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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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를 보유하기 전에는 거의 걷기가 나의 취미이고 즐거움이었다.삼십대 후반에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었다.면허를 따고 장롱면허 생활을 벗어나야 하는 처지에 놓이면서 자동차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자동차가 있음으로해서 기동성과 편리함은 말할 나위가 없는데,대신 운동량이 부족하고 게을러지면서 뱃살이 하루가 멀게 나오기 시작하면서 불편함마저 체감하게 되었다.자동차가 없던 시절에는 걷는 것이 일상이어서 아무리 많이 걷고 걸어도 지루하지도 않고 싫증도 나지 않았다.그래서 누군가는 나에게 '뚜벅이'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지금 생각해 보니 많이 걷고 걸었던 것이 두 다리를 튼튼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길을 걸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풍경들과의 조우,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뇌가 활력을 찾는 점에서 걷는다는 것은 건강과 정신적 에너지를 시너지 효과까지 거둘 수 있어 향후 가능하면 걷기를 생활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에는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해 살고 있는 단지에서 바둑판 꼴로 되어 있는 반경 1km정도의 거리를 직선으로 걷고 우회전하여 500m정도 걷다 다시 직진을 1km정도 한다.녹음방초의 계절이고 저녁 무렵에는 날씨가 선선하고 풀밭과 개울가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들을 듣다 보면 어린시절로 되돌아 간다.내가 걸으면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여 새로운 것을 찾아 내려는 목적보다는 무념무상의 자세로 두 팔을 시원하게 앞뒤로 내젖으면서 가슴과 등에서 땀이 흥건히 배이도록 걷기를 한다.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거의 40분 정도가 소요되고 시원한 물줄기로 샤워를 하게 되는데 그 상쾌한 청량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좋기만 하다.

 

 흙의 기운을 받고 흙의 중력과 호흡하면서 걸어 보는 것은 요즘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대부분 콜타르로 이루어진 아스팔트 길이 대부분이어 자연의 내음은 거의 맡을 수가 없는 대신 길에 심어져 있는 수목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게 된다.가끔은 내가 나무라면 길을 걷는 행인에게 무슨 선물을 해 줄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해 본다.허겁지겁 뛰는 자에게는 대화를 나눌 겨를도 없을 것이기에,여유를 갖고 느리게 걷는 사람에게는 그늘이 되어 주고,살아 가는 사연을 차분하게 들어 주고 싶다.겨울에는 비록 앙상한 버팀목과 가지,줄기만 남아 있어 따뜻함을 안겨 줄 수는 없어도 삶의 꿈과 희망을 함께 나눠 보고 싶다.걷다 보면 마음 속에 응어리진 좋지 않은 생각과 감정들이 대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대신 신선한 신진대사가 내 몸 속으로 깊이 들어와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해 준다.

 

 걷는 이유는 여러가지 사연이 있겠지만 우선 건강을 찾기 위한 생활의 방편이 아닐 수가 없다.사색과 몽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풀 한 포기,나무 한 그루,지저귀는 새들을 응시하면서 무언의 소통과 교류를 할 것이다.사계에 따라 색상이 바뀌어 가는 위대하고 경이로운 자연의 섭리에 찬탄을 하기도 하고,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글을 쓰는 소재의 원천,영감이 떠오를 수도 있다.내가 걷기를 길이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걷고 걸었던 가운데 잊혀지지 않은 걷기는 어린시절 어머니와 함께 외가를 갈 때의 다양한 길이었다.당시는 철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흙과 돌멩이가 지천에 깔린 비포장 도로와 논과 실개천 사이로 만들어진 제방길,그리고 다시 외가로 접어 드는 길이었다.모든 길이 포장이 안된 흙이 있던 자연 그대로의 길이었는데,어쩌다 버스,트럭이라도 지나치기라도 하면 흙먼지들이 공중을 휘감으면서 시선을 흐르게 만들었다.외가를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봄,여름,가을,겨울에 찾아가는 외가로 가는 길의 정취는 계절에 따라 다가오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보리가 피어 나는 이른 봄,모내기가 끝난 하지 무렵,콩과 수수,밤과 같은 과실들이 알차게 여문 만추,소복하게 내린 하얀 설경 속을 조심조심 걸어 가던 때의 겨울의 입성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어린시절의 외가로 가는 길의 기억과 추억은 중년이 되어 버린 지금도 한 장면 한 장면이 엊그제와 같이 새록새록 기억의 떡잎이 돋아나고 있다.

