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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빛 ㅣ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5
이누이 루카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녹음방초의 계절로 알려진 여름이 내게 주는 이미지는 두 가지로 나뉜다.썰물마냥 일시에 밀려 나간 도회지의 고적하도록 텅빈 아스팔트가 내뿜는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그리고 한가롭고 느림이 묻어 나는 농촌과 어촌의 싱그러운 자연의 내음이다.도회지의 여름이 단조롭고 고독하게만 다가오는 반면 농촌과 어촌의 여름은 천혜의 자연이 안겨 주는 흙,바람,물,공기 모두가 태고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산촌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여름날은 산과 들,내로 쏘다니면서 심신을 키우던 시절이었다. 《여름 빛》이 안겨 주는 이미지는 따사롭게 내리 비치는 태양의 물결과 거무스름하게 탄 구리빛 살결이 천진난만하게 성장하던 과정이기도 했다.
이루이 루카작가는 일본 신예작가로서 2006년 《여름 빛》》으로 올요미모노 신인상을 수상했다.일본 미스터리 평론가 가야마후미로(香山二三郞)가 작품평에서 밝혔듯이 무적국풍에 여왕님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기대해도 괜찮은 작품일지 반신반의였는데 기대 이상의 걸작(傑作)이었다고 평하고 있다.나 역시 여섯 편의 소설을 읽어 가면서 전반적으로 느끼는 점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세상과 사물,기성세대와 부딪히면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감정,돌파구 등을 잔잔하게 그려 내고 있다.여섯 편의 소설들이 시.공간은 다르지만 괴기하고 소름이 돋아나게 하고 애잔한 슬픔이 잔뜩 묻어 나고 있다.읽다 보면 '풋'하고 폭소가 나오는가 싶으면 또 다시 괴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생리가 시작되는 어린소녀들이 밀매단에 팔려와 장기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사회고발성 르포형식을 띠는 작품도 섞여 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진 이 작품은 각부의 제목은 신체부위로 정했다.제1부는 눈.입.귀,제2부는 이.귀.코이다.인간의 신체부위에 따라 보고 먹고 듣고 (냄새)맡으며 그 상황에서 느끼는 온갖 감정과 표현을 잘 담아내고 있다.이누이 루카작가가 여성이다 보니 내용이 더욱 섬세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어렵게 얽혀 있는 내용은 없지만 인간의 심리,정념,회한 등을 그리고 있기에 음미하면서 읽는 것이 전체적인 내용과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가 있다.1부는 일본 다이쇼(大正)시대,패전 직전의 시대를 그리고 있으며,2부는 현대사회에서 꾸물거리고 이야기거리가 될 수 있는 것들을 그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마지 일본이 미군의 공습에 의해 도회지인들을 시골로 소개(疎開)를 보내면서 주인공 데쓰히코가 바닷가 친척집으로 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못생기고 잘딸막한 다카시 그리고 패거리인 다니카와가 나온다.다니카와는 다카시를 두고 "너희 엄마가 상쾡이(돌고래의 한 종류)를 먹고 너를 낳아 저주를 받았다,그래서 네 엄마가 신의 저주를 받고 일찍 죽고 너 역시 못생기고 키도 작을 수 밖에 없다"고 놀리고 때리기도 한다.그런데 데쓰히코에겐 다카시가 둘도 없는 사이로 변한다.미군의 공습으로 집,건물이 폐허가 된 고향의 엄마를 만나러 둘은 무임승차로 기차에 몸을 싣고 괴기한 바다마을을 떠난다.(여름 빛) 질병에 걸린 대학생 이시쿠로는 담임교수의 지인인 구와다 댁에서 저렴하게 하숙하면서 요양을 하게 되는데,구와타의 죽은 딸이 그에게 환생하여 유령으로 나타난다.구와타 식구들에겐 보이지 않으나 이시쿠로의 눈에 보이고 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다.이시쿠로는 아키코 소녀를 소묘로 그려내어 그녀에게 전하고 그녀는 글씨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마음이 애잔하기만 하다.몽매에도 못잊던 딸이 하숙생에게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구와타 부인은 불길한 새의 상징인 쏙독새를 죽여 버리고 만다.(쏙독새의 아침) 자신보다 더 예쁘고 화사하게 보이는 동생 마치에 대해 격렬한 질투와 증오심을 느끼게 된다.기미가 불행한 원흉(原凶)은 여동생에게 있다고 보고 액갚음을 시작한다.백 개의 양초를 모두 태우는 것이다.그런데 집안이 화마에 휩싸이면서 동생 마치가 중화상을 입게 되면사 액갚음은 자신의 의도는 아니고 모양새는 좋지 않지만 이루어지게 되고 만다.(백 개의 불꽃)
