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세우기 - 숭례문 복구단장 5년의 현장 기록
최종덕 지음 / 돌베개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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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가옥과 문화에 대한 기억과 단상

 

 유년시절 초가지붕을 매년 한 번씩 얹는 모습과 기와집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일꾼이었던 할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찾아 오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탈곡한 볏짚을 용도에 맞게 손질하고 (새끼 꼬듯)꼬아서 헌지붕을 말끔히 털어내고 그 위에 새짚으로 지붕을 엮으셨다.어렸던 나는 어른들이 지시하는 것만 지붕 아래에서 심부름을 하는 정도였는데,용마루를 얹을 무렵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사이좋게 양쪽에서 볏짚을 정돈하는 모습을 보았다.새 볏짚으로 지붕이 엮어지면 맨마지막엔 처마끝의 삐죽나온 볏짚을 머리 손질하듯 다듬으셨다.그중에 인상적인 것은 헌볏짚을 드러내면 그속에서 굼뱅이들이 갈 곳을 잃고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나는 무섭고 징그러워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섰는지 모를 정도로 오금이 저렸던 기억도 새롭다.기와집은 초가집을 헐어 내면서 터를 잡으면서 기초작업과 기둥세우기,상량식,기와 올리기 등의 절차가 진행되었는데,고교시절이고 수험기간이라 상량식만 얼핏 보았던 기억이 난다.초가집은 기와집을 짓는 것보다는 짓는 과정이 단순하게 보이지만 볏짚을 따로 구입하지 않고 집에서 농사지은 볏짚을 이용하니 자급자족을 할 수가 있어 좋았고,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척척 맞는 손발이 리듬감을 타면서 반나절도 되지 않아 깨끗하고 말끔한 초가가 탄생되었던 것이다.일 중간 중간 어머니는 샛거리(간식)를 준비를 하셨는데 고구마,김치,막걸리가 전부인 조촐한 파티와 같았다.소박한 시골 생활을 상징하는 단표누항(簞瓢陋巷)의 정감어린 시절이었다.

 

 어른이 되어 자식을 양육하는 입장에 있어도 눈을 감으면 아스라하게 펼쳐지는 정겨운 시골마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데 대부분 초가 일색인 동네에 몇 가구는 때깔나는 기와집이 아직도 뇌리에는 선연하게 남아 있다.잘 사는 부잣집에만 기와집이 있었던 까닭에 어린마음에 기와집에 대한 동경심은 오래도록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또한 사월 초파일에는 으례 불공(佛供)을 드리러 절을 찾곤 하는데 그 일은 할머니께서 맡으셨다.할머니를 따라 비포장 길을 시오리길을 걷고 또 걸어 깊은 산중의 절에 도착하면 딸랑딸랑 바람에 나부끼는 풍경(風磬)소리,깊은 맛이 융숭한 목탁소리와 정중하고 경외스럽기까지 한 불자들의 백팔번뇌의 모습 그리고 사찰 마당을 휘감은 색색의 연등이 즐비하게 드리워져 있어 마음은 한양없이 기쁘기만 하다.돌계단을 올라 추녀 밑에 찬란하게 그려진 단청 문양은 신비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다.당시에는 불공을 드리러 갈 때 돈보다는 쌀로 시주를 하고 예불을 드렸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고교시절까지는 지방에서 살았기에 옛한양의 관문격인 남대문 즉 숭례문은 사회과부도에서나 잠깐 눈을 마주쳤을 뿐 특별한 존재로는 인식을 못했다.그것도 한국 보물 제1호이면서 한국문화의 자존격인데 '소가 닭보듯' 했던 게 불찰이라는 생각마저 든다.지난 MB정부 탄생 직전 즉 2008년 2월 10일 화마에 휩싸이면서 우리 곁을 사라져가 버린 숭례문(崇禮門)은 만 5년 여에 걸쳐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화마에 휩싸이고 방화범이 밝혀지면서 온국민은 애지중지하던 자식을 잃은 듯 크나큰 슬픔과 비애로 가득찼었다.숭례문이 불에 휩싸이던 모습을 TV에서 보던 나 역시 문화재가 허술한 관리로 인해 불타는 모습에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다행히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국민들은 좋은 뜻과 마음으로 합심,협력했던 과거가 있었던 만큼 뜻있는 분들의 성금과 (자발적으로)소나무와 같은 재료 기부자가 나왔던 것이다.숭례문이 지붕까지 소실되면서 판액(현판)이 소방관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었다.