 

 두 발로 느리게 걷기도 하고 질주하기도 하면서 사유했던 철학가들과 걷기의 유익한 점들을 다양한 사유법과 사유방식을 전해 주고 있는 이 글을 읽으면서 현자들의 걷기와 일반인의 걷기의 차이점을 떠나 걷기는 인간에게 수많은 유익함을 선사하고 있다.고통과 상처를 잊으려 걷기를 하고,울분을 토해 내고자 뛰기도 하며,도시와 건물을 유유하게 관찰하는 소요적인 자세,신앙인으로서 성자를 찾아 나서는 순례자의 걷기 등이 다채롭게 전해지고 있다.걷기의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걸으면서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과 합목적성을 갖는다면 삶의 질은 지금보다 더 고양되리라 생각이 든다.평지를 걷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가파른 산길을 걷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나아가 대로를 미친 듯이 활개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순례자와 같이 엄숙하고 검허한 자세로 걷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전망이 탁 트이고 윗부분이 앞으로 툭 튀어 나온 곳에서 투명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 좋다. -P39

 

 사실 요즘에는 거의가 인도든 차도든 흙을 밟을 기회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일부러 흙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외진 시골을 찾아 가지 않은 이상은 아스팔트,벽돌과 같은 보도블록을 밟을 수밖에 없다.그렇다고 주위의 경관이 탁 트이고 툭 튀언 나온 곳을 발견하기도 어렵기만 하다.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단지 주변은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것이 불행중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인공적으로 심어진 나무이지만 신록의 계절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짙푸르기만 하다.나무 잎사귀를 쭉 짜게 되면 짙은 녹즙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이 지치고 상처난 마음을 위로해 준다.어디 그뿐이랴.어스름한 새벽녘이 되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지저귀는 새들의 수다에 기분 좋은 아침을 맞기도 한다.

 

 사막 위의 대상과 같이 또는 초원 위의 유목민과 같이 삶의 터전과 생계를 위해 몇 날 며칠을 걸어야 하는 생계형 걷기도 있는가 하면,고독을 씻어 내려 걷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자연 속에 잠긴다는 것은 나무들,꽃들,길의 색깔 등 서로에게 말을 걸고,인사를 나누며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구를 한다.바람소리,곤충의 울음소리,시냇물 소리,발이 땅에 내딛는 소리,빗소리 등은 실내에서는 관념적으로 다가오지만 밖으로 내딛는 걷기는 힘차고 육중하며 생동감을 더해 준다.인간이 자연의 품에서 태어나 자연의 품으로 죽음을 향해 가게 마련이지만,죽음의 중력에 이끌리지 않고 더욱 멋진 삶을 살아 보려면 숲과 오솔길,(조선시대)과거를 보러 고갯길,외진 숲길을 걷던 곳을 찾아 나서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걷기를 통해 선현들과 대간접적인 대화를 나눠 보기도 하고,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보는 경험도 살아 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걷기와 관련한 다양한 철학자 및 철학계보 그리고 정치적 성향을 띤 인물과 걷기의 유용성 등을 다양한 갈래로 전해 주고 있다.투박하고 원초적인 걷기에서부터 고독을 씻고 사유의 방향성을 바꿔 보고자 걷기도 하며,생계형 걷기와 외세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해 걸었던 다양한 인물들의 걷기 속에는 분명 목적이 있었다.안에 틀어 박혀 있는 것은 죽음과 같다.건강을 위해 활력을 되찾고 고요하고 평정을 되찾아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걷기를 꾸준히 하다 보면 걷기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사유를 더욱 깊게 해 줄 수 있는 보배로운 존재가 되어 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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