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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앨리스 먼로작가는 단편소설의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행복한 그림자의 춤>,<미움,우정,구애,사랑,결혼>을 읽고 이번 <런너웨이>를 읽고 나니 3권 째 읽은 셈이 된다.개인적으로는 어느덧 장편소설에 재미를 느끼고 알게 모르게 길들여져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그런데 원고지 100장 남짓 분량의 단편소설이라면 중편소설 못지 않게 작가가 풀어 내려는 스토리의 전개에 따라 글의 완성도 및 작품성이 결정되리라 생각하는데 앨리스 먼로작가의 소설 한 편 한 편은 내게는 커다란 울림과 공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앨리스 먼로는 여성의 관점에서 세상과 일상,인간군상의 심리 묘사를 매우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그려 내고 있다.그녀가 1930년대 초반에 태어났으니 어린시절 겪었던 대공황,제2차 세계대전,경제위기 등이 캐나다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작가의 고향이 시골이라 산업화와 도시화가 덜 된 시대를 살아 왔기에 시대의 변천과 사회구성원의 의식세계 그리고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시간과 세월 속에 묻어나는 경험담에 대한 소재와 스토리텔링은 무궁무진할 것이다.현재 83세의 노령인 앨리스 먼로작가는 삶의 후반생을 걸어 가고 있기에 지난 세월은 주마등과 같은 파노라마와 같기도 하고 아련하게 잊기 어려운 지난 시절의 삶이 그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표제인 런어웨이를 비롯하여 총8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요즘에는 남자들도 셋만 모이면 수다스러운 분위기가 된다고 하는데,앨리스 먼로의 작품 속에는 속앓이를 하는 여인의 사연과 수다성 섞인 에피소드들이 그야말로 잔잔하고 정교하게 흘러가고 있다.8편 모두가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 및 남편과의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때로는 종교적인 화제를 놓고 신앙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심적갈등을 빚다가 먼훗날 무신론자로 살아온 자신을 성찰하는 부분에서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맨마지막 글인 힘에서는 의사 윌프와 세 여인이 등장하는데 백혈병으로 죽었다던 테서가 길에서 올리를 만났다고 전하는 낸시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지 헷갈리기만 했다.
런어웨이는 남편 클라크의 진정한 사랑이 없는 가운데 섹스만 해왔다고 생각하는 부인 칼라는 집을 떠나고자 하면서, 제이미슨 부인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애완동물 플로러마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남편 클라크가 애완동물 플로러를 멀리 보내고 대신 아내 칼라는 제이미슨 부인의 격려성 편지를 받으면서 집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우연,머지않아,침묵은 줄리엣이 주인공이다.교사자리가 비어 잠깐 자리를 지키다 본교사가 복직하자 줄리엣은 기차여행을 떠나면서 기차간에서 에릭을 만나 엉겹결에 퍼넬러피라는 아이를 낳게 되고,교사였던 줄리엣의 아버지는 성격상 교사로서의 학생들 앞에서 근엄성을 잃어 퇴직을 하고 야채장사를 하게 되는 사연과 딸 퍼넬러피를 부모님께 보여 드린다.후일 남편 에릭은 새우잡이를 하다 변사체로 변하면서 해변가에서 쓸쓸하게 화장을 하게 된다.나아가 퍼넬러피가 성년이 되면서 자신이 젊은시절 목사로부터 신앙과 신의 존재에 대해 무신론적인 발언과 신앙의 불필요성이 집떠난 퍼넬러피의 인생에 잘못된 영향을 줄 수도 있겠다고 줄리엣 스스로 자성을 한다.
그레이스와 모리,닐,트레버스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 열정은 알코올 중독에 의해 그레이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지만 사과의 의미로 수표를 건네면서 새출발을 알리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허물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네 명이 차를 타고 가다 토해내는 이야기는 부모의 자격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즉 친구 같은 부모로 남을지,아니면 귄위 있는 부모로 남을 것인가 말이다.반전은 남자를 거의 모르던 연애숙맥이고 연극을 좋아하던 로빈이 몬테네그로에서 코럴을 만나는데 그는 쌍둥이 형제였다는 사실에 아연실색을 하지만 말못할 사연을 털어 놓고 싶을 때 그를 찾을 것이다.
여성의 사연은 천갈래 만갈래인가 보다.읽어도 읽어도 의미중심이 무엇인지 이해가 잘 안갈 때가 많다.앨리스 먼로 작품 역시 주마간산격으로 읽었던 탓에 충실한 서평이 되지는 못했다.내 어머니 세대,내 또래의 여성 그리고 현대여성들이 남성들과 겪었고 겪었을 법한 스토리는 잘 재워 놓은 불고기감마냥 아래에서 즙이 새록새록 우러나오고 있는 것과 같이 오랜 시간 숙성되어 발효된 음식과 같은 사연이 듬뿍 담겨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앨리스 먼로작가의 사연은 참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재미있게 다가 오지만 여성이라는 마음이 속으로 새기면서도 맛맛한 상대를 만나면 '안주 씹듯' 자근자근 털어 놓기도 하나 보다.특히 인상 깊게 다가오는 부분은 사연,감정,대화의 내용이 구구절절하게 끊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다는 점이다.우리 일상 속에 흔히 있을 법한 사연과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