대학 시절 친구인 구마노미도의 퇴원 기념으로 회와 해물탕을 먹으러 구마노미도의 집으로 간 하세가와는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는 듯 풍성하고 다채로운 해물요리를 내 놓는다.그런데 금붕어 낚기 달인인 구마노미도가 괴물 금붕어에게 당한 일화를 들려 주면서 튼튼한 이로 금붕어의 뼈까지 오도독 씹으면서 정신적 희열을 느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회와 해물탕,낚시에 관련한 이야기는 관심과 흥미,입맛을 다시게 하고도 남았다.(이) 마술사로 유명세를 날리던 다쿠의 가족은 아버지가 무대 위에서 실수하는 바람에 마술협회로부터 잘리면서 다쿠는 시골로 전학을 온다.온몸에 상처투성이의 다쿠이지만 반친구들이 마술에 대해 호기심과 흥미를 갖는 것에 대해 함께 어울리려 한다.트릭과 속임수와 관련하여 친구들에게 들려 주는 얘기도 소소하지만 흥미롭기만 하다.마코토는 영뚱한 대모험으로 낮은 산의 철탑 꼭대기에 올라 푸른 창공의 내음과 파일럿의 꿈을 그려 가는데,다음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다쿠가 아버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뉴스가 실린다.마코토의 꿈을 잘 이해하고 들어주었던 다쿠를 잃은 마코토는 실의에 빠지지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은 여름날의 광채 만큼 빛났다.(Out of This World),개호복지사로 일하는 아야코는 소녀시절 동남아에서 끌려온 여자아이들을 포주에게 넘길 때까지 감금하는 일을 친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크메르 출신 츠마를 만나게 된다.츠마는 인신매매 브로커가 시킨 주문을 늘 큰소리로 읊어야 했다.아엔(너),슬람(죽는다),롯밧(도망치다),문반(~할 수 없다)이라고.츠마는 인신매매단에 넘겨지기 보다는 죽음을 앞두고 장기매매의 대상으로 점찍혀져 있다.그러한 가운데 주인공 아야코는 같은 10대 소녀로서 느낀 감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나는 눈에 비치는 그런 광경들을 바라보면서 역시 나는 이렇게 내내 살아가는 걸까.제대로 된 인생에 등을 돌린 채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가솔린 냄새를 맡으면서 평생을 보낼까.막연하게 생각했다. -P288
그리고 아야코는 자신의 아버지가 츠마를 이식용 인재로 삼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아버지의 정수리를 삽으로 내리치고 만다.무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와 함께 사느니 야수와 같은 아버지를 척살하여 자신만의 삶을 살고자 했던 아야코는 아버지의 주검을 숲속에 버리고,실신한 츠마를 자신의 잠자리에 재우고 회생하기만을 기원했다.그리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몸과 마음으로 갈망했던 것이다.(바람,레몬,겨울의 끝)
이루이 루카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지만 과거의 여름날,요즘의 여름날을 신체의 부위가 보고 듣고 먹고 맡는 감각을 통하여 일상과 세상은 슬프고 괴기할 정도로 공포스러운 면을 다채롭게 잘 그려 내고 있다.1부에서의 상쾡이와 쏙독새가 일본인에게 저주와 불길함의 상징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일본인의 의식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가 있었다.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누이 루카작가는 신인작가이지만 기발한 소재, 날카로운 통찰력과 상상력이 한층 돋보일 만큼 그 노력의 흔적이 요소 요소 잘 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