 어린 여동생이 익지 않은 단감을 잘못 먹고 식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는데,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어린 여동생이 나이(3세)에 비해 말도 잘하고 영리하기도 하여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기도 했고,죽기 전날 밤 약을 먹고 식중독 증세가 가라앉았는지 말도 똘방똘방 잘했다.그리고 이제 동생은 걱정 안해도 된다면서 다음날 학교에 가야 하니 푹 자라고 하여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잠을 청했다.그런데 어슴푸레하게 새벽이 오면서 할머니,어머니의 곡(哭)소리가 동네가 떠나갈 듯 구슬프게 우셨다.어머니께서는 "동생이 죽었다"면서 입던 옷가지 등을 하나 둘 꺼내면서 병원에 데리고 가지 못한 것을 자책하면서 자신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우셨다.이렇게 여동생을 보내면서 나와 함께 살던 존재가 허무하게 아침 이슬과 같이 사라지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밤이 되면 혹시 동생이 살아 올까 사립문 쪽을 쳐다 보기도 하고,때로는 측간에 가는게 무서워 볼 일 보고 도망치다 싶이 방문을 열고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뒤로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또 한 명의 여동생이 내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할아버지의 작고로부터 여동생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거의 30여 년이 흐르면서 내 나이도 훌쩍 중년의 뜀틀을 넘게 되고,삶의 무게는 어느 때보다도 숨가쁠 정도이다.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경사진 비탈길을 오르는 것과 같이 숨이 차기만 하지만 내려 가는 길도 있다고 생각을 하면 삶은 반드시 힘든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름날 큰나무 밑의 그늘과 같이 홀가분하고 상쾌한 날도 있는 것이다.그러면서 삶의 깊이를 배워 나가는 것이다.삶은 웅덩이 속의 썩은 물이 아니다.늘 변화하고 상실의 연속이 삶이 아니겠는가?라고 자문자답을 해 보게 된다.이렇게 변화무쌍하고 상실과 고통,상처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에 살아 있는 동안에 가까운 이들에게 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 쏟지 않으면서도 내 생각과 감정의 이면을 상대가 읽어 주면서 원만하게 지내려 한다.그러한 관계가 지속되다 보면 내 삶의 변화와 상실은 돌파상황이 아닌 내 마음에 늘 따라 다니는 동반자와 같이 여겨질 것이다.나는 성격인지 기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친족의 죽음과 시신을 보면서 펑펑 울어본 적은 없지만,누군가 고인과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곡을 하게 되면 나 역시 저 깊은 가슴 속에서 참고 참았던 뜨거운 회한과 슬픔이 곂쳐져 눈가를 흠뻑 적시게 된다.
이별과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가는 법에 대해 슈창베르제.죄프루아 공저자는 '애도'는 치유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고인과의 관계,기억,추억을 생전 어떻게 보냈는가에 따라 애도의 깊이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무덤덤한 관계에서부터 찰떡 같은 속궁합을 갖은 부부에 이르기까지 한쪽의 죽음은 남은 이에게 순망치한과 같을 것이다.냉정하게 얘기한다면 남게 된 자신도 언젠가는 자연순환 원리에 따라 피안의 세계인 명부(溟府)의 세계로 갈 것이다.삶의 과정은 희노애락오욕정으로 가득차 있다.그중에 사랑이 으뜸이 아닐까 한다.모작가는 힘들고 지칠 때 '사랑할 수 있는 한'누군가를 사랑하라고 했다.이 말이 참 가슴에 와닿는다.정신적,육체적 고통과 상처,스트레스를 나눌 수가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언제든지 상부상조할 수 있는 참다운 인간관계를 많이 쌓아 놓는 것이 삶의 진정한 자산이라고 믿는다.저자는 '사랑을 쌓아 두는 곳간'과 재충전의 원천으로서 자존감과 자기 계발,신에 대한 사랑,영성,사람에 대한 사랑,가족에 대한 사랑,자녀에 대한 사랑,타인에 대한 사랑을 연금저축과 같이 쌓아 나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삶의 길이는 짧지만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삶의 깊이,세상의 변화는 달라지리라고 생각한다.그중의 으뜸은 사랑과 평화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감정을 꼭꼭 숨기고 침착하게 안정된 모습을 보여 줄 것과 냉정함을 유지할 것을 스스로에게 억지로 강요하고,그런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그런데 혹시라도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감수성이 끔찍할 정도로 메말랐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왔던 것처럼 '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건 아닐까?" -P114
살아가면서 상실이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속으로 꾹 참아 내면서 속병을 앓는 것도 정신건강에 백해무익이라고 생각한다.지음과 같이 가까운 친구를 우연을 가장하여 만나는 것도 좋을 것이다.친구의 사정이 허락된다면 어디론가 1박2일로라도 상처와 상실을 딛기 위한 힐링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을 것이고,종교적 영성체와의 진실을 담은 고백과 명상도 좋을 것이다.그리고 생전 고인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면 기꺼이 관대하게 용서를 하여 응어리와 한을 내려 놓아야 비로소 삶이 성숙해지고 또 다른 삶의 변화와 상실을 긍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수용할 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삶이 끝나는 날은 아무도 모르지만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이어나갈 때 죽음과 상실에 대한 체험은 자신의 뒤를 따라 오는 후손들에게도 감화가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