 

 

       숭례문의 소실되기 전의 시대사 및 복구된 현재의 숭례문 모습

 

 

 숭례문의 소실과 복구 건립과정 뒷이야기

 

 이성계에 의해 건립된 숭례문은 한양 도서의 관문격으로 수차례 전란의 화를 당하고,복구하고,수리하면서 근 600여 년을 잘 버텨왔지만 사회에 불만이 가득했던 노인의 어리석은 행위에 의해 이제 숭례문은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숭례문 복구원칙'에 의해 숭례문은 기초부터 지붕까지 각분야의 장인들의 노고와 공사 감독,감리 등을 거쳐 2013년 5월 준공에 이르렀던 것이다.숭례문복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숭례문 복구 현장기록을 자료와 삽화,증언과 탐방 등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는 최종덕저자는 숭례문이 준공되면서 복구단장에서 해임되고 현재는 문화재정책국장을 맡고 있는 분이다.저자는 숭례문복구단장으로서 공사현장을 살피고 기와도공 등을 만나기도 하고 숭례문 복구 과정상 드러나는 문제점에 대해 기자들에게 해명을 하기도 하는 등 숨가쁜 시간과 나날을 객관적으로 잘 해명해 주고 있다.안타깝게 느끼는 점은 문화재든 건조물이든 늘 '사후약방문'격이라는 것이다.부실공사,관리미흡 등으로 사고현장을 바라볼 때마다 공사관계자,관계 공무원들은 책임 떠넘기기 일쑤이고 몸을 사리는 경향이 너무 짙다.나아가 국가지도자격에 있는 분들의 문화재 관리.보호에 대한 인식이 미흡하다는 것이다.숭례문 관리단쳬를 놓고 갑론을박이 무성했다.해당 관리단체인 중구청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숭례문 관리에서 손을 떼고 결국 문화재청이 복구의 주체가 되었다고 한다.

 

 문화재청장에 의해 발효된 숭례문 복구 기본원칙은 거의 옛모습을 되살리고 전통재료를 사용하자는 것이 대부분이다.숭례문의 성문을 화재 전 모습대로 복구하고,기존부재는 최대한 재상용하고,고증과 발굴을거치고,최고의 장인들이 참여하여 전통기법과 도구 등을 사용하자는 취지이고 원칙이다.하지만 막상 전통기법을 살리려다보니 조선시대 숭례문을 건조할 당시의 자료들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도 않을 뿐더러 공법(工法) 역시 재래식으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소나무는 운반하면 되지만 육축에 쓰이는 돌부터 전통재료,전통연장,전통기법을 백퍼센트 실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또한 고급 일꾼인 장인 및 일반 일꾼들의 품삯은 <문화재수리 표준품셈>에 의해 정해졌다.기존부재는 광화문 복구시 사용하고 남은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이었고,전통철문제작과 전통기와 등은 기업 및 은행,관계대학의 협찬을 통해 이루어졌다.숭례문은 한양 도성을 지키는 수문장이었기에 숭례문의 기초,뼈대,몸체에 이르기까재 재료와 기법,연장 등에 대한 용어도 생경한 것들이 많았지만 이번 기회에 전통문화를 새롭게 바라보고 인식하며 우리의 것을 아끼려는 주체적인 시민의식을 갖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숭례문 복구가 끝나고 '잘 했다,못했다' 등의 잡음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최선의 재료와 기법을 살려 숭례문을 복구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제대로 된 관리와 보호로 국가의 문화재가 수난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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